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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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이의 이름은 영(瀛)이라고 했다. 시영의 이름 중 한 글자를 딴 것이었다. 다들 아기씨의 탄생에 아쉬워하면서도 대개 기뻐하지만, 시영이 아무리 고운 심성을 지녔다고는 해도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자신은 합비공의 정실부인으로서 후계를 생산하지 못하니 괜한 죄스러움을 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이름을 영이라고 했다. 나는 또한 교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영을 시영의 슬하로 입적시켰다. 시영은 내색은 안 했지만 조치를 고맙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공녀의 탄신을 기념하여 나는 지방의 유력가들을 중앙으로 소환했다. 도독은 부도독들에게 사무를 일임하게 하고, 각 주의 자사들은 각 주의 별가에게 그리하도록 했다. 한 번씩 이들의 기강을 단속해줘야만 넓은 영토를 큰 문제없이 다스릴 수 있었다.
교의 해산일 즈음을 기준으로 하여 각지의 도독들과 자사들을 포함해서, 강동의 오공 제갈근과 형남의 장사공 제갈현, 형북의 남군왕 유기, 원씨의 정통을 이은 원상, 월주의 회계공 반림까지 합비에 당도했다. 꼭 이들이 역심을 품을 것이라고 단정하여 소환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구실로라도 얼굴 구경이나 하려는 뜻이 더 강했다.
술이 몇 순배씩 돌아갔다. 나는 형님 오군공과 아버지 장사군공에게 한 잔씩 올렸다.
“이토록 든든하게 지켜주시니, 이 불초 제갈찬이 군후의 노릇을 하고 삽니다.”
제갈근은 얌전하게 웃었다.
“합비공 덕분에 팔자에 없는 제후의 반열에 올랐으니 도리어 제가 감사할 일입니다.”
아버지 제갈현도 공석에서는 말을 높였다. 그는 세력이 커질수록 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일군의 태수로 절명할 운수였는데 국태공(國太公)의 대우를 받자니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겸양을 떨었다. 그게 어디 내 덕인가. 인복이 많은 덕이지. 기분 좋게 술을 따르고, 나는 내 또 다른 아비 같은 여포에게로 다가갔다.
“태위, 한 잔 받으시죠.”
내가 술을 권하자 여포는 술잔을 그 호랑이 앞발 같은 손으로 턱 막으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내 정수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술 끊으셨습니까?”
여포는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
“사내가 술을 끊을 리가 있겠습니까. 내 다만 술 받기 전에 한 가지 약속을 합비공한테서 받아야겠습니다.”
“잉?”
좌자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혼자 술을 꿀떡 삼켰다.
“무슨 약속이요?”
내가 묻자 여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오늘 공녀의 탄신을 맞아 참으로 기쁜 자리이나, 나라의 중대사를 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양반이 쓸데없이 무게를 잡고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 제갈현도 민망하게 흘흘 웃음을 흘렸다. 둘 사이에 모종의 작당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포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합비공께서는 영웅이 맞으십니까?”
뭔 소리야.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어버렸다.
“아뇨. 전 영웅이 아닌데요.”
여포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닌 듯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합비공이 영웅이 아니면 당최 천하에 누가 영웅입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조조나 유비의 옷자락을 붙들고 물어보시지.”
“에잉.”
여포는 언짢은 듯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뭐야, 왜 저래?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량이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량이는 급히 동석한 모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임자, 한 잔 주시구려.”
모란은 내 눈치를 흘끗 보다가 량이의 잔을 채웠다. 뭔데 대체. 내가 순진한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니 여포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영웅은 호색이라는데. 왜 합비공께서는 호색하지 않으신지요?”
다 모인 자리에서 왜 배꼽 아래를 얘기하고 난리야. 나는 적극적으로 항변했다.
“저 호색한 맞는데요? 어제만 해도 원 부인 하고 동침했어요. 그렇지요, 부인?”
내가 시영을 바라보며 묻자 시영은 저질이라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다가 휙 외면해버렸다.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암튼 할 건 하고 살고 있거든요.”
여포는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아, 조왕 조조는 후궁이 삼십 여를 헤아린답니다. 송경의 황궁에는 여인들의 조신한 발소리로 땅이 울릴 지경이라고 하더군요. 은왕부를 멸망시킨 조조는 무려 열다섯의 첩실을 접수했답디다.”
괜한 유탄을 맞은 원상이 얼굴을 붉혔다. 여포는 점입가경이었다. 그는 유기를 바라보며 물었다.
“남군왕 전하, 선왕(유표)의 측실이 얼마나 되었지요?”
