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84
유비의 말을 황권이 제대로 받아치지 못하자 왕수가 나섰다.
“아무튼, 소인은 신왕 전하의 뜻을 촉왕께 전하였습니다. 결행은 촉왕부의 몫, 모든 결정은 촉왕 전하께서 내리시는 바요 이 왕수는 그 결정을 다시 신왕께 전하겠습니다.”
왕수는 그대로 물러났다. 다 된 밥에 유비가 재를 뿌리려 드니 왕수는 그 판을 다시 엎어버렸다. 그는 당당한 걸음으로 객관을 향했다.
신왕 제갈찬이 촉왕부에게 유비의 숙청이 아니라 법정의 숙청을 요구한 것은, 황권을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만일 신왕이 유비를 제거하라 요구한다면 황권은 스스로의 모순에 갇히고 만다.
황권은 신왕부에 대해 적극적인 항전을 주장하는 축이다. 그런데 신왕이 유비를 숙청하라는 요구를 건네게 되면, 유비의 정적으로서 유비를 제거해야 하는 입장과 신왕부의 적대자로서 신왕부의 요구를 뿌리쳐야 한다는 입장이 충돌한다.
그리하여 왕수, 그러니까 신왕부는 황권의 한쪽 날개인 법정을 꺾어버리라 요구하면서 황권의 내부에서 일어날 인지부조화를 사전에 차단했다.
유비가 저지른 가맹관 공략의 책임을 법정에게 묻는 것은, 황권으로 하여금 신왕부에 대적할 명분과 유비를 힐난할 명분을 동시에 거머쥐게 하는 수였다.
이에 유비가 나서서 무마하려 들자 왕수가 판을 파하여 그것에 어깃장을 놓은 것. 왕수가 물러난 후에도 촉왕부의 조신들은 체면을 잊은 채, 이놈 저놈 하면서 서로를 물어뜯기에 바빴다.
방희는 왕수의 말 한 마디에 분란으로 치닫는 조신들을 속으로 욕했다. 어찌 이다지도 우매한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소용돌이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방희 역시 이참에 유비를 도려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황권은 회의가 파하자마자 방희를 찾았다.
“방파서, 이는 제갈찬의 책략입니다.”
“이미 조신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스스로 촉왕부를 전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으니 책략이 먹혔다고 봐야 가당하겠군.”
“그 이상의 책략입니다.”
방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이상?”
황권은 방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갈찬이 유비로 하여금 촉왕부를 잡아먹게 하려는 것입니다.”
“뭐라?”
“제갈찬의 책략은 어떤 방식으로든 놈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가장 낮은 단계의 목표는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방파서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첫째가 촉왕부의 분란입니다.”
방희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둘째가 유비의 숙청입니다. 이 황권을 움직여 유비를 제거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유비의 숙청이 아닙니다.”
“허면, 무엇인가?”
“유비가 이 황권을 꺾고 방파서를 꺾고 끝내 촉왕 전하를 꺾어 그를 촉의 왕좌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촉왕 전하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능합니다.”
방희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어허, 말씀을 가려 하시게. 나는 촉왕 전하의 신하이면서 사사로이는 장인이 되는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그러나 냉철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촉왕 전하께서 이만큼 촉왕부를 이끌어 오신 것은, 그 정통성의 덕택입니다. 선왕(유언)으로부터 내려오는 정통성입니다. 그 정통성 때문에 이 촉왕부는 온전히 익주 유씨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비가 촉왕의 위에 오른다면요? 그는 정통성이 없는 인물입니다. 저 멀리 서주에서 왕의 노릇을 하던 인물입니다. 익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하지요.”
방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힘을 빌려 또 다른 남을 죽임)의 계책입니다. 동시에 이호경식(二虎競食)의 계책입니다. 유비는 필경 촉왕부를 얻으려는 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교묘하고 교활한 자,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 천천히 먹히는 줄도 모르게 촉왕부를 잠식할 계획일 것입니다.”
방희는 그 의견에는 동감했다.
“그런 유비의 등을 제갈찬이 확 떠밀었습니다. 그런 잠잠한 약진을 방해한 것입니다. 이제 저와 유비의 갈등이 표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유비는 계책이 아니라 완력으로써 저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제갈찬은 그것을 노린 겁니다.”
“화평자라고 하더니 실은 분란(紛亂)자였군.”
“완력으로써 이 황권과 다투고, 다시 완력으로써 방파서와 다투고, 다시 완력으로써 촉왕 전하와 다투게 하려는 심산. 그리하여 유비가 촉왕의 관을 머리 위에 올린들 그게 온전한 관이겠습니까?”
“아니겠지.”
“유비라는 칼을 빌려 촉왕부를 결딴낸 뒤, 허약해진 유비를 한입에 턱,”
황권은 입을 크게 벌렸다가 잇소리를 내며 다물었다. 치아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방희의 귀에 불쾌했다.
“잡아먹으려는 술책입니다. 그것이, 제갈찬이 노리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으음……”
“우리가 선수를 쳐야합니다.”
