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46
0250 / 0284 ———————————————-
23.
“모든 책략은 굳은 것과 흐르는 것을 정하면서 시작된다.”
“굳은 것과 흐르는 것.”
량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개의 패착은 그것을 제대로 정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은왕부는 현재 전풍의 삼보파와 고간의 병주파로 양분되어 있지. 둘의 세력은 비등하다. 삼보파에서 전풍, 저수, 종요, 안량은 굳고 굳은 것이고 병주파에서는 고간, 장연, 두기, 하소가 굳고 굳은 것이다.”
육의는 량이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사형의 말씀은 그들은 각 자파에 명운을 걸었으니 절대 이탈할 확률이 없는 상수란 말씀이죠.”
“그렇지.”
나는 두 젊은 책략가의 대담이 보기 좋아서 미소를 띤 채로 아무 말로도 참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무수한 관료들, 장교들, 사졸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들 죄다 무르고 물러서 흐르고 흐르는 것들이다. 그들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뜨거우면 찬 곳으로 차가우면 더운 곳으로 흐르지. 전풍은 그들을 병주에서 삼보로 흐르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흐르는 것을……”
“전풍이 고간을 궤계로써 무찌르면 고간의 흐르는 것들은 굳어져버려. 병주는 삼보에 반기를 들고 은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제 겨우 폐허를 벗어나는 정도인 삼보로서는 병주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전풍은 고간을 이기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먹잇감으로서의 운명뿐……”
육의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전풍은 원상을 떳떳한 군주로 만들어 병주의 흐르는 것들을 삼보로 끌어 모아 병주의 굳은 것들만 남았을 때, 최후의 순간에 그들을 치려는 생각입니까.”
량이는 주전부리를 다 해치우고 차로 입가심을 했다.
“그것이 선비의 심모원려이다.”
그는 수 천 리 밖에 있는 전풍과 마주한 듯 씩 웃었다.
“선비는 생각이 깊지만 더러운 것을 꺼리고 고상한 것을 좋아한다. 허나 내내 그럴 수 있을지…… 선비의 기질이 그대를 일으킬지 아니면 고꾸라뜨릴지.”
나는 량이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비단 전풍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선비의 결벽증으로 난세를 끝까지 누릴 수 있을 텐가.
원희의 유약한 마음은 중압감을 맨 정신으로는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저를 따르는 초촉, 장남, 한형을 이끌고 주사청루를 찾아 노련한 창기의 푸진 젖가슴과 매캐한 독주에 의지하여 시름을 잊는 것이었다. 원희의 몇 안 되는 당여(黨與)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초촉과 장남을 위시한 무부들은 고간에게 붙는 것이 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고고한 전풍의 선비적 기질에 본능적으로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전풍과 동류인 한형은 응당 선왕의 후계자인 원상을 의심 없는 충성으로써 섬겨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어떠한 대의명분도 원희의 고민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원희가 바라는 것은, 확실히 제 목숨과 부귀를 보존할 계책이었다. 그것이 아니고서, 핏줄이며 군신의 의리이며 백성의 환란이며 그런 것들은 순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그러나 초촉과 장남은 그 생존의 지혜를 일깨워주기에는 모자란 머리였고, 한형은 젊은이의 첫 연애처럼 대의명분과 이상론만을 부르짖었다. 결국 원희가 찾아 의존하는 것은 오로지 풍만한 젖무덤일 뿐이었다. 아아, 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어 무덤에 묻히리라. 그냥 무덤도 아니고 내 온몸을 묻을 정도로 큰 젖무덤에 의지하리라. 그러면 내 살지 않고 죽어줄 수 있겠다. 원희는 점차로 취해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초촉, 장남은 주인과 함께 한껏 풀어져 불콰하게 취했고, 한형은 본디 취할 마음은 없었지만 장단을 맞춰주다 보니 허약한 기질에 취해버려 고개가 꺾이고 돌아갔다. 자정쯤 되어 원희는 마차에 실려 귀갓길에 올랐다. 초촉, 장남, 한형들도 원희를 따라 주사청루를 나섰다. 술과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면서 귀가하던 원희의 앞을 한 떼의 무리가 가로막았다. 그들은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밝은 달빛이 그들의 칼날에 반사되었다. 서늘한 빛이 원희의 감은 눈에 어른거리니, 원희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누, 누구냐……”
본디 칼을 든 괴한은 대답을 잘 해주지 않는 법이었다. 괴한들은 술 취한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다만 선비 한형의 목숨만을 빼앗았고, 초촉과 장남은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원희의 목숨도 온전했다. 한형만이 술이 섞인 피를 토하고 주검으로 식어갔다. 술에 절 대로 전 원희의 두뇌는 뻑뻑하게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한형의 죽음에도 원희는 잠을 이기지 못해 다시 잠에 빠졌고, 놀란 노복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한형의 주검을 수습하여 하내공부의 마당에 놓고 거적으로 덮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원희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마당으로 가 벌써 부패하기 시작한 한형의 시취를 맡고나서야 비몽사몽간의 참극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거적을 들춰 한형의 얼굴을 확인하고 원희는 어린 애처럼 울었다.
