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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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구품관인법은 단순히 품계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을 다르게는 구품중정법이라고 일컫는데, 중정(中正)이란 각 고을 출신의 명사를 그 고을로 보내 새로이 관직에 등용할 인물을 천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폐단이 발생할 수밖에. 중정이라고 하여 얼마나 대단한 사명감으로 일하겠는가. 옆 마을 아무개보다도 옆집 아무개를 우대하게 되고, 뒤로 비단 몇 필이라도 찔러주면 품질보증 도장을 멋대로 꽝꽝 남발해대니 얼마 안 가 악법이 되고 마는 터였다. 그리하여 이후 수나라 때 과거제가 등장하여 그나마 공평한 관리 선발이 이뤄지는 것이었다.
내가 맨 처음 주장한 것은 바로 이 과거제였다. 이 얼마나 공정하고 아름다운 제도인가. 그러나 응당 내로라하는 명사에게 좋은 인물평을 얻어 그 명성으로 관직에 출사하는 것이 상식인 이 시대에는 파격을 넘어선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세태에 덜 찌든 소년대부 등애만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느냐며 강력히 찬동할 뿐이었다. 량이도 이것이 도입해봄직한 제도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도의 혁명은 난세에 힘을 보전하는 데 도리어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리로 부정했다.
백각의 가후와 장송은 쌍수를 들고 반대했다.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나 또한 혁명만이 능사라는 치기 어린 생각에 갇혀있지만은 않았으니 이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결과 구품중정법과 관료제의 중간지점을 채택했다. 우선 각지에 중정에 해당하는 명사 내지는 호족을 보내 그들에게서 추천을 받아 수도로 불러 모은다. 그러나 그들의 추천을 바로 신용하지는 않는다.
거른다. 그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일제히 시험을 치른다. 사흘 내내 시험을 치른다. 기초적인 지식을 시험하고, 현실 정치에 얼마나 실효적인 기안을 지니고 있는지를 시험하고, 돌발한 상황을 가정하여 임기응변을 시험한다. 그리고 면접을 본다. 각 단계마다 점수를 배정한 뒤에, 그 합산한 점수를 순서대로 순위를 매긴다. 한 단계에서라도 낙제점을 받으면 바로 짐 싸고 퇴장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추천한 중정은 정청의 질책을 받는다.
그러니까 대입의 경우를 예로 들면, 수능시험 최저등급을 설정해놓아 그것을 넘지 못하면 아무리 다른 쪽의 성적이 뛰어나도 퇴짜를 놓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중앙에서의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는 극비리에 무작위로 선발하여 부정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다. 이 제도가 안착된다면 과거제로 본격 발돋움시킬 수 있을 터였다. 아무튼, 구품중정제였다.
관우는 답돈과 맹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답돈의 솜씨도 발군으로 쳐줄 만했다. 중화의 정형화된 창칼이 아니라 북방의 분방한 놀림이었다. 이따금 관우의 예상을 벗어난 공격이 들어오니, 처음에는 손주와 놀아주는 할아비의 마음으로 나섰던 관우도 점점 진지해졌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완력과 기술에 있어서, 그러니까 무(武)에 있어서, 관우는 완성된 인간이었다. 그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완성을 초월한 여포 같은 돌연변이 정도일 뿐이었고 발군 내지는 군계일학 정도의 솜씨로는 관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내 싸움의 주도권은 관우에게로 넘어갔다. 관우는 창 자루로 답돈이 올라탄 말의 정강이를 쳐 넘어뜨리고, 답돈이 균형을 잃은 순간, 그 찰나를 파고들었다. 관우는 창 자루로 답돈의 몸을 흠씬 두들겨주었다. 피멍이 들 정도로. 답돈은 입술을 악물고 관우의 매질을 속수무책으로 감당해야만 했다. 한참 답돈을 후려치던 관우는 말을 두어 발짝 물리며 호통을 쳤다.
“이놈! 이제 네가 나보다 낫다고 하겠느냐!”
답돈은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항변했다.
“이익! 네놈이 비겁하게 말의 정강이를 후리지 않았느냐! 게다가 나는 위연이란 놈과 싸우느라 힘이 빠졌을 뿐이다! 이건 정당한 싸움이 아니었다!”
“흥, 내가 창으로 찔렀으면 그대로 황천으로 갔을 녀석이 입만 살았구나.”
“네놈도 비겁으로 이기는 것이 부끄러우니 그리한 것이 아닌가!”
“멋대로 생각하는군. 좋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나와라! 든든히 힘을 비축하고 튼튼한 말을 타고 오너라! 얼마든지 상대를 해줄 터이니.”
