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91
어린 찻잎을 따 맑게 녹차로 우려낸 것을 나눠 마시면서 등애가 나에게 말했다.
“전하, 대촉 전선이 한바탕 소란스러울 법한데 임시로 행궁을 마련하여 친히 지휘하심이 옳지 않습니까?”
등애는 옳다고 표현했지만, 기실 옳다기보다는 내가 으레 그리하였으니 상례를 따르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찻물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고가 이미 익남도독 장료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놓고 도독을 믿지 못하여 고가 전선을 친람하려 든다면 익남도독이 고를 어찌 생각하겠는가.”
나는 찻잔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고더러 합비를 지키라고 내사령(종요)이 직제를 개편한 것이 아니겠나. 불안하여 몸이 단다고 하여 싸움이 터질 때마다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가 아닐 터.”
등애 역시 찻잔을 내려놓고 공손히 손을 모았다.
“과연 그렇습니다.”
“고가 그동안 익남도독을 내놓고 중용하지 못하였으니, 이번에는 확실히 그를 신임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외사령(왕수)으로 하여금 고가 도독에게 전권을 일임하겠노라 누차 강조하여 전언케 하였다.”
“익남도독이 아무래도 성도까지 병탄하기에는 전력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등애를 흘끗 보고 다시 찻잔을 보았다.
“성도까지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영안까지는 나아가야 옳다. 촉왕부를 언제든 침범할 교두보를 마련한다면 놈들이 험한 산세를 믿고 가벼이 굴지 못할 테니까.”
“익남도독이라면 능히 해낼 줄로 압니다.”
나는 씩 웃었다.
“당연한 걸 입 아프게.”
장료의 병력은 허저의 증원까지 합하여 대략 사만. 촉왕부를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놈들의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흠씬 두들겨주기에는 족했다. 나는 아버지 국태공 제갈현에게 특사를 보내 장료의 후방에서 보급이 끊이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달라 강조했다.
기동력에 기반을 둔 전쟁이 될 터였다. 적이 공황에 빠진 틈을 타 단기간에 전선을 돌파하여 적의 턱 밑에 비수를 들이대는 것까지가 목표였다. 그러나 날래지 못하면 도리어 당하고 만다. 적들이 다시 일치단결하여 정신을 차리고 기습을 통해 보급로를 차단한다면, 나의 호장인 장료와 허저를 비롯하여 신왕부의 촉망받는 기린아인 육의와 서성을 단박에 잃고 말 터였다. 그리고 그 밑의 생때같은 사만의 병력까지.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니, 놈들이 그러한 환란을 극복한다면 도리어 나에게 위협이 될 터. 그것을 위해서는 익남도독 장료의 신출귀몰한 기동력과 국태공 제갈현의 안정적인 보급이 필수였다.
홀로 이것저것을 생각하느라 등애와 말없이 차만 홀짝이는 사이에, 시영이 온이의 손을 잡고 입시했다. 시영이 잡은 손을 놓자 온이는 아장아장 걸어 내 앞에 철퍼덕 엎어졌다. 나는 넘어진 줄로 알고 황망히 그 애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시영이 눈을 찡긋거리며 손사래를 쳤다.
“음?”
내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이에 온이는 엎어진 채로 말했다.
“부왕, 소녀 온이 부왕께 문후 여쭈옵나이다. 기체 강녕하시온지요.”
앳된 목소리였지만 발음은 또박또박했다. 그 물음에 그동안 내 머리를 지끈지끈 괴롭혀왔던 잡념이 시원하게 증발해버렸다. 나는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며 웃었다.
“오냐, 오냐 오냐. 네 덕분에 기체가 아주 퍽 굉장히 강녕하다. 너도 강녕하느냐?”
“예, 소녀 부왕의 은택 덕분으로 강녕하나이다.”
왕후와 공주를 접견하느라 몸을 급히 바닥에 깔았던 등애도 온이를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온이를 번쩍 들어 내 팔에 안았다. 코를 마구 비벼주고 시영에게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 아 아니지, 중궁, 온이를 어찌 이렇게도 잘 키우셨소?”
시영은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제 덕인가요, 어디. 이왕후가 잘 낳은 덕택이지요.”
“낳은 덕도 있고 기른 덕도 있는 법이지. 이렇게 예쁘게 기르니 나중에 어떤 놈팡인지는 몰라도 휙 데려가버리면 그 사위란 작자를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시영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혹시 또 아나요. 성왕(원술의 시호)이 전하를 한눈에 마음에 들어 하셨듯이 그런 잘생긴 남아가 온이의 배필이 될지.”
나는 부러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 그런 남아를 찾기란 쉽지 않을 거요. 적어도 명문가의 자제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도련님은 어림없소.”
“전하께서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신첩과 이왕후가 절대로 그런 녀석에게는 온이를 내주지 않을 겁니다.”
나는 시원하게 웃었다.
“아무렴, 누가 중궁을 당하겠소?”
오의의 병력을 제물로 바쳐 시간을 번 유비는 빠른 속도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종착이 촉왕부의 중심인 성도는 아니었다. 유비는 촉왕부의 동북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유비가 띄운 전령은 성도로 향했다.
“촉왕 전하께 보고 드립니다!”
급박한 전령의 표정에 촉왕 유장을 비롯하여 좌우에 도열한 조신들은 전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유장이 전령의 말을 재촉했다.
“속히 아뢰어라.”
전령은 엎드려 유장에게 최악의 전언을 고했다.
“좌장군이 선봉으로 파견한 장군 오의의 병력이 신의 선봉 허저에 의해 격파되었습니다. 이에 도독 장료가 전군을 휘몰아쳐 진격, 전황이 매우 위태롭습니다!”
