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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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익주의 난전은 일단락되었지만 하북의 정세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하후연을 주장으로 내세워 악전고투하던 조군(조조)은 결국 오환왕 답돈과 화전협약(和戰協約)을 고심하기에 이르렀다. 오환의 기세는 들불처럼 맹렬했고, 내내 그들과 이전투구를 벌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미 많은 사졸이 죽었고 많은 농토가 황폐화되었으며, 대병을 먹이느라 백성들은 굶주렸다. 은왕 원소가 끝내 삼보를 성공적으로 확보하고 담왕 유비가 거의 세력을 회복한 시점에서, 내내 답돈에 붙들려있으면 도리어 은담 연합에 의해 당해버릴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오랑캐놈들이 이토록 사납다.”
조조는 짜증이 잔뜩 번진 표정으로 뇌까렸다. 곽가는 멋쩍게 웃으면서 그를 위로했다.
“고조(유방)께서도 흉노의 대선우인 묵돌(冒頓)을 형으로 모시지 않았습니까? 오랑캐들은 원래 사납습니다.”
위로였으나 기실 그다지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었다. 조군 내에서 손꼽히는 맹장인 하후연을 보냈음에도 이토록 지지부진하니 차라리 답돈에게 땅을 떼어주고 화의를 맺는 편이 낫다고 조조는 판단했다. 본디 오랑캐들은 억누르기보다는 잘 구슬리고 어르면 귀부하기 마련인데, 답돈을 지나치게 물렁하게 보고 아예 발본색원하겠다는 생각으로 덤벼드니 답돈도 목숨을 걸고 발톱과 이빨을 드러낸 것이었다. 조왕 조조는 정욱을 보내 답돈과 담판을 짓도록 했다. 하후연은 면목 없는 표정으로 정욱을 담판장으로 안내했다.
조왕 조조는 답돈을 오환왕으로 인정하고, 오환의 마필과 조의 양곡을 정례적으로 교환하는 데 합의했다. 또한 유주의 북부를 답돈에게 떼어주고, 오환의 내부사정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답돈은 아주 북방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유주에 오환왕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조조는 북쪽을 바라보며 침을 뱉었다.
조조가 이토록 오환과 급작스럽게 화의한 것은 원소가 장안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요인이 가장 컸다. 시골 병주에 찌그러져 그들을 시한부 세력으로 규정했던 조조였다. 그러나 원소는 그 예상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순식간에 삼보를 꿀꺽 삼키고 마등과 천자의 연이은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삼보는 지속되는 환란으로 황무지였으나 낙양과 장안, 두 곳의 대도시를 품고 있는 만큼 그 잠재력은 그 어떤 지방보다도 컸다. 원소는 이제 병주와 삼보를 얻어 이제는 조조가 원소에게 뚜렷한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다만 조조는 오환과의 화의를 통해 전력을 은담 연합에 집중할 수 있는 데 반해, 은왕 원소는 송경 천자와 마등, 제갈찬을 동시에 견제해야하는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원소의 불안정한 후사였다.
하내, 은왕부.
원소가 병석에 누워버렸다. 기주를 뺏길 때부터 진행되었던 병세가 잠시 호전되다가 다시 악화되었다. 연거푸 피를 토했다. 원소의 번드르르한 피부는 이제 검고 푸석푸석하게 변해버렸다. 원소의 중신들은 내려앉은 분위기에서 조심스럽게 후사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원소가 병주로 물러난 이후 전풍은 섭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주도적으로 세력을 이끌었다. 그에 반대하던 봉기와 곽도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들이 지지하던 원담이 인질의 명목으로 서주에 끌려간 상황이었으니 눕고 싶어도 누울 자리가 없었다.
제 명이 끝나간다는 것을 잘 아는 원소는 전풍을 불렀다. 지금까지 전풍의 진언은 틀리지 않았고, 그는 제 배를 불리는 것보다 은왕부의 배를 불리는 것에 관심울 둬왔다. 한때는 그를 미워했지만 원소는 죽어가는 자의 빛나는 식견으로 그를 철저히 신뢰했다.
“원호(전풍의 字).”
떨리는 목소리로 불린 전풍이 대답했다.
“예, 전하.”
“후사는 무조건 원상이다.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대가 든든하게 지켜주지 않으면 소란이 일 것이다.”
