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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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유비는 잔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대는 도적인가.”
서황은 고개를 숙여 제 입성을 훑어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라고 해봤자 믿지 않을 꼬락서니군.”
“재물을 탐하는 도적이었다면 시시콜콜 내 이름을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잡것들과 나는 다르오. 믿어주면 고맙겠는데, 나는 도적이 아니니까.”
“허면 그대는 무엇인가.”
서황은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백파곡(白波谷)의 두령인 양봉의 밑에서 종사하다가, 양봉이 이각의 휘하로 들어가는 터에 이 몸도 출사했지. 그러다가 이각과 곽사가 서로 다투다가 죽어버렸고, 삼보가 난다 긴다 하는 제후들이 탐을 내고 시시때때로 병마를 보내니 버티지 못한 양봉은 이쪽에 터전을 잡고 근근이 도적질을 하면서 살고 있소.”
서황의 말에 좌우의 수하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장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시면 안 됩니다!”
서황은 픽 웃었다.
“장군은 무슨. 양봉은 도적 우두머리로도 실격이야.”
유비는 입술을 비틀며 비아냥거렸다.
“너의 출신이 도적이고 지금도 도적질을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도적이 아니라고 하는군.”
서황이 곧장 받아쳤다.
“꼬락서니로만 보자면 담왕도 영락없는 도적인걸.”
사실인지라 유비는 입술을 더욱 괴이하게 비틀었다. 서황은 흐흐 웃으며 유비에게 물었다.
“제갈찬의 상장인 중부교위 손관이 그대를 노린다는 소식이 일대에 파다하오. 저 멀리 흙먼지가 오르는 걸 보니 거의 다 온 모양인데?”
유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여기서 조금만 서쪽으로 더 가면 송경 천자의 진영이 나오는데. 이른바 진퇴양난이 아닌지.”
그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손관의 말발굽을 피해 서쪽으로 갈 줄만 알았지 그 다음은 생각하지 못했다. 동쪽으로 가면 손관의 기병이 삼만이나 도사리고 있고, 북쪽은 차라리 제갈찬에게 잡히는 것이 나을 정도로 유비에게 독한 원한을 품은 전풍이 있다. 남쪽 역시 합비공 제갈찬의 영토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사면초가였다. 유비가 입술을 우물거리는 와중에 방통은 스치는 생각이 있어 유비에게 말했다.
“계속 서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음?”
유비가 방통을 바라보니 방통은 엷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서황이 끼어들었다.
“아직 내가 놔준다고 안 했소만.”
유비는 뻔뻔스럽게 말했다.
“놓아 달라.”
서황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 정도는 뻔뻔해야 일국의 왕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건가?”
“죽일 것이었으면 이미 나를 죽였겠지. 살려주려고 지금까지 둔 것 아닌가.”
서황은 묘한 웃음을 띠었다.
“그대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다만 놓아줄 수도 없소.”
유비는 우선 죽음은 모면했다는 말에 안심하고, 서황의 뒷말에 의문을 표했다. 서황은 웃음을 띤 채로 말했다.
“나도 데려가시오.”
유비는 당황스러웠다. 그는 천애고아와 다름없는 신세, 서황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와 같은 말을 하는가. 서황은 씩씩한 투로 말했다.
“저런 머저리 같은 양봉의 밑에서 생애를 끝낼 생각은 없소. 군웅의 밑에서 뜻을 펼치고 싶소.”
유비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그대의 앞에 있는 유현덕은 이름만 담왕이지 기실 제갈찬이 눈에 불을 켜고 추포하고자 하는 대죄인인데. 군웅의 밑에서 뜻을 펼치고 싶거든 차라리 내 목을 베어 제갈찬에게 바치고 장군의 인수를 얻는 편을 추천하겠소.”
서황은 으하하 웃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도 지껄이시는군. 제갈찬 따위에는 관심 없소이다. 장인 잘 만나 떵떵거리는 애송이일 뿐이지.”
“나는 그대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소이다.”
“약속 하나만 해주면 되오.”
