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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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관우의 삼만 병력과 교대한 조조의 병마는 조인에 의해 지휘되어 병주로 향했다. 태원에 머무르고 있던 안량은 즉각 항전하지 않고 전선을 뒤로 물렸다. 이미 쑥대밭이 돼버린 병주의 최전방은 보급선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안량이 조인을 맞아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병주의 소식은 급히 낙양의 전풍에게 알려졌다. 거듭되는 환란은 이제 전풍의 강건한 정신으로도 버텨내기 힘들었다. 전풍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었다.
원소가 유비를 공략하겠다고 업도를 나선 이후,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만이 전풍의 앞에 놓여있었다. 조조의 배신, 유비의 기습, 마등의 침입, 유총의 공세, 고간의 반란, 유비의 급습, 제갈찬의 동병(動兵), 그리고 이제 다시 돌고 돌아 조조. 전풍은 과부하가 걸린 뜨끈한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전풍은 차라리 관짝에 들어가 편히 누워 쉬고 싶었다. 그는 약한 몸살기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선왕 전하, 어찌하여 홀로 편하십니까. 이 전풍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으시고 좋기도 하시겠습니다 그려.”
그는 병주의 안량에게 전갈을 띄워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 것은 지키라고 하였다. 이만 하면 오래 버틴 것이었다.
오환과의 지루한 대치가 조인의 병마에게는 도리어 약이었다. 오환이 질긴 피라면 병주의 은군은 마른 지푸라기였다. 쓸데없이 물기를 많이 머금은 피는 질기고 질겨서 낫질을 해도 엉켜 힘이 드는 법이다. 그런 피를 베다가 마른 지푸라기를 베면 훨씬 수월하게 느껴지는 터. 지지부진한 전장에서 굴러먹다가 에비, 겁만 줘도 저만치 도망가는 적을 상대하게 되니 조인의 병력은 용기백배하였다.
본디 이러한 만용은 전장에서 금물이었다. 그렇듯 오만하고 안심하는 마음은 책략에 당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량의 신세란 것이 책략은커녕 양식을 보존하여 달아나기도 어려운 마당이었으니 조인도 그것을 간파하고 도리어 수하들의 만용을 부추겼다.
“씩씩하게 나아가라! 낙양의 금은과 미녀들이 너희 호걸들 왕림하시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다!”
“우와아아아아아!”
조인은 능수능란하게 병력을 독려하여 병주를 돌파해나갔다. 흘러간 옛날의 도읍의 영화가 찬란한 업도에 비하겠냐마는, 낙양은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병사들은 저마다 상상하는 낙양의 모습을 떠올리며 잰걸음을 걷는 장딴지에 힘을 주었다. 기실 낙양에 당도하면 상상과는 퍽 다른 모습에 힘이 스르르 풀려버리겠지만, 낙양까지 간다면 그 이후로는 조인이 알 바가 아니었다. 조인은 적이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는 신속한 돌파가 최선의 계책임을 알고 있었다. 적에게 기운을 추스를 짬을 내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맹렬한 기세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어어어, 뒤로 밀리던 적들이 그 관성으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버리도록.
안량은 병주의 거성인 진양에서 조인을 맞이했다. 안량은 이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인의 진격을 저지했다. 병력의 수효로는 안량의 편이 결코 적지 않다고 하겠으나, 진중에 감도는 분위기가 운니지차였다. 안량이 보유한 병주의 병마는 대개 고간을 따르던 자들이었다. 무지렁이들이야 주인이 누군들 무슨 관계겠느냐 하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그른 얘기였다. 그런 무지렁이들에게 창칼을 쥐여 주고 싸우게 만들려면, 그들과 군의 수뇌 사이에 동질감이 있어야 한다. 이 싸움에서 이기면 콩고물이라도 좀 떨어지겠다는 확신을 주든지, 아니면 정말 목숨을 바칠 만큼 충정을 배양하든지.
안량의 병주군은 그저 억지로 멍에에 끌려 다니는 망아지들이었다. 안량에 대한 충정이 없었다. 요행히도 싸움에서 이긴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폐허가 된 고향뿐이었다. 물론 이것도 목숨을 건진 다음의 얘기겠지만.