우리라는 소리가 웃기게 들렸다. 황권이 자신과 저를 싸잡아 우리라고 하는 말이 방희에게 우스웠다.
“방파서와 저는 권세를 다투기는 했지만 그것은 촉왕 전하의 아래에서의 작은 알력다툼일 뿐입니다.”
솔직한 말에 방희는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맞는 말이네.”
“그러나 유비는 아닙니다. 아예 익주 유씨를 전복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그 또한, 맞는 말.”
“서두르셔야 합니다. 기류가 심상치 않습니다. 유비도 가만히 앉아 당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담왕부의 가솔들과 모든 기업을 잃고도 익주까지 살아 돌아온 자일세. 만만히 당하진 않겠지.”
황권은 더욱 목소리를 낮춰 은밀하게 말했다.
“상존, 그리고 그 밑의 사마의, 또… 저의 지낭인 법정, 그들이 유비에게 붙을 것을 저는 염려합니다.”
방희의 목소리도 황권을 따라 낮아졌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가맹관 공략에 따라갔던 그들, 사마의와 법정. 그들의 기류가 미묘합니다. 유비에게 귀부할 것만 같습니다……”
황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은 뻐꾸기 새끼 같은 자들, 오목눈이의 둥지에서 기생하며 자라다가 몸집이 커지면 저와 같이 자란 작은 오목눈이 새끼들을 처단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보다 몸집이 작은 오목눈이 어미의 벌레를 받아먹다가 효용이 없어지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자들입니다. 저는 사마의를, 법정을 믿지 않습니다.”
방희는 긴장의 침을 삼켰다.
“허면 사마의가 상존을, 법정이 그대를 저버릴 것이란 말인가.”
황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역시 오목눈이에 불과한 소인이니까요.”
황권은 더듬거리며 방희의 손을 잡았다.
“유감이지만 방파서도 저와 신세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뻐꾸기 새끼에게 버림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황권의 눈에 독기가 들었다.
“뻐꾸기 새끼가 배반의 눈을 뜨기 전에 일을 저지르시겠습니까?”
방희는 마른 침을 삼켰다.
달 밝은 밤. 나는 신왕부의 내전, 신왕의 좌에 홀로 앉았다. 홀로 앉아 골몰했다. 턱을 괸 채로. 어두운 내전에는 외로운 촛불이 타올라 왕좌만을 밝혔다. 나는 정면의 어둠을 도사렸다.
“아휴, 이 왕귀호로새끼.”
나는 쯧, 혀를 차며 정면의 어둠을 더욱 눈에 힘을 주어 노려보았다. 유비가 귓불을 펄럭이면서 간들어지는 표정으로 아이구, 아이구 중얼거리는 환영이 보였다. 내 얼굴에 열이 화끈화끈 올랐다.
“술을 좀 먹어야겠다.”
나는 내전의 밖으로 소매를 휘적거리며 나갔다. 홀몸노인인 우장군 좌자가 아마 홀로 술을 푸고 있을 것이었다. 오랜만에 늙은 친구랑 잔을 기울여야겠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우장군부를 향하던 중이었다.
“전하!”
걸걸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아찔한 표정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봤다.
“젠장……”
이 야밤에 땀을 뻘뻘 흘리며 검법을 연마하던 춘군이 사내대장부의 걸음으로 나를 향해 뛰어왔다. 그녀는 건강한 팔 근육을 드러내며 나를 보고 히죽거렸다.
“어, 사, 삼왕후……”
“어딜 가십니까?”
“우장군과 술 한 잔 하려고……”
그녀는 솔개가 생쥐를 낚아채듯 확 내 팔목을 붙잡았다.
“그런 늙다리하고 술 마시면 맛이 좋습니까?”
“어, 어……?”
그녀가 잡은 팔목을 살짝 힘을 줘 잡아당기자, 나는 힘없는 미역처럼 바로 그녀의 몸에 밀착했다. 퀴퀴한 땀 냄새가 확 끼쳤다. 여자 땀 냄새는 처음 맡아봤다. 남자랑 다를 바가 없었다. 시영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유 냄새가 났는데… 시영아, 보고 싶다.
“오늘은 신첩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싫어!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잔뜩 기대한 춘군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 잔 하면 몸이 달아오를 텐데……”
춘군은 같잖게 홍조를 띄우고 몸을 배배꼬았다.
“오늘은 전하 마음대로 하세요.”
“뭐, 뭘요……?”
나는 나도 모르게 존댓말을 썼다.
우장군 좌자는 홀로 불콰하게 취해 신왕의 궁전을 갈지자걸음으로 걸었다. 이제 달도 서서히 몸을 감추는 늦은 새벽이었다. 그는 딸꾹거리며 산책을 하다가, 삼왕후의 거처를 지나갔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걸레를 비틀어 짜는 듯한 비명소리에 그렇지 않아도 발그레한 좌자의 뺨이 더욱 밝아졌다.
“젊음이란!”
그는 그렇게 운을 떼고 휘적휘적 걸어 신왕부의 밖으로 나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는 말을 맺었다.
“좋기만 한 건 아니구나.”
그는 저도 모르게 살짝 진저리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