봉기와 곽도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신명(身命)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원소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고병주(병주자사 고간)가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으음……”
원소는 무거운 신음을 뱉었다. 은왕 원소의 외사촌인 고간은 야심가였다. 병주의 세력가인 그는 원수가 업도에서 쫓겨올 때 공공연히 불쾌감을 표했다. 그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 사력을 다했다. 그렇기에 고간은 은왕의 척족이자 병주의 세도가로서 은왕부에서 상당한 세를 보유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원소 사후 세자 원상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정국은 삽시에 혼란스러워질 터였다. 전풍이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원소도 익히 알고 있었다. 원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따로 불러서 말하겠네.”
전풍은 결코 앞날이 녹록하지 않으리라 예견했다. 원소는 전풍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말했다.
“오늘 천자께 주청하여 자네를 승상에 명하도록 하였네.”
“전하……!”
원소가 손을 들어 전풍의 말을 막았다.
“또한 세자사(世子師)를 겸하도록 했네. 자네는 승상으로서 조정을 이끌고 세자의 스승으로서 은왕부를 지도하고 통솔해야만 하네. 무거운 짐이지만 자네만이 감당할 수 있어.”
“……”
전풍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더 사양할 수 없었다. 전풍은 누운 원소의 앞에 큰절을 올렸다.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저승에서도 지켜볼 걸세.”
원소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다가 피를 뿜었다. 어의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원소의 입가를 닦았다. 주군이 죽으면 어차피 어의도 죽은 목숨이었다. 전풍만 산 사람이었고 나머지 둘은 저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은왕의 주청을 허수아비가 뭐라고 트집을 잡겠는가. 천자는 전풍을 승상 겸 세자사에 명했다. 서열이 비슷한 봉기와 곽도도 영전하여 구경의 반열에 올렸지만, 껍데기뿐이었다. 봉기와 곽도는 위풍당당한 전풍의 모습을 보고 몸을 떨었다.
봉기와 곽도는 고간에게 달라붙었다.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역만리 서주에 갇혀있는 원담의 불알을 주물럭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풍이 꽉 쥐고 있는 원상이 원소의 후사를 이으면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 호우가 거세게 쏟는데 계속 맞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간은 원소가 죽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원상이 장성하였다지만 아직 연치가 어리므로 섭정이든지 하는 명목으로 권세를 거머쥘 수 있으리라 예단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봉기와 곽도가 살살 웃으며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허물잡기도 뭣한 것이,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살지 못했다.
“은왕께서 얼마나 더 사실 것 같은가?”
불충한 말을 고간은 멋대로 지껄였다. 애초에 희미하게 흐르는 원씨의 혈액을 제하고는 원소와 고간은 상극이었다. 그에게 충성이 없었기에 불충한 말이 자연스레 흘렀다. 봉기가 짐작했다.
“오래 사시면 석 달, 짧으면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훙(薨)하실 것입니다.”
“그 만하면 오래 사셨지.”
“아무튼, 손을 써야합니다, 손을……”
서주 담성, 담왕부.
“오래 잤다! 오래 잤어!”
유비는 찌뿌듯한 몸을 쭉 폈다. 그는 형주 공략에서 무수히 잃은 병력을 다시 회복했다. 죽은 자를 소생시킨 것이 아니니, 회복이란 죽은 만큼 낳고 기르고 한 것을 의미했다. 요행히도 난적 조조는 오환에 발목이 잡혀 답보하였고, 난적 중의 난적 합비공은 익주의 원정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유비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비는 편안하게 숨고르기를 하였고, 이제 다시 회복한 세를 손에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남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름을 듣기만 해도 질려버리는 제갈찬의 군단장들이 창칼을 쥐고 북쪽으로 올빼미 같은 눈빛을 쏘고 있었다. 영천의 진등, 여남의 고순, 수춘의 좌장군 장패, 오군의 제갈근…… 합비를 철통 경계하는 군단장들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지경이었다.
“누구 하나 칵 안 죽나 몰라.”
유비는 탁상 위에 놓인 전략지도에서 이들 군단장을 상징하는 말들을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퉁겨 넘어뜨렸다. 방통은 연기를 하는 듯 과장된 유비의 몸짓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말했다.
“원소가 오늘내일 한답니다.”
“음?”
유비는 다 들어놓고 제대로 못 들은 척 했다. 방통은 기쁜 소식을 다시 반복해주었다.
“원소가, 오늘, 내일, 한답니다.”
“음?”
세 번 반복은 없었다. 유비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원소는 동맹인 동시에 적이었다. 아무튼 관동삼제후의 관계는 저들끼리 얽힌 개족보니까.