유장은 왕좌에 붙어있던 엉덩이를 들썩이며 당혹했다.
“뭣이!”
방희와 황권의 얼굴도 흙빛이 되었다. 황권은 예상했던 최악의 범위를 넘어서는 결과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황권의 계획이란, 유비가 승리하지 못하도록 오의와 양회로 하여금 족쇄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비의 원죄를 더욱 숙성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비를 실각시키고 좋았던 옛날, 황권의 무신과 방희의 문신이 아웅다웅하며 백년해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황권은 당황망조하여 중얼거렸다. 어찌하여 오의는 선봉을 자임했는가? 마땅히 몸을 사리고 사려서 유비를 벼랑의 끝으로 밀어냈어야지. 오의는 머리가 굳은 자가 아니거늘, 그리했다는 것은.
“유비가 술수를 쓴 것인가……”
방희 역시 상황이 잘못 돌아가도 한참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게다가 그는 심복 등지를 장료에게 보내 오로지 유비만을 처단하고, 그 이후로는 양국의 화호를 도모하자고 약조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방희가 품었던 본래의 계획, 그 궤도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는 급히 전령을 향해 침을 튀기며 물었다.
“적군은 현재 어디까지 진출하였느냐!”
방희의 물음에 전령이 대답했다.
“영안을 향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황권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장군 엄안(嚴顔)이 지키고 있는 곳입니다… 병력은 대략 일만. 지세는 험하지만 장료가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오래 버티지는 못할 터……”
방희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윗니로 다지며 전령에게 다시 물었다.
“좌장군은 지금 어디 주둔했느냐!”
이 질문에 전령은 해괴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 그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 대답에 촉왕부의 조신들이 일제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이!”
방희는 씩씩거리며 전령을 윽박질렀다.
“대체 그것이 무슨 말이냐! 너는 좌장군이 보낸 전령이 아닌가!”
전령은 쩔쩔맸다.
“마, 맞습니다……”
“헌데 너는 어찌하여 좌장군의 행방을 모른단 말이냐! 전황을 보고했다면 향후 적에 대한 대처를 어찌할 것인가 전언을 했을 것이 아니더냐!”
전령은 고개를 조아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좌, 좌장군께서는 그 부분은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적군이 영안을 향해 몰려온다고만……”
방희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이익! 그것을 말이라고 하는 것이야!”
황권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와중에도 최대한 머리를 식히고 그 내막을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절대 선봉으로 나서지 않았을 오의가 선봉에 나섰다. 여지없이 격파되었다. 신의 장료는 이 여세를 몰아서 영안까지 노린다? 아무리 오의의 병력이 격파되었다 한들 여전히 유비의 본대가 남았을 터.
만일 팔뚝에 힘을 팍 주고 장료와 씨름을 하려 들었다면 이렇듯 적군이 승승장구하며 쉽게 영안까지 진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유비가 정말로 촉왕부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전력으로 장료의 진군을 틀어막고 성도에 전령을 급파하여 증원을 요청했을 터였다.
장료가 영안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유비가 오의를 사지로 내몰고 자신의 본대는 온전히 보존하여 뒤로 물렸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순전히 유비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
“그렇다면 유비는 무엇을 원하고 이런 일을……”
황권의 홀로 고심함은 촉왕부 조신들의 시끄러운 지저귐으로 금방 망쳐지고 말았다. 방희는 급히 촉왕 유장에게 간청했다.
“전하!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영안이 적의 손에 떨어지면 이곳 성도는 적의 눈초리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터, 급히 증원을 파견하여 총력을 다해 적의 진군을 저지해야만 합니다!”
그 주장에 어깃장을 놓을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무신이든 문신이든. 어쨌든 그들은 공히 이곳 성도에 저택을 지니고 전답을 지니고 노비들을 지녔다. 만일 영안이 떨어진다면 천년만년 갈 줄 알았던 그들의 세도가 위태롭게 된다. 그것을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속히 촉왕부의 사내들을 있는 대로 징집하여 그 끔찍한 미래를 불발된 가능성으로 묻어버려야만 했다.
그것은 성도에 가장 큰 저택과 가장 넓은 전답과 가장 많은 노비들을 지닌 유장에게 가장 절실했다. 유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황권에게 명령했다.
“호군 황권은 들으라!”
황권은 우선 유비에 대한 사념은 접어두고 유장을 향해 읍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예, 전하. 하명하십시오.”
“그대에게 전권을 맡기겠다. 그대는 속히 촉왕부의 전군을 동원하여 신의 병력을 저지하도록 하라! 과인에게 일일이 보고할 것 없다. 굵직한 사안만 방파서에게 전달하도록 하라.”
급히 명령을 쏟아낸 유장이 방희를 바라봤다.
“장인께서는 그 굵직한 것들을 임의로 처리하고 그 결과만 과인에게 알리도록 하시오.”
방희는 유장을 향해 몸을 틀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전하.”
유장의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유현덕은 대체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촉 전선의 경과가 속속들이 청금령 유엽을 통해 나에게 보고되었다. 유비가 오의와 양회를 거느리고 장료를 선제공격하였고, 장료는 선봉을 격파하고 그 수장 오의를 참살했으며 패주한 적병을 따라 촉왕부의 강토에 진입했노라는 전언이 당도했다.
나는 유엽의 보고를 듣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의 강노가 일단 촉의 선봉은 수월하게 뚫어냈구려.”
유엽의 보고를 함께 들었던 백각경 가후가 첨언했다.
“유비가 이렇듯 쉽게 뒤로 물러나다니, 필경 또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동감했다.
“백각경의 말씀이 옳소.”
그렇게 말하고 나는 나대로 첨언했다.
“유비의 꿍꿍이속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