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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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소인이 비록 미천한 복인(卜人)이라지만 부디 가벼이 듣지 마십시오.”
내내 미심쩍은 눈으로 유복을 바라보던 양추가 말했다.
“너는 익주 파서 사람이라고 했겠다?”
“그렇습니다.”
“너의 말은 량왕에게 불리하다. 이는 곧 량왕과 맺은 촉왕에게도 불리한 말일 터. 헌데 너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귀띔을 해주는 것이냐?”
유복은 양추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명공의 말씀에서 세태의 비참함이 절실하게 느껴지는군요.”
“뭐라?”
“소인은 천한 복인이옵니다. 소인이 촉에 산다고 촉왕을 도와야합니까?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촉왕은 우리를 다스리지만 우리를 위하지는 않습니다.”
양추는 팔짱을 끼고 유복의 말을 들었다.
“촉인이면 촉왕을 위해야 합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저는 왕을 위하지 않습니다. 촉에 산다고 촉의 왕을 위하지 않습니다. 천한 이는 귀한 이에게 다스림을 받는데, 그것은 천한 이로서 기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스로 나서 그를 위하기까지 해야 합니까? 다만 저는 천한 분수로 먼 곳의 천한 분수를 가엾고 딱하게 여길 뿐입니다. 환란의 안개가 서량에 짙게 깔린 것을 보고, 서량의 버러지 같이 사는 사람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그들의 딱한 목숨을 한둘이라도 건져보고자 왔습니다. 저는 같은 땅의 왕을 위하지 않고 먼 땅의 동류(同類)를 위합니다.”
“으음……”
유복은 얼굴을 붉히며 토로했다.
“저는 명공을 위하고 싶지도 않고, 이곳에 계신 관중제장을 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곳의 천하고 딱한 남녀노소들을 위할 뿐입니다……”
울음기마저 섞인 절절한 외침에 순진한 승냥이들은 동정심마저 느끼며 침묵했다. 유복은 슬그머니 일어나며 관중제장을 향해 절을 올렸다.
“천한 복인의 힘이 미치는 곳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제 말을 취하시려거든 취하시고, 버리시려거든 버리십시오. 천시(天時)는 하늘에 달렸으나 인심(人心)은 그야말로 사람에 달렸으니… 사람의 속은 복인도 어쩌질 못하나이다.”
유복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려 하자 양추가 그의 걸음을 붙들었다.
“멈춰라.”
유복이 우뚝 멈추자 양추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그대로 가면 나는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유복은 육갑을 짚으며 엷은 웃음을 띠었다.
“이 복인의 운수가 아직 다하지 않았습니다. 명공은 지금 저를 죽이지 않으실 겁니다.”
양추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복에게로 다가갔다.
“그렇다. 네가 내 말을 듣는다면 널 해치지는 않겠다.”
양추의 날카로운 눈매가 유복의 둥근 몸을 바라봤다.
“나는 거병을 결심했다.”
양추의 선언에 관중제장의 표정이 오묘하게 흔들렸다. 결심을 입 밖으로 낸 것은 양추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네가 돌아가 제대로 함구하지 못하면 자칫 거사가 뒤틀릴 수 있음이라.”
유복은 손을 모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 품어봄직한 염려입니다.”
“그러니 네가 돌아가겠다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여기 남아서 우리를 돕겠다고 한다면 너를 살리는 것은 물론 거병의 후에 후하게 대접하도록 하지.”
유복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천한 것이 유일한 보배로 쥐고 있는 것이 구질구질한 목숨 하나뿐인지라…… 그것을 두고 말씀하시니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얘기가 잘 풀리자 경색되었던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마완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유복의 손을 맞잡았다.
“신복이 우리의 편에 섰다는 것인즉 우리가 이기리라 확신해도 좋다는 것이렷다?”
유복은 웃음으로 화답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천기를 누설하였으니, 하늘의 화가 이 복인에게 떨어질지도 모르겠군요.”