“어떤……”
“나중에 천자가 되거든 나를 대장군으로 삼아주시오.”
천자라니. 당장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지도 못하는데 천자라니. 유비는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다. 말로는 뭘 못하겠는가. 대장군이 아니라 군왕에 봉해줄 수도 있다.
“후회할 텐데……”
“후회는 할 수 있소. 그러나 원망하지는 않소. 후회를 두려워하면 광영도 얻지 못하는 바.”
“그대도 어지간히 미친놈이군.”
“내가 미쳐도 담왕만큼은 미치지 않았을 것이오.”
유비는 서황이 마음에 들었다.
“내 권토중래하여 마침내 천자의 위에 오르거든 그대를 대장군에 봉하리라.”
기실 관우가 있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자질구레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서황은 절도 있게 손을 모아 읍을 올렸다.
“소장 서황이 이제부터 담왕을 모시겠습니다.”
“음.”
그러자 서황의 좌우에 있던 도적들이 난리를 피웠다. 두령 양봉을 마구 힐난하더니 이제는 아예 주인을 갈아타겠다고? 그것도 그대로 포승을 묶어 제갈찬에게 바치면 천금과 비단을 내릴 놈을 섬기겠다고? 재물에 눈알이 뒤집힌 그들이 서황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서황은 그것을 알고도 태연자약했다.
“내 수하들을 이끌고 두령 양봉을 죽여 일단 이 산을 근거지로 삼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내 침묵하던 방통은 서황의 좌우를 보다가 쓰게 웃었다.
“그대의 수하들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소만.”
서황은 곁눈질로 그들을 살폈다. 그들은 칼을 빼들고 천천히 서황에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서황은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못 배워먹은 놈들은 보고도 금방 까먹는다니까. 나랑 그렇게 같이 다니면서 실력을 봐왔으면서 말이야.”
서황은 칼을 빼들었다. 선공이 우세함을 아는 도적들은 이를 악물고 일제히 서황을 향해 달려들었다. 족히 이삼십 인은 되었는데, 서황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오는 놈은 발로 걷어차 넘어뜨리고, 뒤로 오는 놈은 칼을 찔러 배를 갈랐다. 둘이 동시에 덮치려는 놈들은 피한 뒤에 뒤통수에 칼을 박았으며, 개중 덩치가 큰 놈의 목을 따고 한 손으로 멱살을 틀어쥐어 말 그대로 고기 방패를 삼았다. 이삼십 여의 도적들은 순식간에 일망타진되었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십여 인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로 도주했다. 서황은 그제야 멱살을 쥔 덩치를 아무렇게나 버려놓고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저놈들이 두령 양봉에게 고스란히 일러바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방통이 말했다.
“괜찮소. 우리는 계속 서쪽으로 가야만 하오.”
서황은 답답하다는 듯 앞서 했던 말을 반복했다.
“서쪽에는 천자의 병력이 있다니까.”
“맞소. 사이비 천자의 병력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행선지요.”
유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고기가 상했던가?”
“양봉이나 손관이 우리의 뒤를 잡기 전에 서둘러 가시지요. 사이비 천자의 상장인 반장의 막사로 가는 겁니다.”
유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방통을 노려봤다.
“이 봉황새끼, 바른 대로 말해라. 반장이랑 내통을 하였느냐!”
방통은 되도 않는 소리라는 듯 푸 웃었다.
“제갈찬은 전하보다 이 방통을 더 미워합니다. 제가 미쳤다고 반장이랑 내통 따위를 합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자진해서 사지로 가자는 말을 못하지!”
“가끔은 사지가 극락이 되는 법이니 이 방통을 믿어주십시오.”
서황은 저 멀리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유비에게 말했다.
“벌써 양봉이 움직였군요.”
방통은 유비를 재촉했다.
“어차피 서쪽밖에 길이 없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유비는 서황의 손에 질질 이끌리며 질질 짰다.
