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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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은왕부에게는 한여름의 잠 못 드는 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답답한 날씨에 땀을 흘려 몸이 끈적끈적해진 터였다. 홑이불이 끈끈한 몸에 들러붙어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는 와중에 사방팔방에서 물것들이 달려들어 살갗에 침을 박고 혈액을 빨아먹는다. 그것도 예사 물것이 아니라 덩치가 사람만 한 물것이.
장안의 장합은 가까스로 전후복구를 어느 정도 완수해가는 상태였다. 모래를 다져 정성 들여 만들어놓은 두꺼비집을 짓궂게 허물어버리는 개구쟁이처럼, 마초는 삼만의 병력으로 겨우 다시 일어나려는 장안을 다시 주저앉혔다. 장합은 묵묵히 다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에 돌입했다. 낙양도 마찬가지였다. 반장이 이끄는 이만 병력이 누대의 고도를 에워쌌다. 홍농의 곽원은 장안을 도울지 낙양을 도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병력을 둘로 쪼개 동서로 파견했다.
물것의 물것이 되려는 이들도 있었다. 업도의 조조는 몸을 웅크린 채로 고간이 전풍에 발목을 잡히기만을 기다렸다. 역도 토벌의 위명을 완수하지 못한 상당공 고간을 꾸짖고 그를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조왕 조조의 병주 침공을 합리화하는 천자의 조서가 이미 마련된 상태였다. 조조는 정욱과 마주했다. 그의 주요한 상담역은 지금껏 곽가가 맡아왔으나 그는 병상에 누워있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자리보전이 웬 말이냔 말이야. 조조는 툴툴거렸지만 속으로는 무참한 심정이었다. 팔략의 일원으로 번뜩이는 기략을 아끼는 까닭도 까닭이지만 아끼는 벗의 투병이 안타까운 탓이 훨씬 더했다. 정욱도 그런 주군의 심정을 모르지 않기에 더욱 목소리를 가다듬고 곽가에 가까운 책략을 짜내려 애썼다.
“고간이 이길까, 전풍이 이길까.”
조조의 물음에 정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풍이 이깁니다.”
“고간에게는 오만 병마가 있고 전풍에게는 고작해야 그 절반인데.”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고간은 도리어 분에 넘치는 병마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풍의 도(道)는 그것들을 하나로써 능히 꿰뚫습니다.(一以貫之)”
조조도 정욱의 분석에 동의했다.
“옳다. 전풍이 이긴다. 허면 우리는 고간이 절멸한 연후에 병주로 들어가야 옳은가.”
정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책략은 항상 설익게 보일 때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적에게 들키지 않습니다.”
조조는 흡족하게 웃었다.
“그렇다.”
조조는 장군 우금에게 명령했다.
“고간이 하내에 진입한 순간 결행한다.”
우금이 의문을 표했다.
“고간이 절멸하기 전에 동병한다면 역적 토벌에 실패한 죄를 천자의 이름으로 묻기 어렵습니다.”
조조는 째진 눈으로 우금을 한참 바라봤다. 우금은 혹 저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 민망하게 웃었다. 조조는 여유 있게 차를 홀짝이고 우금의 말에 대답했다.
“명분은 명분일 뿐이다. 실리가 명분에 잡아먹힐 수는 없다. 언제든 출병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우금은 잔뜩 기합을 넣었다.
“존명!”
“목소리가 우렁차군. 좋아.”
조조는 정욱에게 명령했다.
“오환이 시끄럽지 못하게 꿀을 먹여 벙어리가 되도록 하라.”
재물을 한껏 내주어 뒤탈이 없도록 하라는 분부였다. 정욱은 명을 받잡고 여러 달구지에 실은 재물을 오환으로 보냈다.
물것의 물것의 물것이 되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오환의 답돈이었다. 그는 조조의 여망과는 달리 움직였다. 사신의 자격으로 업도를 오가는 답돈의 측근들은 조조의 병마를 염탐하여 세밀한 사항을 답돈의 귀에 들려주었다. 답돈은 사람 먹일 것을 줄여 말에게 먹여가면서 기호지세로 남하할 꿈을 꿨다.
태원을 성공적으로 장악한 안량은 즉시 유주의 답돈에게 사자를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문필에는 일가견이 있는 채용을 부추겨 쓰게 한 서신은 답돈에게 달콤한 문자들로 가득 차있었다.
