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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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상산 조자룡
조자룡의 맑은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옳지, 물었구나.
“평원상(유비의 당시 관직)을 아는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합니다. 일전에 만날 기회가 있었죠.”
그는 슬그머니 창을 내려놓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대는 평원상을 은밀히 만났다 했다. 어째서 은밀히 만났는가!”
“유현덕에게는 흉중에 크나큰 포부를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릇이 숙성하기 전에는 결코 그 뜻을 천하에 펼칠 수 없기에 그를 은밀히 만난 것입니다!”
“그대의 말이 거짓이 아니로다!”
조자룡은 즉시 말에서 내려 나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과연 그대는 평원상과 뜻을 통하였군.”
나에게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유비와 만났냐고 물어볼 법 했다. 그러나 조자룡은 그것을 묻지 않았다. 왜? 그만큼 그에게 유비는 태양 같은 존재였으니까. 능력은 출중하나 의탁할 만한 그릇의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공손찬의 객장으로 빌붙어 있는데 공손찬은 그를 알아주기는커녕 찬밥대우.
그 와중에 조자룡은 유비를 만났다. 그를 만나서 유비의 백성을 향한 자애와 한실 부흥의 사명을 보았다. 물론 그 자애와 사명이란 것이 야망의 민낯이 쓴 가면일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어쨌건 마침내 봉황은 앉을 만한 거목을 만났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 유비만 중한 것이고 자질구레한 탐문수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극히 소수만 엿보았을 그의 포부를 내가 너무나도 당당히 말하고 있다. 이미 유비의 미래를 훤히 꿰뚫고 있는 나는 아는 대로 두서없이 지껄였는데, 그것은 조자룡이 유비에 대해 아는 것보다 당연히 깊고도 넓었다.
“유현덕은 서주로 가서 웅크렸던 활개를 펼 것입니다. 나는 그때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평원상과 의기투합한 것인가!”
“나는 비록 유현덕을 존중하지만 그의 막하에서 종사할지는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종사를 권했지만.”
“평원상은 사람을 쉽게 사귀지만 쉽게 가까이 두지는 않네. 평원상께서 먼저 그대에게 종사를 권하고 품은 뜻을 밝혔다면 그대는 평원상의 인망을 얻은 것이다.”
나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유현덕이 훌륭한 군주의 그릇인 것은 자명합니다.”
“평원상이 인정했다니, 그대도 영걸의 기상이 있다는 뜻이렷다.”
그는 내게로 다가와 내 손을 맞잡았다.
“그렇다면 편협하고 옹졸한 공손백규보다는 차라리 그대가 나의 친우다.”
“평소 장군을 흠모하였는데 장군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계속 말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장군으로 불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나와 조자룡 사이에 훈훈한 온기가 번지는데, 대뜸 영자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의 얼굴은 뾰로통했다.
“무슨 말을 나누는지 당최 짐작할 길이 없지만, 찬, 적대하는 사내를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고.”
뭐야, 지금 질투하는 거야? 왜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거야, 망할 자식.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영자, 이따가 따로 얘기하자.”
“자룡, 나와 칼 아래 정을 두자!”
영자가 장도를 휘두르며 마구 날뛰려는 것을 노구가 날래게 나서서 제압했다. 영자는 씩씩거리며 노구의 손에 억지로 끌려갔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조자룡과 남은 말을 맺었다.
“나는 장군이 공손백규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공손백규를 버리고 차라리 우리와 의기투합하시지요. 후에 유현덕과 뵙게 해드리겠습니다.”
조자룡은 시원시원하게 받아들였다. 유현덕 세 글자의 힘이 이렇게 크다니.
“좋다. 임치의 사천 병력 중 오로지 일천만이 내 직속이고 나머지는 청주자사 대리이자 전해의 아우인 전양(田羊)이 다스리고 있다. 허나 전양은 군재가 없어 내가 사천의 병마를 모두 이끌고 있으니 그를 주살하고 임치를 그대의 손에 넘기겠다.”
횡재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해보려고 유비를 운운했던 내가 죄책감이 들 정도로 조자룡은 파격을 선보였다. 이러다가 나중에 거짓으로 들통 나면 나를 죽이려고 들 텐데…… 모르겠다.
일단 땅에 떨어진 돈은 줍고 보자. 조자룡은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휘하를 다그쳐 방금 전까지 자신들의 본거지였던 임치를 공격했다. 이미 전군을 쏟아 요격하게 했던 전양이 단기필마의 주제로 조자룡의 군세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불쌍한 전양은 그대로 목이 잘려 군문에 효수되었고 임치는 그렇게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조자룡을 앞세워 무혈입성하려는 우리를 보고 공융의 심복인 왕자법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 아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나는 여유롭게 웃었다.
“살다 보니 이렇게도 되는군요.”
왕자법과 유공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른 체 해주었다. 슬그머니 임치의 경내로 발을 들이려는 그들을 향해 나는 엄정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덕분에 임치를 수월하게 공략했습니다. 답례로 술과 고기를 보내드릴 터이니 북해로 돌아가 공북해와 즐기시지요.”
