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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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고간의 왕성하던 세력이 시시각각으로 쪼그라지고 있다는 소식이 담성으로 전달되었다. 원담이 날아가고 고간마저 기우뚱거리자 유비의 마음이 급해졌다. 고간의 목이 달아나는 순간 전풍을 주축으로 한 은왕부는 급속도로 안정을 되찾을 터였다. 흔들 수 있을 때 흔들어야만 했다.
“웃는 표정의 탈을 벗을 때가 되었다.”
유비는 방통을 바라봤다.
“은의 내분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방통이 물었다.
“개입의 명분은……”
유비는 힘주어 말했다.
“고간으로 하여금 먼저 거병하게 하고, 하내에 난리가 일어나면 동맹국의 안정을 명분으로 하여 개입하겠소.”
미축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고간이 우리를 신용하여 먼저 거병하겠습니까?”
방통은 얌전하게 웃었다.
“이미 고간에게 남은 패는 거병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등을 살짝 밀어주기만 해도 그는 일어설 것입니다.”
방통은 유비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설득하여 신뢰를 심어줄 필요는 있겠지요. 소인이 밀사로서 고간의 대장군부를 찾아가겠습니다.”
유비는 볼을 긁었다.
“위험할 텐데.”
“이런 난세에 위험하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매개를 거치지 않고 고간과 직접 협상해야만 그를 확실하게 설득하고 결단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방통이 적임이기는 하나 전풍에 의해 발각된다면 담의 두뇌를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다. 유비는 잠시 주저하다가 방통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보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몸 조심히.”
“저도 다녀오면 황금 백 냥 주시는 겁니까?”
유비는 씩 웃으며 방통의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오백 냥을 내리지.”
“꼭 살아 돌아와야겠군요.”
유비는 방통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는 담성 밖 삼십 리까지 배웅을 나가겠다고 하였으나, 적의 세작이 반드시 눈치 챌 것이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방통은 종자 하나와 함께 젓갈장수로 위장하고 노새에 올라탄 채로 하내를 향했다.
방통은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친 채로 하내까지 갔다. 비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시원한 후에는 꿉꿉한 습기가 답답하게 숨통을 조여 왔다. 노새가 혀를 길게 물고 이따금 허청이는지라 방통은 노새를 쉬게 하고 밥을 지어 젓갈을 올려 먹었다. 그가 대동한 종자는 실은 관우의 장자인 관평으로, 아비를 닮아 창칼을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관평은 자청하여 방통의 하내 행에 동참하였다. 혈혈단신으로 찾아가는 것이 적의 눈을 속이는 데 이롭다 하나, 유사시에 칼도 못 쓰고 몸도 둔한 편인 방통 혼자서는 손도 못 써보고 절명할 터이니 종자로 위장하여 무부를 동행시키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유비도 그리하도록 했다. 새우알젓을 뜨끈하게 김이 오르는 밥에 올려 먹으며 방통은 속으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했다. 관평은 그의 궁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젓가락질을 얌전히 했다.
은의 환란에 군침을 흘리던 마등은 점점 인내심이 동해가고 있었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내에서의 삼보·병주 양 세력의 충돌. 잔뜩 몸이 달아버린 전풍이 삼보의 장합, 곽원, 저수를 하내로 소환하여 고간과 일대 결전을 벌이길 바랐다. 무주공산이 된 장안을 단숨에 꿀꺽 먹어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마등의 뜻대로 풀어지지 않았다. 장합은 장안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안이 아니라 밖을 향해 날카로운 눈초리를 벼렸다.
장안을 뒷받침하는 홍농의 곽원 역시 침착하게 제자리를 지켰고, 낙양의 저수 역시 원담을 낙양공부에 가둔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삼보의 굳건한 태세에 중뿔이 난 것은 비단 마등뿐만이 아니었다. 송경의 천자 유총은 와신상담하며 권토중래의 날을 기다렸는데, 장안에서 장합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슬슬 짜증이 동하는 터였다.
“뭐냐, 전풍은 삼보의 병력을 불러들이지 않고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이냐? 아니면 고간이랑 대타협이라도 성사시켰냐?”
상서령 낙준은 팔짱을 낀 채 목소리를 깔았다.