관중제장은 마침내 마등과 한수에게 반기를 들기로 결단했다. 그는 유복의 점괘대로 양흥을 포섭하고 정은과 성의, 후선은 한수와 함께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양흥 역시 마등으로부터 숱한 수탈을 받아왔기에 이감, 양추, 마완의 계획에 호응했다. 한중에서는 전마와 양곡을 보내라는 재촉을 연거푸 해왔지만 이들은 마련되는 대로 보내겠다며 차일피일 미루면서 은밀히 병사를 조련하고 병량을 축적했다. 마술(馬術)에는 여든 먹은 노인도, 규방의 아녀자도 모두 능했으나 정교한 모략에는 죄다 깜깜한 치들뿐이었다. 결국 유복이 일선에 나서야 했으나 그가 솜씨 좋은 모략가라는 것을 들키면 곤란했으므로 하늘의 뜻을 빙자하였다.
“을축일(乙丑日)은 정은, 성의, 후선의 기운이 동시에 쇠하는 날이니 한날에 암살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로 병사를 몰아 한수의 본거지로 밀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유복의 말에 장선생이 딴죽을 걸었다. 그도 몇 마디 보태서 밥값은 해내야 마음이 편할 터이니.
“허나 많은 적을 동시에 치는 것은 어렵소. 세 장군을 모두 암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오. 하나라도 어긋나면 일이 크게 엉키고 말 것인데.”
유복은 그를 흘끔 바라보고 말했다.
“한 자리에서 죽이면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응?”
장선생은 입을 다물었다.
이감의 영지에서 매끈한 서량 말을 탄 전령 셋이 빠르게 튀어나갔다. 그들은 각각 정은, 성의, 후선에게 닿았다. 그들을 이감의 영지로 초청했다. 기실 그들을 암살하자면 사람을 느즈러지게 만드는 술판을 구실로 삼음이 좋겠으나 정은, 성의, 후선은 이감, 양추, 마완과 소원한 사이이니 주연(酒宴)을 빙자하는 것은 개울보다 얕은 계략이니 저들의 발목만 적시고 말 터였다. 그러니 전령들은 사무적인 구실로 정은, 성의, 후선을 불러들였다. 한중으로 보낼 인력과 물자를 어떻게 분담할지 의논해보자는 명목이었다. 다만 그들이 먼 곳까지의 여로에 오르는 것을 납득시켜야겠기에, 이감이 병이 들어 먼 곳으로 갈 여력이 없다는 점을 알리면서 정은에게는 이감의 명마(名馬)를, 성의에게는 보검을, 후선에게는 이감이 시비 중 풍만한 것을 내주겠노라 약조했다.
“한심하긴! 씩씩한 사내로 태어나 병으로 골골거리는 꼴이라니!”
후선은 이감의 말을 전달받고 그를 조롱했다.
“이감의 땅으로 간다! 채비하라!”
그는 지체하지 않고 이감의 영지로 떠났다. 결코 풍만한 시비와 한시라도 빨리 눕고 싶은 생각이 드는 까닭은 아니었다.
거리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후선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감은 와병을 핑계로 다음에 접견하겠다고 하고, 후선을 얼른 별채로 모셨다. 후선 역시 가깝지 않은 동료의 낯짝을 보기보다는 다른 쪽이 기꺼웠다. 후선은 몇날 며칠 술만 받아 마시며 별채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어 성의가, 정은이 도착했다.
그들이 조나의 성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방의 문이 폐쇄되고 무장한 병력들이 달려들어 정은, 성의, 후선과 그의 노복들을 모두 격살했다. 정은에게 주기로 한 명마는 마구간을 나서지도 않았으며 성의에게 주기로 한 보검은 얌전히 검괘에 걸려 있었으니 풍만한 시비만 상했다. 모름지기 당대의 여인은 네 발로 뛰는 짐승만도 못하며 이목구비가 없는 쇳덩이보다도 못하니, 참담했다.
정은, 성의, 후선을 죽이고 그 주검을 치우자마자 이감, 양추, 마완, 양흥은 전 병력을 한수의 본거지이자 서량의 치소인 무위군(武威郡)으로 몰아갔다. 말 탄 자들이 많았고 끝없는 평지였기에 관중제장의 연합군은 무도를 향해 쏜살처럼 나아갔다.
유복은 관중제장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말을 달렸다. 서량의 억센 자들이 서로 창칼을 맞대게 하였으니 소기의 성과는 이루어냈다. 정은, 성의, 후선을 제거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의 세력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다. 속히 한수를 치고 그의 세력을 흡수하여 관중을 온전히 평정한다면 한중의 마등은 심대한 타격을 입고 오왕동맹에서 이탈할 터였다. 가장 사납게 달려드는 마등을 이탈시킨다면 결정적으로 동맹을 분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관중제장의 군대는 무서운 속도로 북진했다. 중간에 지치는 자는 낙오시켜 휴식하다가 돌아가도록 했다. 조나의 난리가 한수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관중제장의 말발굽이 먼저 도착해야 했다.