“아이구우, 이 유현덕이 이제 사이비 천자의 손에 죽고 말겠구나, 아이구……”
방통은 유비의 못난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란 고사는 기실 위를 망가뜨리고 들어선 진나라의 두예가 오나라를 연전연파하며 등장했지만, 이 말을 꼭 써야겠다. 나의 명령을 받든 군단장들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영천에서 정보를 패주시킨 진등과 가후는 진류, 제음으로 움직이며 서주의 북쪽에서 휘몰아쳤다. 고순은 위연을 물리치고 담왕부와 갈라먹었던 여남을 온전히 회복하고 패국, 팽성국으로 향하여 담왕부가 있는 동해국의 담성을 직선으로 내질렀다. 고순의 쾌진격은 조운의 보급로를 북쪽에서 잘라버렸다. 노구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조운은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물러났다. 육의, 제갈근, 반림의 군세는 명백한 수적우위를 지니고 동쪽 해안을 타 올라갔다. 정신없이 몰려오는 병력에 미축은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렸다. 군의 지휘계통이 문란해지고 군율이 바로서지 않으니 제 아무리 대단한 장수들을 거느렸다고 하나 각자도생으로는 한계가 뚜렷했다. 급기야 미축은 극약을 처방하기에 이르렀다.
“연주도독 관우를 소환하라……”
이 난국을 타개할 위인은 관우가 유일했다. 기실 관우가 나선다고 하여 손바닥 뒤집듯 전황이 바뀌진 않겠지만 관우가 미축에게는 유일한 패였다. 미축은 관우 대신, 서주의 강단 있는 선비인 조욱을 연주도독에 임명했다. 군재가 일천하였으나 최소한 후방에서 난리를 일으킬 인물은 아니었다. 어차피 북방의 조조가 뒤통수를 후리기로 결심하면 누굴 데려다 놓아도 매한가지의 결과를 빚을 터이니 배신의 기미가 없는 자라면 누구든 연주도독의 소임을 맡을 만했다. 오환이 조조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터라 미축은 당장의 급한 불부터 꺼보자는 심산이었다.
관우는 휘하의 병력 이만을 이끌고 미축의 처분에 따랐다. 미축은 유비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으로 그를 안남대장군에 임명하고 군권을 모두 이양했다.
“운장, 부디 이 난리를 극복해주시구려……”
“음.”
관우는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축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릴 뿐이었다.
관우는 즉각 정병 이만을 이끌고 출정했다. 농성은 의미가 없었다. 사방팔방으로 날아드는 적병이 성을 지나쳐가면 그만이었다. 그는 팽성에 막사를 쳤다. 담왕부가 있는 담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이기에 적들이 반드시 이곳으로 몰리는 탓이요, 회전을 벌이기에 적당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팽성은 과거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대전을 벌였던 전장이기도 했다. 제후 왕들을 무수히 거느린 유방은 무려 육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이끌었는데, 항우는 고작 삼만의 병력으로 이들을 각개격파하고 개가를 울린다. 관우는 그 고무적인 역사를 되새기기 위해 팽성을 선택했는지도 몰랐다. 관우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팽성에 버티고 섰다.
“패왕(霸王)의 역사가 오늘 재현되리라.”
관우는 눈을 부릅뜨고 진등과 가후, 고순의 병력을 맞이했다.
여전히 의심의 똬리를 풀지 못한 채로 유비는 반장의 막사에 머뭇거리는 걸음을 들였다. 한창 공성을 마치고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던 반장의 군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전풍이 고간과 유비의 침입을 막아낸 이 시점에서 낙양 공략은 불가능하지 않느냔 것이 진중의 여론이었다.
반장 역시 송경에서 철수명령이 내려올 것을 기대하며 형식적인 공성만 이어나가던 차였다. 본디 불같은 성정의 그는 답답한 전황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전임 대사마 관녕의 화가 자신에게 똑같이 미칠 것만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장군! 담왕 유비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뜬금없는 소식이 반장에게 들렸다.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유비가 여기 왜 있어? 그는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부관을 호되게 질책하려다가, 그의 포승줄에 단단히 묶인 왕귀를 보고 입술을 간질이던 호통을 다시 꿀꺽 삼켰다. 반장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