원희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짜내고 있을 때, 한 떼의 병력이 하내공부를 둘러쌌다. 장군 초촉이 병력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누구냐!”
우두머리는 초촉에게 깍듯하게 읍했다.
“소장은 기도위(騎都尉) 전예라고 합니다. 광록대부의 명을 받들어 하내공부를 지키고자 합니다!”
초촉은 이름을 듣고 보니 아는 얼굴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광록대부 종요의 식객 출신이라, 허면 전풍의 사람이로군. 초촉은 누구한테 붙든 크게 관계는 없었으나 같은 값이라면 전풍보다는 고간을 따르는 축이었다. 그렇기에 전풍의 사람인 전예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광록대부는 어찌하여 병력으로써 하내공부를 지키라 하였는가?”
“밤중에 괴한들이 하내공을 습격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 한형을 참살하지 않았습니까.”
초촉은 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승상께서는 이 일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하내공부의 안위를 우려하여 소장으로 하여금 하내공부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초촉은 뒷짐을 지고 전예에게 물었다.
“놈들은 마음만 먹으면 우리를 몰살시킬 수 있었다. 헌데 자패(子佩, 한형의 字)만 해쳤단 말이지.”
“바로 그 점을 승상께서 의심하십니다.”
자패는 승상을 지지하고 나와 장남은 대장군을 지지하는데…… 초촉의 두뇌는 지극히 단순했다.
“자패만 해쳤다는 것은, 즉 대장군의 소행이렷다……?”
초촉의 말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은왕부는 간밤의 일로 발칵 뒤집혔다. 감히 은왕의 형을 가로막고 그의 측근을 베었다? 한형과 깊이 교제했던 선비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철저하게 조사를 해야 합니다, 철저히! 은의 국도(國都) 한복판에서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 수 있는지요. 대대적인 인력을 투입하여 반드시 색출해내야 합니다!”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던 관리들도 철저한 조사에는 열렬히 호응했다. 승상 전풍은 이 호응에 몇 마디 말을 더 얹었다.
“초촉과 장남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한형만이 참혹히 죽었다는 점을 강하게 의심해야 하오.”
그 말을 들은 제신의 눈빛이 고간을 스쳤다. 불온한 기운을 감지한 고간이 불쾌하게 말했다.
“그것은 하내공을 습격한 배후에 내가 있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소이까?”
전풍은 어깨를 으쓱였다.
“꼭 그런 뜻은 아니오.”
은왕 원상은 슬며시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색출은 사례교위(司隷校尉) 최염에게 맡기겠다.”
최염은 당당한 풍채로 나서 원상의 앞에 절을 올렸다.
“존명!”
하내는 병주와 가까웠으나 엄밀히 말하면 낙양, 장안 등 삼보에 포함되는 사례교위부의 관할 하에 있었다. 사례교위는 수도의 경비와 감찰을 총괄하는 벼슬로서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았다. 감찰권과 수도경비의 권한을 거머쥔 사례교위는, 정권을 거머쥔 승상과 군권을 거머쥔 대장군에 버금가는 지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막대한 권한을 지닌 감투를 삼보와 병주가 서로 다투고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이 자리는 선왕의 중신이자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던 중립적인 최염에게 돌아갔다. 최염은 꼿꼿한 품성으로 전풍과도 깊이 교류하지 않았기에, 고간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최염은 공평무사하게 범인을 색출해내려 할 것이었고, 고간은 괴한의 배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고간은 결백했다.
광록대부 종요는 승상부를 내방하여 전풍을 접견했다. 그는 전풍에게 물었다. 전풍은 뒷짐을 쥔 채로 승상부의 저 너머를 바라바고 있었다.