어휴, 이러다 진짜 홀쭉이가 돼서 돌아가겠구먼…… 서량인만큼 마술에 능숙하지 않은 유복도 헉헉거리며 간신히 대열의 꽁무니에 붙어 따라갔다. 벌써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탔다.
“어이, 저곳이 요로다! 빠르게 통과하여 무위의 동쪽을 친다!”
무위의 지리를 잘 아는 양추가 동쪽으로 난 길을 가리키며 외쳤다. 모두들 이의가 없었다. 북쪽으로 곧게 내달리던 관중제장의 병력이 이제 동북쪽으로 사선을 그리며 나아갔다.
양추가 요로라고 말한 길은 평평했지만 좁았다. 십 열로 나아가던 병력이 오 열로 정열한 뒤에 길을 통과했다. 유복은 거추장스러운 점술사의 옷깃을 매만지며 오열로 선 대열에 합류했다.
대열은 좁은 길을 마구 내달렸는데, 갑자기 선두가 우뚝 멈춰버렸다. 그러자 뒤에서 달리던 이들은 관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들끼리 얽혀 우당탕 넘어졌다. 유복은 간신히 놀란 말을 다스려 낭패를 면했다.
선두가 급히 멈춘 것은 상당히 안 좋은 까닭에서였다.
“놀러올 거면 연통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렇게 급하게 찾아오다니. 놀랐잖은가?”
완전 무장한 한수가 좌우에 무수한 병력을 이끌고 관중제장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와 동시에 좁은 길목을 둘러싼 수풀에서 날카로운 창날이 관중제장의 병력을 완전히 둘러쌌다. 한수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킬킬 웃었다.
“한둘도 아니고 넷씩이나… 그래도 먼 길을 왔으니까 놀아주는 시늉은 해야 도리가 아니겠나.”
이감은 고삐를 쥔 채로 사색이 되었다.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완은 당혹감이 솔직한 표정으로 드러났고, 양흥은 줄 잘못 섰다는 후회막심한 얼굴이었다. 양추는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살아날 방도를 연구했다.
한수는 하나요, 관중제장은 넷이었으나 한수의 힘은 그들을 압도했다. 게다가 사방으로 한수의 창날이 둘러싸고 있으니 아등바등 활개를 쳐봤자 통발 속의 물고기가 팔딱거리는 것과 같았다.
“괘씸하군. 량왕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잠깐의 불편함을 감내하지 못하고 군대를 일으켜?”
한수의 목소리에는 진한 불쾌감이 묻어나왔다.
“너희를 토벌하여 후환의 싹을 도려내겠다.”
한수가 막 손을 들어 치려는 찰나, 양추가 급히 나섰다.
“잠깐! 한 공은 내 말을 들어보시오!”
“너의 멍청한 궤변에 넘어가줄 정도로 내가 녹록해보이더냐!”
“들어보시오!”
한수는 노기를 띠면서도 양추에게 기회를 주었다. 양추는 무구를 버리고 앞으로 나서며 한수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잘못하였소! 어떤 점쟁이의 말에 미혹되어 어리석게도 군사를 일으키고 말았소이다. 잘못했소, 잘못했소!”
양추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여기면서도 한수는 그의 말에 흥미를 느꼈다.
“점쟁이?”
“그렇소!”
양추는 유복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바로 저 자요! 저 자가 불길한 말을 입에 담아 거병을 부추겼소이다!”
한수의 시선이 양추의 손가락을 따라 유복을 향했다. 유복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파악하던 이감은 제 살 길이 죄를 유복에게 나누어 덮어씌우는 것밖에는 없음을 깨닫고 동참했다. 기실 유복의 말이 거병을 이끌어냈으니 모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소, 그렇소! 저 자가 스스로 일컫기를 익주 파서 사람이라고 하였소이다! 유장의 세작이 분명하오!”
한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장의 세작……?”
둔한 마완도 제 딴에 머리를 굴려 이감을 따랐다.
“맞소! 저놈이 반간계를 써서 우리를 부추겼소이다!”
“재밌구나. 촉왕은 오왕동맹의 일각으로 량왕의 맹우가 아니더냐!”