위대한 오환의 대왕께 고합니다, 로 시작하는 안량의 서신은 병주는 땅이 좁고 척박하며 인심이 억세 다스리기 쉽지 않다며 잡아도 먹을 것이 없다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읍소했다. 그 다음에 말하기를, 유주와 접한 기주는 물산이 풍부하고 땅이 기름지며 연일 화풍난양(和風暖陽)의 나날이 이어지는 곳이니 오환의 날개를 떨쳐 펼치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하였다. 안량은 시답잖은 오랑캐에게 알랑방귀를 뀌는 것이 체질적으로 마땅치 않았지만, 이 또한 승상 전풍의 당부였으니 꾹 참고 곰 같은 덩지를 굽혀 아첨을 떨었다. 기주는 또한 민심이 양순하여 오환의 기상으로 윽박지르면 남녀노소 말을 듣지 않을 자가 없으니 때가 닿았을 때 들이쳐 빼앗아야 한다고 했다. 옛정을 운운하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간 원씨는 북방의 족속들과 친교를 맺고 항시 아름다운 말씨와 성의 있는 교역으로 상대하였으니 오환이 떨쳐 일어나 사귀기에 좋으며, 조씨는 속이 검고 음흉하여 반드시 병주를 얻으면 다음에는 유주를 얻고자 할 것이니 조씨와 사귀고 원씨를 물어뜯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않다고 했다. 이어 오환의 대왕께서는 영명한 식견과 묵특에 비견할 완력으로 오환을 다스리고 있으니 반드시 현명한 판단을 내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칭찬 겸 간청으로 글을 맺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답돈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 없었고, 구구절절 이치에 닿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지금껏 화인들로부터 천시 받던 신세가 일약 천하의 영웅쯤으로 뛰어오르니 오환의 사내들은 껄껄 웃으며 심히 기꺼워했다.
“자태(전주의 字), 어떠한가?”
답돈이 전주에게 물으니 전주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과연 안량의 말이 옳습니다. 기실 전풍의 말이겠지만.”
전주, 염유, 선우보 등은 유우의 멸망 후에 원소의 막하로 들어가 종사한 일이 있었다. 그것이 바람 따라 흐르다보니 어느새 오환의 휘하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원씨에 대한 기억은 그들에게 별로 나쁘지 않았다. 또한 원씨가 이민족을 후하게 대접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전풍 또한 그 지모가 무서운 인물이었지만 본래의 성품은 너그러우며 공명정대하니, 위기에서 그를 건져내면 반드시 훗날 크게 보답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제가 우뚝 서지 못하면 남을 핍박해 낮추는 인물이니 조조를 도와 병주를 섬멸해도 오환에게 이득 될 바가 적으며 후에는 반드시 대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으로 마주한 조조는 원씨보다도 훨씬 두려웠다.
“꼭, 꼭, 원씨에게 협력하십시오.”
답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선우보, 네가 답서를 써서 안량에게 돌려보내주도록 하라.”
선우보는 읍하며 명을 받들었다.
합비의 백각에는 한나라의 열세 개 주를 축소시켜놓은 천하전도(天下全圖)가 있었다. 평시에는 덩그러니 지도만 있는데, 어디선가 전쟁이 벌어졌다는 첩보가 입수되면 전장에 해당하는 지역 위에 동원된 병력을 감안한 크기의 말이 올라간다. 들리는 소문에는 그 말들을 가지고 올렸다가 내렸다가 아웅다웅 치고 박으며 가지고 노는 것이 백각교위 가후의 유일한 취미라 하기도 했다. 내 두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단언할 수는 없지만, 취미 한번 독특하다. 어쨌든 한동안 깨끗하게 비워져있던 천하전도 위에 시시각각으로 말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은왕부를 중심으로 무수한 말들이 천하전도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보기만 해도 이마가 아파왔다.
“전풍이 대단한 인물이긴 대단한 인물이네. 역시 팔략이야.”
내가 지도의 가장자리에 손을 얹고 혀를 내두르자 가후가 곁눈질을 보내며 비아냥거렸다.
“지금 전풍을 띄워주는 척 하시면서 같은 팔략이시라고 자화자찬하시는 거죠?”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가후를 노려봤다.
“팔략에서는 진즉에 제명되었거든요? 그렇게 심사가 배배꼬여서야 원!”
내 응수에도 가후는 뻣뻣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배배꼬여야 남을 배배꼬는 책략을 떠올리는 법입니다.”
“말이나 못하면.”
유엽이 피식 웃었다.
“최신 월단평을 보니까 합비공, 주유가 빠지고 새로이 추가된 면면이 아주 화려하더이다.”
나는 유엽을 바라봤다.
“그래, 나를 밀치고 누가 새로운 팔략이 되었습니까?”
유엽은 입가를 더욱 넓게 벌렸다.
“백각교위와 좨주요.”
가후와 량이가? 기가 막혀라. 나는 가후를 더욱 세게 째려봤다.
“본인이 팔략이면서 왜 애먼 사람은 잡고 그러시오?”
“그냥 넘어가십시오. 어찌 그리도 배배꼬이셨습니까.”