답돈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관우의 마음이 그 사이에 바뀔까 부리나케 제 진중으로 돌아갔다. 관우가 아군을 돌아보며 손을 번쩍 치켜드니, 풀이 죽어있던 사졸들이 용기백배하여 오환보다 더 큰 함성을 내질렀다.
“아주 그냥 목을 베어버리시지 그러셨습니까?”
관우가 진으로 돌아오자 위연이 잔뜩 분개해하며 물었다. 관우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답돈이 널 베자면 못 베었겠느냐?”
그 한 마디에 위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관우는 투구를 벗어 탁자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답돈의 재주는 쓸 만하다. 약속을 준수할 줄도 아는 녀석이다. 사수를 써서라도 적을 궤멸시키는 전국시대의 치사함이 아니라, 질서와 규칙이 있는 춘추시대의 우직함으로 싸운다. 중원에서는 흔치 않은 인물상이지.”
위연은 저를 패배시킨 장본인을 추켜올리는 관우가 못내 서운해서 어깃장을 놓았다.
“두 글자로 줄이면 바보라고 하죠.”
관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다음날 답돈은 씩씩거리며 전장의 한가운데로 나왔다. 그러면서 다시 관우! 나와라! 관우! 나와라! 시끄러운 구호를 외쳐대는 터였다. 관우는 손목의 아대를 꽉 조이고 답돈의 부름에 응했다. 답돈이 실컷 핑계를 댔지만 싸움은 전날보다도 더 싱거웠다. 첫날에는 북방의 생소한 창술에 잠깐 머뭇거리기라도 하였지만, 이제 답돈의 창술이라는 것 역시 어느 정도 규칙을 띨 수밖에 없음을 안 관우에 의해 완전히 간파되어버렸다. 싸움은 더없이 맹탕이 돼버렸다. 관우는 두어 번 부러 당해주기까지 하다가 냅다 답돈의 날갯죽지와 허리를 연속으로 강타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밥 못 먹었냐?”
관우는 억센 팔뚝의 힘으로 답돈의 목을 조였다. 그 멧돼지 같은 답돈이 켁켁 질식감을 호소하면서 관우의 상박과 하박이 짓눌려 팔만 허우적거렸다. 관우는 한참 골려주다가 답돈을 놓았다. 답돈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 어떠냐.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댈지 궁금하구나.”
“으으……”
답돈이 말을 잇지 못하자 관우는 껄껄 웃으면서 창을 겨눴다.
“핑계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그냥 물러가라.”
답돈은 말에서 내려 관우의 앞에 철퍼덕 엎드렸다. 관우는 흡족하게 소리 없이 웃었다. 답돈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답돈이 관 도독께 졌소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이 졌소이다!”
관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허면 네가 물러가겠느냐?”
“물러가겠소.”
“신의를 아는구나. 기껍다.”
“다만 유주의 절반은 우리가 점유하겠소. 그렇지 않고서는 나의 속민들을 이해시킬 수 없소.”
“옳은 말이다. 그리하라.”
답돈은 눈을 빛내면서 관우를 향해 절을 올렸다.
“관 도독의 무예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경지에 이르렀소이다. 훗날 다시 만나거든 창칼을 맞대는 것이 아니라 형님으로 공경하겠소이다. 이 답돈은 관 도독을 이길 수 없소.”
관우는 폭소했다.
“그대는 참으로 사내답다. 치졸하고 비겁한 중원의 범부들하고는 다르다.”
“관 도독이야말로 사내 중의 사내올시다. 이 답돈을 이기고도 베지 않으니,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 답돈은 부끄러워 살 수가 없을 것이오.”
“고맙다. 네가 신의를 지킨 덕택으로 양측의 애꿎은 병사들이 상하지 않고 돌아간다. 다음부터는 교전이 아니라 화호로서 조왕부와 사귀도록 하라. 침략은 도리가 아니다.”
답돈은 장읍을 올렸다.
“그리하겠소. 관 도독, 다시 뵐 날을 기다리겠소.”
“나도 다시 만나기를 기다리겠다.”
관우는 휙 몸을 돌려 진중으로 돌아갔다. 답돈은 관우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정녕 병마를 거두어 유주의 서북방으로 돌아갔다. 답돈이 패배하는 것을 목도한 누반, 소복연 등도 뭐라 항변하지 못하고 조용히 짐을 쌌다.
“아예 적의 수괴를 베어 싹을 잘라버리지 그러셨습니까?”
돌아가는 길에 위연이 짹짹거렸다. 관우는 그를 가볍게 질책했다.