“……”
왕자법과 유공자, 그리고 유헌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임치의 성문을 닫아버렸다. 깨소금 맛이다, 이것들아! 나는 성벽 위에 올라가 무기력하게 철군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빙글빙글 웃었다. 암노가 내 옆에 서서 우려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꼭 박대할 필요가 있었을까.”
“응?”
“저들이 돌아가 공북해에게 우리의 허물을 잡으면 그리 좋을 것만 같지는 않아서.”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단독으로는 전해도 없는 임치를 넘보지도 못하는 쪼다들이 허물을 잡으면 어때서? 잡아보라지! 하나도 안 무서워.”
나는 그렇게 암노의 우려를 일축하고 슬그머니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영자는 내 옆에 찰떡처럼 붙어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보이지를 않는다. 평소에는 그런 그가 귀찮았는데 막상 보이지 않으니 심심했다. 설마 내가 조자룡에게 알랑방귀를 좀 뀌었기로서니 삐진 건가.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렇다고 나는 그 녀석의 마음을 풀어주자고 다가가 아양을 떨 정도의 붙임성은 없다. 어둠이 내리자 나는 임치의 관부를 나와 시가지를 천천히 산책했다. 임치는 전국시대 전국칠웅의 하나였던 제나라의 도읍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청주자사부가 있는 대도시. 과연 명성에 걸맞게 대로는 널찍하고 성벽은 높았다.
그러나 그곳을 사는 남녀노소의 얼굴에는 어두웠고 이따금 부패한 시체들이 골목의 응달에서 뼈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와지붕에는 틈을 비집고 잡초가 자랐고 들개들은 해갈하지 못해 메마른 혀를 죽 내밀었다. 전국제후 누구도 평정하지 못한 채 황건의 약탈만을 기다리는 청주는 그토록 슬펐다.
힘이 없는 장정을 밭을 일구지 못했고 작물과 잡초가 함께 땅의 양분을 빨아먹어 청주의 흙은 기름기 없이 푸석했다. 제나라는 태공망의 봉국이라고 하는데, 땅을 뒤덮었던 태공망의 지략도 청주의 메마른 땅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공손찬은 이 땅을 수 년 간 다스리면서도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구나. 오로지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수탈하는 창고로 삼았구나. 다른 곳이라고 다르랴. 이것이 난세의 상식이고 전국제후의 왕도이다. 야위어 광대뼈가 두드러진 코흘리개가 내 다리에 매달려 먹을 것을 달라고 칭얼거렸다.
“배가 고프니.”
코흘리개는 대답할 힘이 없어 무기력한 눈망울만 빛냈다. 나는 병졸 하나를 시켜 마른 주먹밥을 먹여주었다. 코흘리개는 코로 밥알을 토하며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밥의 냄새를 맡은 백성들이 몰려와 나에게 밥을 외쳤다. 밥을 주시오, 밥을 주시오, 밥을 주시오…… 간절한 손을 내밀어 내 다리를 붙들고 팔을 붙들고 얼굴을 쓸었다.
밥 한 공기를 먹지 못해 짐승이 되어가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밥 대신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 나무껍질의 냄새와 비슷한 이들의 진한 체취에 질식하여 나는 한참 울었다. 밥을 갈구하는 이들의 욕망 앞에 중화통일의 패업과 한 황실 부흥의 구호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가? 얼마나 천박한가?
나는 밤중에 군량고를 향했다. 병사들을 닦달하여 쌀을 찌게 했다. 아닌 밤중에 밥 짓는 고소한 냄새가 임치 전역에 퍼졌다. 굶주린 자들이 몰려들었고, 나는 엄정한 통제 하에 그들에게 꿍친 밥덩이와 물 한 바가지를 나누어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조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밥을 먹도록 명령했다. 통제의 밖을 벗어나면 약자는 빼앗기고 강자는 빼앗는 법이니까.
그 와중에 어미는 밥덩이를 떼어 새 새끼 같은 아이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밥솥 옆에 쪼그려 앉아 그 처절한 광경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다 더 보지 못하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대는 성품이 유약하군.”
조자룡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자룡아, 너의 절륜한 무용도 이들의 배를 부르게 할 수 없다. 하기야 내 눈물도 마찬가지구나. 나는 그를 흘끔 돌아보고 한숨을 토했다.
“유약하다고 해도 별 수 없네요. 슬픈 건 슬픈 거니까요.”
“…평원상과 비슷한 말을 하는군.”
“유현덕도 그렇게 말했습니까?”
“난세에 별난 생각이라고 여겼지.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야말로 난세를 타개할 생각이다.”
나는 슬프게 웃었다.
“아뇨, 생각은 난세를 타개할 수 없어요.”
바닥의 모래를 쥐었다가 손을 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갔다.
“오로지 실력만이 이 개 같은 세상을 뒤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