부아가 치밀어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와중에 팔략으로 거론된 량이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얄미운 것들 같으니라고. 유엽은 덧붙여 말했다.
“기존의 방통, 법정, 전풍, 곽가, 그리고 백각교위와 좨주에 더하여 익주의 사마의, 송경의 상서령(낙준)이 새로이 포함되었습니다.”
사마의는 문자 그대로 나를 제대로 물 먹여서 올랐을 테지. 어째 새로 팔략이 된 놈들 치고 얄밉지 않은 놈이 없는 거지?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유엽에게 따지듯 물었다.
“혹시 팔략을 천하에서 재수 없는 순서대로 꼽은 겁니까?”
가후는 피 웃으며 나한테 다시 한 방을 먹였다.
“제법 일리 있는 해석이시군요. 합비공께서도 한 재수 하시니까.”
나는 넋 나간 표정으로 가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백각한텐 못 이기겠네.”
가후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냈다. 혹시 남을 열받게 해서 수명을 깎은 다음에 그걸 제 수명에다가 보태는 것은 아닐까? 실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일지도 몰라. 나는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가설을 제기했다.
“자, 이제 천하를 논하시죠.”
이제 지체 높은 팔략의 일원이 되신 제갈공명께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전풍이 아무리 국사라지만 고간의 대병을 맞아 신경을 온통 그쪽으로 쏟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유비가 이 틈을 놓칠 리가 절대 없지요.”
가후가 끼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의 전선에 있는 장수들을 빼돌리지는 않을 겁니다. 유비는 빼앗는 것만큼 지키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더군다나 합비공께서 남부교위(육손)로 하여금 말릉에 이만의 병력을 주둔하게 하셨으니 반드시 우리를 경계할 것입니다.”
아주 대단하신 팔략끼리 쿵짝이 잘들 맞으시는구먼 그래! 그러나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전선은 지키면서 은왕부를 먹을 계획을 꿈꾼다…… 대체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놈은.
견초의 선진을 패주시킨 고간의 선봉장 장연은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전풍이 애초부터 병마를 주둔시키지 않은, 고대 왕조 은나라의 도읍이었던 조가는 무력하게 고간의 손에 떨어졌다. 그 남부의 도시인 공과 급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세가 오른 장연은 대대적으로 조가, 공, 급 일대를 약탈했다.
“그간 잘도 흑산의 깃발을 깔아 뭉개주셨겠다!”
흑산적은 그간 쌓인 설움을 한 번에 폭발시켰다. 병주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기세를 떨치던 그들은 원씨에 의해 대대적으로 토벌되어 묵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 장연은 그래도 지도력이 있고 몸이 날래서 원씨에게 벼슬을 받았으나, 이름도 없는 무수한 흑산적의 일원들은 크게 쓰이지 못하고 패색이 짙은 전장의 화살받이로 소모될 뿐이었다. 장연은 제 봉급을 쪼개 흑산의 궁핍한 자들을 도왔지만 역부족이었고, 수다한 흑산의 잔당들은 굶어죽거나 화살 맞아 죽었다. 원씨는 그들을 왕년의 역당이라고 하여 차라리 죽는 것을 기껍게 여겼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원씨에 대한 적개심이 조가와 공, 급에 퍼부어졌다. 마찬가지로 원씨에게 단물을 제공하던 진딧물 같은 백성들에게 퍼부어졌다. 광포한 수탈에 백성들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 죽어갔다.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였던 조가, 공, 급은 철저히 몰락했다. 이런 환란을 틈타 불량배들이 부잣집의 곳간을 털고 높은 댁의 귀한 여식을 돌아가며 겁간하니 지옥보다 더한 참상이었다.
고간은 고삐 풀린 장연을 제어하지 못했다. 오만을 헤아리는 고간의 병력 중 상당수가 흑산의 잔당이었으며, 분풀이를 하는 그들을 만류하면 내분을 일으킬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고간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장연은 고대왕국의 옛 도읍을 폐허와 초토(焦土)로 만들었다.
상서 두기가 고간에게 진언했다.
“상당공께서 승리하시면 모두 상당공의 영토가 될 땅입니다. 어찌 이렇듯 참담히 무너뜨리도록 방종하시는 겁니까?”
고간은 소극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허나 장연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두기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백성을 적으로 돌리는 건 가능한 일입니까?”
고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비의 이상론이라면 이골이 났네. 훗날 다시 복구하면 될 일이 아닌가. 자중하시게. 작은 일 때문에 대의를 그르칠 수 없네.”
두기는 실소를 터트렸다.
“대의라고 하셨습니까.”
스스로 부끄러워진 고간은 도리어 성질을 부렸다.
“듣기 싫다! 쓸데없는 말로 군심을 어지럽히지 마라!”
두기는 가만히 고간을 응시하다가 고간의 막사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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