그러나 조인은 어떠한가. 신기루 같은 낙양의 영화를 외치며 확실한 이익을 보장하고, 병주를 수 일 내에 돌파해내면서 병사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또한 이들은 오랫동안 조씨를 섬겨온 사졸들로서 조인에 대한 충정 또한 깊으니, 수효가 엇비슷하다고 하여 전력이 엇비슷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조인은 불필요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움을 고집하지 않았다. 안량은 수성군의 이점을 취하기 위해 진양성에 들어가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조인은 성을 에워쌀 뿐, 공성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 스스로 뇌옥(牢獄)에 들어가는구나. 먹을 것이 없는 농성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이곳에서 버티면 배가 고파질 대로 고파진 놈들이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이다.”
조인은 부장 우금에게 명했다.
“장군은 병력 일만을 이끌고 그대로 남하하여 진양 남쪽의 병주를 모조리 병탄하도록 하시오. 안량이 이곳에 묶여있는 걸 아는 놈들이니 격하게 반항하지는 않을 것이오.”
우금은 우직하게 군례를 올렸다.
“존명!”
조인이 진양성을 성공적으로 포위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조는, 용장 하후연을 불렀다.
“묘재(하후연의 字), 자효(조인의 字)가 안량을 묶어놓는 사이에 병주를 삼키고 낙양까지 나아가라.”
“허면 은왕부가 있는 하내를 지나쳐서 아예 은을 멸망시키라는 말씀이십니까?”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다. 운장이 오환놈들을 잡아두고 있고, 제갈찬 녀석은 방금 꿀꺽한 서주와 예주 때문에 속이 더부룩하다. 소화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우리도 지금 세력을 뻗쳐야 할 때다.”
조조 역시 적은 병력으로 연주를 점령했다지만 연주는 본디 조조의 영토였기에 다스리는 데 많은 부담을 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관우와 주유의 병력이 추가로 편입되어 도리어 힘이 불어난 상황이었다.
그는 다람쥐가 늦가을에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취하는 것처럼, 합비공의 눈초리가 조조를 노려보기 전에 최대한 몸집을 불려놓을 태세였다. 이것은 교활함이 아니라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합비공에게 대적할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조조의 조왕부 역시 먹잇감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원씨를 끝장낼 것이다.”
정욱이 의문을 표했다.
“허나 전풍이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을까요?”
조조가 무어라 대꾸하려고 하는데, 곽가가 파리한 안색으로 지팡이를 두 손으로 짚으며 나섰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조왕.”
정욱이 뒤를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봉효(곽가의 字).”
조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곽가에게로 달려갔다. 조조의 팔이 곽가의 위태로운 몸을 부축했다.
“봉효, 무리하지 말라. 치유에 힘써야 할 때다.”
곽가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곽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도울 수 있을 데까지 조왕을 돕고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조조의 얼굴에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번졌다.
“어찌 그런 말은 하는가. 그대는 아직 젊다.”
“젊고 늙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운수가 사람마다 다른 법입니다. 저를 하후연 장군과 함께 출정시켜 은왕부를 멸망시키도록 해주십시오.”
곽가는 하후연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하후 장군은 용맹하지만 지모는 이 곽가가 조금 낫지 않습니까?”
하후연은 어설프게 웃었다. 조조는 어두운 안색으로 곽가의 간청을 승낙했다.
“좋다. 봉효가 묘재를 도와 나아가도록 하라. 그러나 죽더라도 원수의 땅에서는 죽지 마라. 죽더라도 업도로 돌아와서 과인이 보는 앞에서 죽어.”
곽가는 기침과 웃음을 번갈아 터트렸다.
“낙양을 무너뜨리면 그곳이 어찌 원수의 땅입니까? 은왕부의 깃발이 꺾인다면 그때부터 낙양은 조왕의 땅입니다……”
하후연은 곽가를 참군으로 하여 병력 일만을 이끌고 출병했다. 그들은 이미 우금이 닦아놓은 병주의 가도를 내달려 하내를 직격했다. 은왕부는 화급하게 대처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신경한 시선으로 이들을 맞았다. 여유가 아니라 지루함이었다. 은왕부의 구성원들은 이만 하면 싸울 만큼 싸웠다고 여겼다. 무너져도 아쉬움 내지 회한 따위는 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전풍은 은왕부의 병력 일만을 달달 긁어 은왕부가 있는 회 땅에 집중시켰다. 낙양의 저수에게도 연통을 띄워 은왕부를 지원하도록 했다. 그러나 낙양의 사정도 말이 아닌 것이, 이미 천자 유총의 병력을 맞아 고군분투를 벌이고 전후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은왕부에 당도한 낙양의 지원군은 고작 삼천이었다.