“승냥이에게 삼보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이지요.”
유총은 짜증난 눈빛으로 낙준을 째려봤다.
“경은 지금 짐이 승냥이란 것이냐?”
강고한 눈빛에 낙준도 움찔했다.
“그저 단순한 비유일 뿐……”
“어디 건방지게……”
유총은 트집을 잡았다.
“천자 앞에서 팔짱이라니, 안 풀어?”
낙준은 헛기침을 하며 체면을 지키면서도 슬그머니 팔짱을 풀어 공손하게 모았다. 유총은 짜증을 감당하지 못해 두통마저 느꼈다. 대사마 관녕이 이끄는 병력이 장안에서 대패를 겪은 후, 관녕은 스스로 대사마 자리에서 물러났다. 천자 역시 그를 대사마에서 경질하기로 하고, 어사대부 왕랑과 자리를 교환하도록 했다. 어사대부 역시 삼공의 일원으로 중책이기는 하였으나 이런 난세에 전군을 지휘하는 대사마의 권력과는 퍽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왕랑은 제 주제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관녕보다 군재가 부족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번 인사는 왕랑을 중용하겠다는 의지보다는 관녕을 질책하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에 왕랑은 탕구장군 여대를 좌장군에 천거하고, 여대의 좌장군부가 군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자신은 좌장군부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 정도로 그쳤다. 여대는 일찍이 천자에게 중용되어 오래 군부에 사관했고, 안팎의 여망이 두터웠으므로 적절한 지명이라는 것이 대체의 평가였다. 여대는 이엄과 서서를 중심으로 군무를 살폈다. 여대에게 군무에 대한 권한을 이양한 왕랑의 선택과, 이엄과 서서를 크게 발탁한 여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으나 전임 대사마 관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관녕 본인 역시 패군지장이기는 하였으나 이엄과 서서 역시 엄연히 패전의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이엄은 일전에 관녕에게 대립각을 세웠던 관계에 있었으니, 관녕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는 발언권이 크게 줄어든 터였으므로 시린 잇몸을 혓바닥으로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천자의 영역은 동쪽, 서쪽, 남쪽은 합비공 제갈찬의 영지에 둘러싸여있는 탓으로 천자가 나아갈 방향은 오로지 서북쪽의 장안, 혹은 동북쪽의 낙양이었다. 그들이 말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장안과 낙양의 병마가 스스로 허약해지는 수뿐이었으므로, 그들은 이 판국의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방통은 뚜벅뚜벅 하내까지 걸어갔다. 하내의 삼엄한 검문이 일개 젓갈장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방통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선비는 꼼꼼한 문지기들의 검문을 거쳐야 했다. 관평의 칼은 하내에 입성할 때까지 뽑히지 않았다. 방통은 젓갈을 짊어진 노새의 엉덩이를 장단을 맞춰 토닥거리며 외쳤다.
“젓갈 사려― 댁들아 동난지이 사시오. 동난지이들 사시구려―”
방통이 우렁차게 외치고 관평이 따라서 외치자 금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유비의 밀사로서 고간을 만나러 온 방통으로서는 이러한 호객행위가 적절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었다. 통상적인 눈초리를 생각한다면 그랬다. 그러나 전풍은, 전풍은 달랐다. 아마 전풍의 눈을 자처하는 자들이 하내의 곳곳에 숨어 대장군부를 주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떤 꿍꿍이를 속으로 품는지, 어떤 수상한 자가 대장군부를 드나드는지 시시각각으로 관찰하고 전풍에게 보고할 터였다. 그러므로 방통이 스스로 나서 대장군부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난지이 사오!”
방통이 외치자 꾀죄죄한 차림의 사내가 물었다.
“동난지이가 뭐요? 구경이나 해봅시다.”
“겉은 뼈요, 안은 살이요, 두 눈은 하늘로, 전행(前行) 후행(後行)하며 작은 다리 팔족(八足), 큰 다리 이족(二足), 청장(淸醬) 맛이 아스슥한 동난지이 말이오.”
방통이 자질구레하게 늘어놓자 사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잇, 썅, 그냥 게젓이라고 하면 될 것이지!”
방통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무식한 소리 하기는! 그것은 그대 같은 상놈들에게나 하는 말이고!”