“제갈찬의 강아지들이 하나 죽었으면 한다니까 하내의 승냥이가 죽을 판이로구먼?”
“전략적으로 잘 판단하셔야 합니다.”
“아무렴. 업도의 조왕 전하께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주유는 유비와 방통의 대담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는 손책이 회계에서 반림의 창에 목숨을 잃은 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칩거했다. 평생 어깨를 걸고 지낸 죽마고우가 눈앞에서 원수의 창에 심장이 뚫려 절명하는 기억은 자타가 냉혈한이라고 인정한 자라도 내내 상흔으로 남아있을 터였다. 그러던 그는 슬슬 기운을 차렸다. 담왕부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대로 허물어져버린다면, 지하에서 손책이 갖은 욕이란 욕은 다 퍼붓겠다 생각했다. 주유는 담왕 유비에게 제후 간의 제휴가 아닌 담왕부에 사관하겠노라고 밝혔고, 유비는 이를 받아들여 주유를 진동장군에 임명했다. 생전 손책의 벼슬이었다. 주유를 비롯하여 옛 손책의 가신들도 모조리 담왕부의 벼슬을 받았다. 숙장 한당, 정보, 황개를 비롯하여 태사자와 여범 등이 새로이 담왕부의 신속이 되었다. 이들은 유비를 향한 충심보다는 이대로 주저앉아 패잔병으로 역사에 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결정했다. 유비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충성을 요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복수를 종용했다. 손책의 옛 영지인 강동을 회복하면 반드시 주유를 필두로 한 손책의 가신들에게 할양하겠노라는 빈말도 잊지 않았다.
주유는 굳게 다물던 입을 열었다.
“반드시 전풍과 고간 사이에 분쟁이 일 것입니다.”
방통은 주유의 말에 공감했다.
“진동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전풍이 이번에 승상 겸 세자사가 되었다더군요. 병주자사 고간이 전풍의 손에 전권이 쏠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유가 다시 받았다.
“원소가 유사시를 위해 고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삼보에 장합, 곽원, 저수를 배치해놨습니다. 나쁘지 않지만 이 조치는 필연적으로 중앙에서 원상의 발언권을 크게 억제할 것입니다.”
유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풍이 열 일 하는 수밖에 없지. 허면 견제는 더 심해질 터.”
“천천히 타오르는 불씨에 기름을 확 부어버려야 옳습니다.”
방통의 말에 유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원담을 하내로 송환시킨다……”
원소는 들이마신 공기가 폐부에 까지 이르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여생을 셈했다. 그는 쌕쌕 얕은 숨을 쉬며 가신들을 불러 모았다. 그것이 마지막 소집인 것을 안 가신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은왕부에 모였다. 승상 전풍은 소매를 가지런히 모으고 어두운 표정으로 원소의 곁을 지켰다. 병주자사 고간은 봉기와 곽도를 거느리고 등청했다. 그 모습을 전풍은 불길하게 바라봤다. 안량, 고람, 종요, 전예 등 몇몇 가신들을 제하고서는 그야말로 벼슬아치들이었다. 심모원려나 제후들끼리의 복잡한 아귀다툼은 모르고 오로지 이번 달 나올 봉급과 그것을 먹을 집안의 아기 새 같은 처자식을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결국 원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승상 전풍과 병주자사 고간의 대면이었다. 원소는 혼곤한 눈으로 전풍과 고간을 바라봤다.
“그대들은 우리 은의 문무를 책임지는 동량이다. 동량은 지붕을 받들 뿐이지 서로 다투지 않는다. 명민한 그대들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전풍과 고간은 동시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모쪼록 편하게 눈을 감게 해다오. 과인은 지금 너무나도 불안하다……”
전풍은 원소의 손을 꼭 잡았다.
“염려 마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전하. 신이 충정을 다하여 사왕(嗣王, 선왕의 뒤를 이은 왕)을 보필하겠나이다……”
원소는 간절한 눈빛으로 고간에게도 손을 뻗었다. 원소의 손목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고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원재(元才, 고간의 字)……”
고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최선을 다하지요.”
고간은 끝내 외사촌의 손을 잡지 않았다.
“아아……”
원소의 동공이 운동을 멈췄다.
“인생을 살았다……”
원소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불처럼 살았다……”
끝내 고간의 손을 붙잡지 못한 원소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빠르게 식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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