“사례교위 최염은 강직한 선비입니다. 승상의 뜻대로 움직여 대장군에게 족쇄를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
전풍은 종요를 등졌던 몸을 종요 쪽으로 돌리며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그럴까?”
그는 종요의 앞에 마주앉았다.
“최염은 그야말로 강직하네. 나하고도 깊은 인연이 없지. 고간을 크게 증오하지도 않네. 그는 정말이지 선비일세.”
전풍은 한번 쉬고 다시 말했다.
“그의 선비다움이 나를 도울 걸세.”
사례교위 최염은 그리 오래지 않아 하내공 원희를 습격했던 무리를 추적했다. 괴한들을 토포하지는 못하였으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급히 서쪽으로 달아났다는 어떤 이의 진술과, 괴한들 중 하나가 엉겁결에 떨어뜨리고 놓고 간 도검을 수습할 수 있었다. 원희가 습격당한 지점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것은 사병들이 지키고 있는 고간의 대장군부가 있었고, 도검의 칼자루를 대조해본 결과 대장군부의 사병들이 쓰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최염은 축적되는 증거를 토대로 어떠한 정치적 해석 없이 수사를 진행해나갔다. 초촉과 장남은 살고 한형만 죽었다는 것 또한 최염의 수사에 있어 중요한 정황으로 채택되었다. 최염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최초의 경과를 은왕부에 보고했다. 그것으로 은왕부 제신의 여론이 들끓었다. 눈치가 빠른 자들은 슬슬 병주파에서 이탈하여 중립지대로 향하거나 삼보로 갈아탔다.
“최염이 전풍에 가담한 것이냐? 어디서 되도 않는 공작이란 말이냐……”
고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끓는 분노가 더욱 깊어져 침착한 분노가 되었다. 곽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우리 쪽의 소행으로 몰아가려는 것 같습니다.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최염을 논핵(論劾)해야 합니다.”
봉기는 고개를 저었다.
“대대적으로 논핵하는 것은 오히려 믿음이 약한 자들의 이탈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우선은 두고보시지요.”
고간은 짜증이 잔뜩 번진 표정으로 분을 삭였다.
최염이 은왕 원상에게 상주하기를, 대장군부를 수색하는 것이 옳겠다고 했다. 마음으로는 이미 고간을 하내공 습격과 간의대부 한형 암살의 배후로 지목한 것이었다. 고간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이미 최염이 전풍에게 붙었다는 결론을 내린 터였으며, 이번 암살과는 관련이 없지만 권력을 좀먹고자 하는 부류들이 건넨 뇌물 따위가 대장군부의 곳간에 가득 들어차있기 때문이었다. 최염에게 대장군부의 수색을 허락한다면 암살의 건과 맞물려 대장군부의 회뢰(賄賂) 의혹까지 드러나 병주파의 이탈이 걷잡을 수 없게 될 터였다. 전풍은 불을 지폈다.
“원한다면 승상부도 수색하시오. 대장군께서는 어찌하여 수색을 거부하시는 거요?”
“암살의 배후를 캐는 일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오.”
전풍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렇소이까?”
고간의 처사를 더욱 의뭉스럽게 여긴 최염은 고간을 주범으로 여기고 그를 논핵하는 상소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전풍은 승상부의 정원을 거닐었다. 때는 여름이라 연꽃이 만발했다. 검은 연못 아래로 길게 뿌리를 내리고 물 밖에서는 고상한 색을 발하는 연꽃을 전풍은 좋아했다. 물 밑에서는 큼지막한 잉어들이 암약(暗躍)했다.
“누가 나더러 선비라고 하던데……”
전풍은 잉어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며 중얼거렸다. 광록대부 종요는 손을 포갠 채로 그의 뒤에 점잖게 서있었다.
“그것은 저 고고한 꽃잎만을 보고 그리 말하는 것이다.”
잉어들은 먹이를 취하기 위해 수면에 입술을 갖다 대고 뻐끔거렸다.
“나를 선비라고 들먹이는 자들은 꽃잎만 보고 그리하는 것이다. 나는 밖에서는 선비이되 속으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먹을 것을 다 취한 잉어들은 다시 깜깜한 물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결벽증에 걸린 일개 선비와는 다르다. 이따금 피를 묻히고 이따금 똥도 움켜쥔다. 그것이 사직을 따르고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면, 구더기 끓는 똥물에도 구를 수 있다.”
전풍은 종요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것이 바로 껍데기만 고상한 선비, 사대부가 아니라……”
종요는 포갠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선비 중의 선비, 국사(國士)의 기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