“또 그 소리로구나.”
“그리하면 관 도독의 공훈이 더욱 드높고 위명도 더욱 드높아졌을 텐데요.”
“쯧쯧.”
관우는 혀를 갈기며 위연의 의견을 일축했다.
“어째서 답돈이 적이냐? 답돈은 적이 아니다. 조왕의 적이기는 하되 나의 적은 아니다. 구태여 그를 베어 북방의 원한을 살 까닭이 없다. 그를 베면 어느 하나가 멸망해야 끝나는 공방전이 이어지게 된다. 그것이 조왕이 바라는 바다. 나의 병마도 소멸하고 오환의 병마도 소멸하여 이 북방에 오로지 조왕부의 기치만 우뚝 서게 되는 것, 그것이 조왕이 바라는 바다. 답돈은 적이 아니다.”
관우는 위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에 채찍을 쳐서 저만치 홀로 멀어져갔다.
조조는 업도의 북쪽 삼십 리까지 관우의 마중을 나와 친히 술을 하사하는 등 크게 기뻐하는 품이었으나, 기실 속으로는 병력을 하나도 상하지 않은 채 답돈을 저 멀리로 쫓아버린 관우가 두려웠다. 그의 병마를 마모시켜 종내 관우 하나만 남겨놓은 뒤에 그를 조왕부의 무부로 삼고자 했다. 삼만이나 되는 병력이 그를 산맥처럼 두르고 있는 이상, 관우는 일개의 독립된 세력이었다.
정치꾼들의 음험한 모략으로만 가득 찼던 합비공부에 오랜만에 화사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합비공의 두 번째 정실인 교 부인이 다시 한 번 해산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기념하여 여러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아이가 사지는 멀쩡한지, 이목구비는 다잡혀있는지, 그런 것은 아비와 어미의 관심사일 뿐이었다. 백각에서 초조하게 머리를 맞대고 모두 같은 말만을 외웠다.
“아들, 아들, 아들, 아들, 아들……”
가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아들, 아들, 아들!”
내내 소년일 것만 같던 합비공의 연치도 이제 스물다섯이었다. 이쯤해서 원자를 생산해주어야만 안정적인 후계구도를 확립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합비로 올라온 장사공 제갈현도 뒷짐을 진 채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여포는 팔짱을 낀 채로 웬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 우장군 좌자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여포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별 말씀이 없으십니까?”
눈을 꾹 감고 있던 여포는 한쪽 눈을 떠 좌자를 바라봤다.
“내가 꼭 별 말씀을 해야 하는가?”
좌자는 짚이는 게 있는 듯 킬킬 웃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나는 합비공부의 내실에 혼자 앉아있었다. 아들이 가업을 잇는 이 시대의 상식 때문에 나 또한 내심 아들을 원하기는 했지만, 딸이어도 큰 관계는 없었다. 다만 두 번째로 출산의 고통을 겪는 교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이 시대는 산모가 숱하게 죽는 시대였다.
산실의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등애가 부리나케 내가 있는 내실로 들어왔다. 등애는 환하게 웃으면서 아뢨다.
“교 부인께서 아기씨를 생산하셨습니다.”
“오, 그래. 교 부인은 무사하시더냐?”
등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합비공. 몸에는 이상이 없으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되었다. 되었다.”
나는 일으킨 몸을 다시 얌전히 앉히면서 등애에게 물었다.
“고추냐?”
내 물음에 등애는 멋쩍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공녀(公女)이십니다.”
“흠.”
나는 검지로 뺨을 긁적였다. 백각의 영감쟁이들이 한숨을 푹푹 쉬겠는걸.
등애와 함께 산실 앞에 서있던 제갈량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백각에 들어갔다. 눈치 빠른 가후는 푹 숙인 고개만 보고도 일을 짐작했다.
“에잉.”
제갈량은 가후의 예상을 확인해주었다.
“따님입니다.”
제갈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좌중이 영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 사이에, 여포가 슬며시 일어나 장사공 제갈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 둘은 백각의 밖으로 나가 무어라 밀담을 나눴다. 좌자는 눈으로 초승달을 그리면서 킬킬 웃었다.
나는 산실로 들어가 땀을 뻘뻘 흘리고 누워있는 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얼마나 아프셨소. 고생이 많았소, 부인.”
교는 방금 낳은 제 새끼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합비공. 딸이네요.”
“허, 그 무슨 실례 되는 말씀이오. 아기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소이다. 그리 말씀하지 마시구려.”
교는 한숨을 쉬며 웃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 작품 후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