방통의 도발에 사내가 벌컥 성질을 부렸다.
“뭐야!”
“그대 같은 무일푼이 어디 엄두나 내볼 게젓인 줄 알아? 돈푼 좀 쥔 높으신 분네들이나 사서 드시지. 이렇듯 고상하게 읊어줘야 그런 분들이 관심을 가지신단 말이야!”
사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장 노새의 등에 얹어진 젓갈 담은 통을 엎어버릴 기세였다. 그때 그 사내를 밀치고 또 다른 사내가 방통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게젓이 맛이 좋은가?”
그는 일전의 사내보다 풍채도 좋고 입성도 화려했다. 방통은 눈을 한 번 빛내고 몸을 굽신거렸다.
“그럼은요, 그럼은요.”
“토하알젓이 있는가?”
토하알젓은 민물새우 중에서도 상품에 속하는 토하가 품은 알을 하나하나 골라내어 젓갈로 담근 것이었다. 방통은 냉큼 대답했다.
“그럼은요!”
“시식을 한 번 해봄세.”
사내는 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썩 괜찮군.”
방통은 헛기침을 하며 그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헌데 소인이 존함을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토하알젓은 값이 많이 나가는지라 웬만한 관원들도 감당하기 힘들어서……”
되바라진 도발에도 사내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장돌뱅이가 재미만 보았으면 됐지, 이름은 알아 무얼 한다더냐. 나는 상서 두기, 조정의 일각을 이루고 있는 중신이다. 새우 알 정도는 무리 없이 살 수 있다.”
상서 두기. 고간의 몇 안 되는 선비, 그들 중 필두에 있는 자다. 방통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이 젓갈은 서주에서 왔습니다.”
명민한 두기가 그 말뜻을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두기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가 이내 평정을 찾았다. 방통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대장군께도 이 토하알젓의 맛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두기는 침을 삼켰다.
“…알았네.”
두기는 방통을 대장군부로 인도했다. 두기의 뒤를 계속 주시하던 전풍의 눈은 젓갈에 대한 응당한 관심과 구매의사, 그리고 성사된 거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거래란 젓갈에 국한되는 것이라 그들은 굳게 믿을 뿐이었다.
방통은 젓갈 냄새를 풍기며 대장군부의 안으로 들어갔다. 방통과 고간이 만나고 있을 때, 전풍 또한 누군가와 접촉하고 있었다. 전풍은 적의와 호의가 반씩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제갈찬마저 이 복잡한 판에 발을 들이겠다는 건가…… 반가우면서 반갑지 않군.”
전풍이 접견한 인물은 대장군부 장사 주환이었다. 그는 낙양을 경유하여 전풍의 관할에 있는 하내의 서문으로 들어왔다. 도성의 경비와 치안을 맡은 사례교위 최염은 종전의 중립을 버리고 슬슬 전풍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전풍이 마음에 흡족하다기보다는 고간에게는 더 이상 명운을 걸 까닭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선과 악, 의로움과 불의함으로 나뉘지 않는다. 악과 악, 불의와 불의가 대개의 경우이다. 조금 상황이 낫다면, 악과 비악(非惡) 정도랄까. 중립이란 불의와 불의, 악과 악의 대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악과 비악의 구분이 가능해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외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악이요 또 하나의 비겁이 되고 마는 터였다. 최염은 비겁으로 변모하는 중립을 탈피하여 비악 전풍의 편에 서는 것을 택했다.
그런 까닭으로 주환은 방통처럼 자질구레한 분장을 하지 않아도 당당히 전풍을 접견할 수 있었다.
“합비공께서는 승상을 돕고자 하십니다.”
전풍은 절반 정도 품었던 호의를 얼굴에서 싹 가시게 했다.
“지랄하지 마라.”
성질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게 냉소적인 주환도 전풍의 싸늘한 경고에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풍은 한 음절씩 분명히 발음했다.
“제갈찬은 은의 내전에 손을 떼라.”
“그러니까 합비공은 승상을 도우려……”
전풍의 얼굴에 짜증이 확 번졌다.
“다음은 혀가 아니라 칼로 말하겠다. 제갈찬은 하내에서 손을 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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