유기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족히 오십을 헤아렸지요.”
“오군공, 오공부에 측실 들이셨죠?”
불똥이 튄 제갈근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 네. 열다섯쯤……”
“이보십시오. 합비공은 지금 여인을 얼마나 두고 있습니까?”
나는 멋쩍게 답했다.
“둘이요.”
“이거 이거, 이래서야 되겠느냔 말입니다.”
이제부터 대답을 잘해야 했다. 시영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안 될 건 뭡니까? 왼손에 원 부인, 오른손에 교 부인 손을 잡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그거야 합비공의 개인으로는 좋겠지요. 허나 나라를 생각하셔야지!”
“나라는 무슨 나라요.”
“이런 말씀 드리긴 뭣하지만……”
나는 딱 잘라 일축했다.
“그럼 하지 마세요.”
호오, 이것 봐라? 여포의 눈빛이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다소 위축되었지만 그렇다고 돌아가서 시영의 바가지를 긁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여포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 더 들이세요.”
나는 그제야 여포의 의도를 눈치 챘다. 춘군을 들이라고? 미안한데요. 복상사는 질색이걸랑요. 나는 기울여놨던 술잔을 똑바로 세워버렸다.
“술 드시기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여포는 급기야 버럭 소리까지 질렀다.
“누가 술을 싫다고 했습니까!”
“저는 원 부인, 교 부인이랑 평생 잘 먹고 잘 살 거거든요.”
나는 흘끔 곁눈질로 시영의 눈치를 살폈다. 나 잘했어?
그러나 여포는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춘군을 측실로 들이세요.”
나는 잠깐도 고민하지 않았다.
“싫어요.”
“그러면 저 태위 관둡니다.”
“태위야말로 나라 생각 하셔야겠어요.”
“합비공!”
“왜요! 태위!”
절대 양보 못 해. 여춘군을 부인으로 들이라고? 그 멧돼지 같은 여자를? 나라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태위. 춘군을 부인으로 맞이하면 이 제갈찬, 십 년도 안 돼서 죽고 말 겁니다. 내가 완고하게 나오자 여포는 제갈현에게 눈빛을 쐈다. 설마, 이 아들을 버리진 않으시겠지요, 아버지?
내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합비공, 태위의 말씀이 다른 게 아닙니다. 이제 합비공의 연치도 어언 스물다섯인데, 아직 공자를 보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여러 부인을 들여 공자를 많이 생산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비공의 권위가 튼튼하고 나라에 우환이 없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들이 내 앞에서 말을 못 꺼내서 그렇지, 내가 갑자기 병에 걸린다든지 날아오는 유시(流矢)에 맞아 죽어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정말 개판이 되는 터였다. 나 죽은 다음의 일이야 어떻든 상관없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몹쓸 사람이다. 나는 족히 오십만 개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 여포와 제갈현이 번갈아가면서 측실을 들이라 권했다. 나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시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시영은 나를 배반했다.
“태위와 장사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여 장군(춘군)은 합비공의 좋은 배필이 되어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합비공,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시지요.”
“……”
나는 완전 외통수에 몰렸다.
익주, 성도 촉왕부.
천신만고 끝에 유비는 성도에 당도했다. 그를 따라온 서황과 방통은 완전히 기진맥진한 표정이었다. 요행히 관녕의 사절단으로 성도에 당도하여 몸의 피로는 덜했지만 합비공의 영지를 통과하면서 긴장으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유장은 제 종중이자 천하에 명성을 떨쳤던 유비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장송을 위시한 익주의 토족들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빈 자리는 다시 채워지기 마련이었다. 군부의 수장인 황권이 유장의 권세를 크게 위협하는 형국이었다. 방희가 익주에서 제일가는 가문이라지만, 방희 하나만으로는 들끓는 군부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유장의 체질적 무능이었다.
“담왕, 담왕, 이렇게 뵙는군요. 오늘의 일이 담왕께는 참으로 안된 것이나 이 유계옥(유장)에게는 홍복입니다.”
유장의 환대에 유비는 바짝 배를 깔고 복종했다.
“촉왕 전하께서 이렇듯 환대해주시다니요. 황망, 또 황망합니다. 이 현덕은 이제 더 이상 담왕이 아니요 다만 촉왕의 종중일 따름이니 말을 높이지 마십시오.”
유장은 유비의 겸양이 흡족했다.
“비록 같은 군왕의 위계로 대우하지는 못하겠지만, 족형의 예를 다하겠습니다. 모쪼록 곁에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유비는 유장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황권은 유장의 품으로 날아온 솔개가 불안했다. 그는 남 모르게 깊은 한숨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