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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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공자왈
나는 그와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사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덜컥 조조 진영의 내밀한 사정을 물으면 입을 굳게 다물 것이 자명했다. 일개 필부를 상대로도 그럴 터인데 조조의 두뇌인 순유라니, 더 말하면 입 아프다. 순유는 입담이 좋은 편이었는데, 별 시답잖은 이야기도 잘 포장해 말하는 탓으로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는 그가 말하는 대로 이끌리다가 차를 세 잔 마실 동안 제대로 된 질문은 해보지도 못하고 접대를 마쳐야만 했다.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차 잘 마셨습니다, 치중.”
그렇게 말하며 유유히 돌아가는 순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탄식했다. 아! 내가 너무 오만해져 있었구나. 소건의 마음을 돌리고 황건적을 깨부수고 공융과의 합병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 하찮은 공적으로 내가 뭐라도 되는 것인 양 굴었구나. 정녕 난세를 꿰뚫은 책사를 상대로는 조무래기에 불과하구나. 나는 고개를 젖힌 채 허탈하게 웃었다. 뒷목이 뻐근해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조조는 공융이 청주자사를 자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순유를 사자로 보냈다. 단순 축하사절이라면 굳이 그 정도의 인물을 청주까지 보낼 까닭이 없다. 게다가 확고한 우위에 있다지만 조조는 도겸과 대규모 회전을 치르고 있다. 핵심 참모인 그를 전장에서 배제하면서까지 청주로 가라고 했다는 것은, 단지 공융을 축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다.
조조는 지금 서주를 거의 손아귀에 쥐었다. 원 역사에서 서주 전역을 손에 넣으려는 순간 여포를 충동질한 진궁의 훼방으로 인해 조조는 여포와 결전을 치르지만, 제 아무리 간교한 조조라 할지라도 그것을 예상할 수는 없었다. 결국 조조의 생각대로라면 연주와 서주를 세력 하에 넣고 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려 할 터다. 그렇다면 어디인가? 서주의 남녘인 강남은 거대한 양자강의 물줄기가 가로막고 있다. 수전에 능하지 않은 조조가 구태여 양자강을 건너는 모험을 강행할 이유가 없다. 연주 북쪽의 기주는 원소의 세력권으로서 그 또한 조조가 탐낼 만한 지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서쪽의 낙양이나 남쪽의 예주, 동북쪽의 우리 청주만 남는다. 그렇다, 지금 조조는 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그 다음 과녁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낙양과 예주는 이렇다 할 군벌이 없지만 청주에는 버젓이 우리가 있다. 보수적으로 간다면 제국의 옛 도읍인 낙양이나 우리가 버티고 있는 청주가 아닌, 황건 잔당이 날뛰고 있는 예주를 노리는 것이 옳다. 그러나 예주를 석권하게 되면 그 남쪽의 강력한 전국제후인 원술과 경계를 맞대게 된다. 게다가 조조는 안정이 아닌 도박을 즐기는 사내다. 지금 청주에 우리가 있기는 하지만 훗날 하북의 패권을 놓고 다툴 맞수로 원소를 염두에 두고 있는 조조는 원소보다 앞서 청주에 발을 들이기를 원할 것이다. 연주와 서주를 차지한 상태에서 청주마저 굴복시킨다면 조조의 세력이 원소와 비등해진다. 게다가 청주는 원소 또한 노리고 있을 터. 낙양은 옛 영화만 간직했을 뿐 여전히 폐허라 천자의 옛 도읍을 사사로이 탐한다는 비난을 감당할 정도의 가치가 없다. 결국 조조의 다음 과녁으로는 이곳, 청주가 유력하다. 그렇기에 핵심 참모인 순유를 청주에 보내어 청주가 과연 순순히 정복당할 지역인지, 아니면 의외의 복병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을지 조조는 확인하고자 한 것.
그래도 마침 막 우리와 공융의 합병이 이루어진 상태라 병사들의 눈빛은 밝고 병장기는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러나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어떤가. 공융은 무른 군자일 따름이고 유헌이나 왕자법 등을 논해 무엇 하겠나. 순유는 그들에게서 호적수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겠지. 왕수가 제법 총명한 편이라고는 하나 조조의 출중한 모사진에 비할 바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그의 관상은 대충 훑어봐서는 준재보다는 둔재에 가깝다. 순유가 청주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정복할 지역으로 조조에게 보고할 공산이 커진 것이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물론 여포라는 변수가 있기는 하지만 원 역사대로 시류가 흘러가리라는 보장도 없다. 불분명한 요행에 기댈 수는 없는 일. 만일 조조가 연주의 기반을 공고히 다지고 연주와 서주의 병마를 이끌고 청주로 온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 결국 조조가 우리를 맘 편히 집어삼키지 못하게 하려면 순유에게 우리가 물렁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날이 밝고 점심 즈음이 되자 나는 곽도와 순유를 오찬에 초청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응양장군 별가 유헌만을 청하고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은 들이지 않았다. 나머지 자리는 왕수와 노구, 영자, 그리고 조자룡을 청해 배석했다. 순유 정도의 명사라면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단편적인 기운만으로도 능히 대강의 면면은 감식할 수 있을 터다. 곽도 또한 간교하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렇지 원소의 일급모사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자이니 그도 다르지 않겠지. 노구, 조자룡 정도면 천하에서 비길 만한 무장들이 많지 않고 왕수 또한 천하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재사는 아니지만 흐름을 읽고 올라탈 줄은 아는 자이니 그들이 가벼이 볼 수만은 없으리라. 딱 하나, 영자의 한없이 애 같은 입만 가만히 있어주었으면 했다.