은왕 원상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승상, 조조의 말발굽이 정녕 매섭구려.”
이미 군왕의 채신머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유약한 도련님의 속성만이 남아 승상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징징거릴 뿐이었다. 전풍은 편안하게 웃었다.
“두려우십니까?”
“어찌 두렵지 않겠소? 저들이 은왕부를 장악하면 과인을 살려둘 리가 없지 않소.”
전풍은 탁 풀리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이오?”
“죽어간 남녀노소들에게 말입니다.”
“무슨……”
전풍은 소매를 매만졌다.
“전하를 지키고자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전하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죠. 숨을 옥죄는 두려움, 사지를 포 뜨는 고통, 저마다의 인연과 헤어져야하는 슬픔,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역사에서 잊히는 설움, 아니면 회한.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숱한 사람들이 죽어갔단 말입니다.”
전풍은 검지를 들어 원상의 명치를 쿡 찔렀다.
“전하 때문에 말입니다.”
전풍의 손가락은 제법 깊게 들어갔다. 원상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전하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리고 죽을 것입니다.”
“……”
“허면 최소한 죽음을 두려워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최소한의 예의도 아닙니다.”
원상은 울상이 된 채로 전풍을 응시했다.
“최소한의 예의도, 도덕도, 윤리도, 그 거창한 그 무엇도 아닌 아니고, 그냥 이건……”
전풍은 미지근한 숨을 토했다.
“본성입니다. 전하의 본성이 죽음을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사람으로서의 본성이지요. 허나 전하께서는 오로지 사는 것만을 급급하게 여기시니.”
전풍은 온정 어린 시선으로 원상을 바라봤다.
“짐승과 다름없으시군요.”
“뭐, 뭐라고……”
전풍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제 앞에 있는 것이 일국의 군왕인지, 아니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한 마리 능소니인지 분별이 안 되기 시작했습니다.”
“스, 승상……”
전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얌전한 걸음으로 원상의 곁에서 멀어졌다.
“너무하십니다. 제가 이 정도로 열심히 하지 않았습니까. 허면 전하께서는 제 열심의 만분지일만큼이라도 군왕의 모습을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이리도 저를 허망하게 하십니까. 제가 지금껏 뼈를 갈아가며 섬겼던 것이 다만 한 마리 능소니일 뿐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렇다면 정말 유감이군요.”
전풍의 목소리 끝에는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멀어지는 전풍의 걸음을 따라 그의 목소리도 점점 작아져 종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전풍, 싸우긴 싸우겠습니다.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이 전풍의 모가지에 씌워진 멍에니까요. 그러나 참으로 덧없군요. 참으로 허망하군요. 참으로 무상하군요. 참으로 무력하군요. 참으로… 참으로……”
진양에서 포위된 채로 농성하던 안량은 마침내 더 버티지 못하고 성 밖으로 뛰쳐나왔다. 안량은 일신의 용맹에 의지하여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조인은 호락호락한 무장이 아니었다. 안량은 적의 포위가 느슨해졌다고 여겼을 때, 야음을 틈타 성문을 박차고 나섰다. 그대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은왕부로 귀환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포위가 느슨해졌다고 여긴 것은 안량의 착각이었다. 안량이 성문을 나서자마자 자는 척을 하던 조인의 맹졸들이 나서 안량의 병력을 도둑 때려잡듯이 잡았다. 굶주린 안량의 병마는 그대로 허물어지고, 선두에 나서서 병력을 격려하던 안량은,
“크윽… 선왕이시여……”
창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조인의 명령을 받잡은 궁병들의 화살 비를 온몸으로 받고 그대로 무너졌다. 조인은 고슴도치가 된 채로 기울어지는 안량을 향해 읍을 올렸다.
“잘 가시오, 하북상장.”
안량의 동공이 탁, 풀렸다. 베어진 거목이 우지끈 천둥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 작품 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