양추가 다급히 외쳤다.
“분명히 겉으로는 동맹을 표방하면서 속으로는 량왕의 뒤통수를 치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던 것이 분명하외다!”
한수가 엄한 목소리로 관중제장을 꾸짖었다.
“닥쳐라! 너희가 죄를 모면하고자 삿된 술수를 쓰는구나!”
양흥이 다급히 말에서 내려 한수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우리의 죄가 분명히 있소이다. 그러나 저놈이 우리를 부추긴 것은 분명하며 스스로 파서 사람이라 일컬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오. 우리가 유장의 노복이 아니냐 캐물었지만 저놈은 권세가에게 부역하지 않고 서량의 백성이 걱정스러워 이곳으로 왔다고 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유장의 계책이었던 것 같소. 우리가 저놈의 말에 속아 넘어가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지만 한 공마저 유장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오! 우리를 치면 서량의 일대가 혼란해질 것인즉, 결코 량왕에게 득이 되는 바가 아니오!”
한수는 입술을 비틀며 유복에게 물었다.
“네놈! 정녕 유장의 하수인이렷다!”
유복은 당당하게 외쳤다.
“서량의 잡것들이 머리가 굳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구나!”
“뭐라?”
“나는 합비공 제갈찬의 충신이니라!”
한수는 피식 웃었다.
“네놈은 합비공의 충신이라고 말하면서 네 주공의 이름자를 함부로 들먹이는구나?”
유복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받아쳤다.
“내가 파서사람이라 자칭했던 것은 최악의 경우에도 합비공을 해하지 않고 서량과 익주의 반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여기에 양추가 얼굴이 빨개져서 그를 힐난했다.
“네놈은 당당한 체 하면서 거짓을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것이 어디 가당한 변명이더냐!”
한수는 웃으며 유복에게 딴죽을 걸었다.
“네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데다가 너의 말투는 익주의 사투리를 어설프게 감추려하고 있으니 어찌 조잡하다 하지 않겠는가? 이놈!”
“칫!”
유복은 급히 고삐를 잡아당겨 한수를 등지고 도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좁은 길에 병력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데다 한수의 병사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도주는 어려웠다. 유복의 둔한 마술을 서량의 능란한 자들이 쉽게 이겨내니, 유복은 금세 말 위에서 끌어내려져 바닥에 턱이 처박혔다. 한수는 그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어설픈 계책으로 서량의 반목을 시도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고 딱한 자로다. 너 같은 놈은 살려둘 가치가 없다!”
한수는 유복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놈을 죽여라!”
유복은 바닥에 처박힌 채로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나는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어떤 병사의 창날이 유복의 두꺼운 가죽을 파고들었다. 피가 터지면서 처절한 고통이 유복의 속을 뒤흔들었다. 유복은 피 맺힌 외침을 허공에 떨쳤다.
“나는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다른 병사의 창날이 유복의 등을 꿰뚫고 다른 것은 어깨를 꿰뚫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유복은 외침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한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시끄럽구나. 목을 찔러 죽여라.”
“나는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날카로운 칼날이 유복의 경동맥을 꿰뚫었다. 유복의 시야가 캄캄해지며 고통이 무뎌졌다. 생명이 빠르게 쇠했다.
“나는 합비공의 충신이니라……”
유복은 안면을 바닥에 처박았다. 생명을 마치는 유복의 입술이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합비공의……”
한수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유복의 주검을 건너보다가 다시 관중제장을 향해 명했다.
“너희가 괘씸하나 너희를 치면 서량은 겉잡을 수 없이 혼란해진다. 너희의 병력을 모두 무장해제하고 나에게 위임하라. 훗날 량왕의 처분이 따를 것이니 너희의 신병도 내가 쥐고 있겠다. 환란을 우려하여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목숨만은 구제받은 관중제장은 낭패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비심에 감사하오.”
한수는 심복 성공영을 바라봤다.
“한중에 사자를 급파하라. 유장이 반간계를 써서 서량의 환란을 도모했다고. 항상 주의하시라 전하라.”
“존명!”
“우선 성으로 돌아간다!”
관중제장의 모든 병력은 무장을 버린 채로 한수에게 구금되었다. 관중제장들도 삼엄한 경비 속에 가둬졌다. 모두가 물러간 협로에 뚱보의 주검만 미지근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살피던 승냥이 한 마리가 조심스럽게 유복의 주검을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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