오찬장에는 제법 둔중한 긴장 내지는 적막이 감돌았다. 내가 우리 측 배석을 위해 쟁쟁한 인선을 해둔 까닭도 있지만 그것은 곁가지에 불과했고, 실상은 원소의 두뇌인 곽도와 조조의 두뇌인 순유가 한 자리에 모인 까닭. 하북의 패업을 굳혀가는 원소와 연주와 서주를 병탄하고 신흥하는 조조, 그리고 이제 막 세 개의 군을 통합한 공융. 경계를 맞댄 세 개의 세력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긴장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곽도와 순유 모두 제 주군들의 일급참모이고, 우리도 따지자면 왕수가 공융의 휘하 중 제일 머리가 비상하고 노구의 찌꺼기들 중에서는 그나마 내가 제일 나으니 우리도 공융·노구의 일급참모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부끄럽지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을 초청했지만 낯빛 하나 눈빛 하나에도 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자리이니 곽도와 순유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임했다.
“제가 괜히 두 분을 한 자리에 불렀나요. 너무들 얼어계신 것 아닙니까.”
내가 부드럽게 말하자 순유가 멋쩍게 웃었다.
“아닙니다. 공칙(公則, 곽도의 자)은 저와 같은 시기에 조정에 출사한 동기입니다. 서로 모시는 주군이 달라 그간 얼굴 볼 일이 없었는데, 제갈치중의 덕으로 이렇게 재회하는군요.”
곽도도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렇습니다. 공달과 저는 함께 조정에 나서서 많은 일을 함께하였는데 지금은 서간조차 주고받는 것도 어렵게 됐으니……”
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내가 구태여 둘을 함께 배석한 것은 나름의 포석이 있는 탓이었다. 나와 순유가 독대한다고 해봤자 순유는 저번처럼 한가로운 사담만 늘어놓다가 자리를 파할 터였다. 왜냐, 나한테선 얻을 게 없거든. 이미 청주의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야 이미 그가 면면을 봐뒀을 터이고 백성들의 속사정은 북해의 관부로 향하는 동안 잘 파악했을 터다. 나에게서는 빼먹을 정보가 없다. 그러니 순유도 구태여 정보를 흘릴 까닭이 없다. 허나 곽도는 다르다. 조조는 원소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원소 또한 그렇다. 그러니 서로 슬쩍 떠보는 정보전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될 터. 시정잡배가 처녀 치마 들추듯이 음흉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오고갈 혀 화살들 사이에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정보들을 주워가면 그만이었다.
한가로이 댁네 따님이 못난 소년을 만나 연애질을 하고 있다며 반농반진의 푸념을 늘어놓던 순유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환담을 나누던 그가 정세를 논하기 시작하자 눈빛 또한 돌변하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외람된 말일지는 모르지만 원기주(원소의 당시 직책은 기주목)가 꼭 내 딸 녀석 같더군, 공칙”
곽도는 허허 웃었으나 심기가 뒤틀린 것이 엿보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태산태수 응소 말일세. 원기주께서 그를 충동하여 우리의 서주진출을 저지하라고 주문했다더구먼. 빼어난 원기주께서 우리를 저지하려 형편없는 응소와 놀아나니 꼭 내 딸아이 같나.”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선으로 뻗는 공세에 곽도는 펄쩍 뛰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굉장한 결례일세. 주공께서는 그런 하찮은 협잡을 일삼으시지 않으시네. 게다가 조연주는 주공의 객장이니 엄연히 주공의 휘하에 있으신 분. 대저 주군이 부하의 뒤를 치는 일이 있다던가.”
이번엔 곽도의 반격이었다. 원소와 조조의 상하관계를 엄정히 명시하여 순유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 순유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체 했지만 표정이 그게 아니었다. 나는 팝콘이라도 안고 와작와작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순유와 곽도는 우리는 안전에도 두지 않고 저들끼리 말을 예리하게 갈아 서로 찔렀다.
“우리 주공은 원술과 도겸, 어부라, 장연의 진공을 일거에 격퇴했네. 헌데 원기주께서는 공손찬과 장연의 내습을 견디지 못하게 크게 흔들렸으니 어찌 우리 주공의 앞에서 떳떳하게 주군 행세를 하겠는가.”
“그럼에도 떳떳하게 주공이 조연주 앞에서 주군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병력과 물자의 손실이 막심해도 여전히 세가 조연주를 압도하기 때문일세. 게다가 조연주는 이번에 서주를 치면서 닥치는 대로 죄 없는 백성들을 죽이고 있으니, 나는 차라리 응소를 겁박하여 조연주의 진공을 막고 싶을 정도라네.”
“아하, 그래서 이번에는 낭야상 소건을 흔들어 조연주의 뒤를 치게 한 게로군?”
원소가 낭야상 소건을 흔들었다? 우리가 태산과 낭야에서 철수한 후 응소와 소건은 각자도생의 길을 택해야 했다. 응소는 조조에게 길을 열어주고 소건은 원소의 압력을 받아 조조의 뒤를 치게 됐구나. 순유의 비아냥거림에 곽도의 얼굴이 벌게졌다.
“되도 않는 망상은 조연주와 그 막료들의 특기인 듯 싶으이.”
“주공께서 담성의 도겸 공략은 조자효(조인)와 하후원양(하후돈)에게 맡기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어 낭야를 치실 걸세. 그때 소건을 잡아다가 족치면 시비곡직을 가릴 수 있겠지.”
뭐라고? 내 낯빛이 창백해졌다.
“지금 조연주께서 낭야를 치신다고 했습니까?”
내 물음에 그제야 우리 청주 사람들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순유는 약간 고개를 숙이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떠나오기 전 구체적인 군략을 논하였으니 아마 지금쯤 낭야의 성문을 두드리고 있을 겁니다.”
“아, 안 돼……”
나는 절망했다. 나는 이 시기의 참혹한 대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참혹하고 슬픈 사건이다. 사건이라는 말로는 덮이지 않는 비극.
서주대학살.
조조가 도겸을 치는 도중에 낭야에 살던 그의 아비 조숭이 살해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 까닭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 도겸이 수세에 몰리자 조조에게 화의를 청하기 위해 그의 아비를 각별한 예우로 전송한 것. 둘째, 수세를 전환하기 위해 조숭을 인질로 붙잡았다가 어떤 변수로 인해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 셋째, 서주에 전란이 벌어지자 부랴부랴 짐을 싸서 아들에게로 피신하는 조숭을, 그의 재물을 탐한 자가 그를 살해하고 재물을 탈취한 것. 어떤 이유로든, 원 역사에서 조숭은 피살된다. 그렇잖아도 조조의 서주 침공은 백성들의 목숨을 가벼이 여겨 함부로 남녀노소를 죽였는데, 조숭의 피살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조조의 광기를 극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광기의 소산이 바로 서주대학살. 시체가 강물을 막아 흐르지 못했다는 기록이 그 참상의 편린을 대변한다. 사람은 물론 가축마저 모조리 죽였다는 희대의 야만이 내가 임한 시대에서는 고이 잠자기를 바랐다. 그런데 나의 시대가 원래의 비극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차라리 조조가 수월하게 낭야를 손에 넣는다면, 그렇게 된다면 다행히 이 비극을 비껴갈 수 있겠지. 나는 제발 조숭이 죽지 않기를 원했다. 조숭의 목숨이 불쌍했고,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낭야에 나의 어미와 나의 연인이 사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낭야의 백성이었다. 그들의 시체가 강물을 막게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때 오찬장으로 문사 여러 명이 급히 들어왔다. 하나는 곽도의 문사고 하나는 순유의 문사고 하나는 청주의 문사였다. 곽도의 문사가 곽도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곽도의 눈이 커졌다. 순유의 문사 또한 순유에게 그리하자 순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또한 청주의 문사가 왕수에게 먼저 말을 전하고 이어 노구에게 전했으며, 이제는 나를 향해 다가와 알지 못하는 말을 알려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슬프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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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열전 11. 곽도(?~205)
중국 후한 말의 인물. 자는 공칙. 곽가와 친척일 가능성이 높다. 순욱, 순유 등과 나란히 조정에 천거되었다. 이후 동향사람 신평과 함께 원소를 섬겼다. 당시 기주목이던 한복을 협박해 원소에게 기주를 양도하게 했다. 이후 원소군의 핵심참모인 저수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러나 조조와의 결전(관도대전)에서 패착을 저지르고 그것을 장합에게 뒤집어씌워 장합이 배신하고 세가 크게 기울어지는 원인이 된다. 이 탓으로 관도대전 이후 곽도의 입지가 대폭 줄어든다. 이때부터 원소의 맏아들인 원담과 교분을 쌓았다. 원담 또한 동생인 원상이 원소의 총애를 받으면서 소외되었다는 점에서 곽도와 궁합이 잘 맞았다. 이후 조조가 원상을 치는 동안 기주를 점거하지만, 이내 조조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원소의 세력이 사분오열되고 종내 멸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