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19
“그렇소. 무슨 일인지?”
“길게는 말씀 드리지 못하겠군요. 이걸 읽어주십시오.”
상인은 품 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강호에게 내밀었다. 강호는 물정 모르는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봉투의 겉면에는 조 천자 조조의 옥새가 찍혀 있었다.
“부, 북비의 서찰인가……!”
강호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상인에게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상인은 이미 파장 인파에 스며들어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강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적국의 옥새가 찍힌 서찰을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형님, 불길하외다! 그냥 찢어버리시오!”
사사로이 호형호제하는 두호가 강호에게 조언했다. 틀린 조언이 아니었다. 최근 신왕부에서는 조왕부를 조왕부라 부르는 일을 엄격히 금지했다. 북비, 무조건 북비라는 부름만이 가능했다. 이렇듯 그들을 엄히 경계하는 상황에서 밀서를 받아들다니, 이 사실이 발각되면 구족을 멸할 일이었다. 가뜩이나 출신도 한미한 데다가 사성의 영광과 오수의 혜택을 받은 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통을 했다고 소문이 돌면 죽어도 곱게 죽지 못할 것이었다.
“찢어버리시오!”
“그래, 찢어버려야지.”
강호가 입술을 악물고 찢으려는 찰나, 누군가 그것을 제지했다.
“멈추십시오!”
젊은 목소리였다. 강호와 두호가 그쪽을 바라봤다.
“왕평(王平)!”
왕평은 본디 익주 탕거 사람인데, 일찍이 고아가 되어 외가에 의탁했다가 그도 여의치 않아 서쪽의 이민족들의 땅으로 이주해 살아왔다. 그리하여 비록 글을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완력이 뛰어나고 번뜩이는 기략이 있어 이질적인 성분에도 이민족의 땅에서 우대받았다. 결국 강호와 두호가 신왕부에 귀순할 적에도 함께 넘어와 따랐다. 강호는 그를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의 성품을 아끼기도 했지만, 그의 재주도 아꼈다.
그렇기에 찢지 말라는 그의 만류를 가볍게 듣지 않았다.
“찢지 마십시오. 그것은 도리어 주공을 망치는 길입니다.”
“어째서냐?”
“사람들의 눈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것을 찢어버리면 누군가 수상하게 여기고 왕부에 고변할 터입니다. 차라리 이것을 왕부에 보고하여 처분을 받는 것이 가당할 것입니다.”
“음……”
“신왕께서는 아량이 넓으시니 반드시 이해해줄 것입니다.”
강호가 여기기에 그 말이 옳았다. 그는 조조의 밀서를 주섬주섬 품 안에 넣었다.
“현명한 소년이로군.”
낯선 이가 다가와 말했다. 궁색한 차림에 삿갓을 쓰고 있었다. 키는 큰데, 얼굴이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그 물음에 낯선 이는 삿갓을 슬쩍 들어 잠깐 얼굴을 보여주었다. 강호, 두호, 왕평이 일제히 놀랐다.
“저, 정청령……!”
제갈량은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쉿.”
제갈량의 손짓에 셋은 입을 꾹 다물었다. 강호가 한껏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물었다.
“저, 정청령…… 어인 일이십니까……?”
켕기는 게 있는 탓으로 강호의 목소리는 떨렸다. 제갈량은 편안한 웃음으로 그의 불안감을 불식시켜주었다.
“그것, 북비에게서 온 편지지요?”
부정의 여지가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읽어보셨습니까?”
“아직……”
제갈량은 씩 웃으면서 왕평을 바라봤다. 왕평의 몸이 긴장으로 살짝 경직되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별처럼 밝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은 왕이고, 이름은 평입니다.”
“왕평, 북비의 서찰에는 무어라 쓰여 있을 것 같으냐?”
왕평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저의 주공인 강호를 회유하여 신왕부에 해롭도록 하는 계책이 담겨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옳거니.”
제갈량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는 다시 삿갓을 푹 아래로 내리고 강호에게 말했다.
“북비의 뜻에 철저히 응하도록 하십시오.”
뜻밖의 주문에 강호의 표정이 얼떨떨했다.
“어찌……”
“사방이 트인 곳에서는 길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허면 날이 밝는 대로 정청에 나아가 말씀을 청하겠습니다.”
제갈량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대는 계속 오수를 지켜주십시오. 그대가 나와 통한다는 사실을 북비의 세작이 모르도록.”
이어 그는 손가락을 들어 왕평을 가리켰다.
“평아, 네가 정청으로 와라. 내 너에게 길게 말하겠다.”
왕평은 손을 모아 읍했다.
“예.”
제갈량은 흡족하게 웃고, 다시 강호를 바라봤다.
“낯빛 단속을 잘 하십시오.”
그는 휙 몸을 돌려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강호가 조심스레 그를 붙들었다.
“저, 잠시…….”
“무엇입니까?”
“이것이… 신왕 전하의 뜻입니까……?”
강호는 불안했다. 제갈량은 신왕의 복심인 동시에 꾀주머니였다. 그는 이것이 제갈량의 사사로운 계략이 아니라, 신왕이 직접 명령한 바라는 보증을 얻고 싶었다. 물론 제갈량의 말이 사실이라는 보증이 또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뿐인 보증이나마 얻고 싶었다. 제갈량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왕 전하의 뜻입니다.”
제갈량은 강호를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저만치 멀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적과 일부러 내통하라니…… 강호의 몸에 진저리가 났다.
다음날, 왕평은 정청에 나아가 제갈량과 오래 독대했다. 정청을 나서는 왕평의 표정은 결의에 차있었다.
이왕평의 상인들은 가장 번성한 도시인 합비와 업도를 오갔다. 합비에는 신의 방방곡곡에서 온 물산이 넘쳤고, 업도에는 조의 방방곡곡에서 온 물산이 넘쳤다. 합비와 업도를 오가는 상인들은 엄격한 검문검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양국의 임금들은 상인들의 통행을 전면통제하지는 않았다. 물론 남는 물산을 처분하고 없는 물산을 얻는 이득이 있었으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왕부에서 조 천자 조조를 북비라고 부르고, 조조 역시 이에 격분하여 신왕부를 주적으로 선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양국의 공식적인 통교는 사실상 없었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부단한 통교가 이뤄졌다. 얼굴을 보면 침을 뱉고 싶어지는 사이라도, 중원을 양분한 세력이 아무런 교류가 없을 수 없었다. 그 물밑의 통교를 상인들이 수행해냈다.
제갈찬의 명을 받든 백각령 등애가 비공식 서한을 상인들에게 들려 보내면, 조조 역시 가규를 통해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기에 상인들은 국경을 여러 차례 넘나들며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오수의 일원으로 상당한 재물을 주무르는 강호 역시, 그 자리에 걸맞은 임무를 수행하며 합비와 업도를 오고갔다.
“뭐라고 쓰였습니까, 형님?”
두호는 조조의 밀서를 읽는 강호에게 넌지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강호는 그 짧지 않은 글을 읽는 중간에 서너 차례 침을 삼켰다.
“자기 쪽에 붙으라는데?”
그렇게 말하는 강호의 표정은 잔뜩 얼어있었다.
조조는 서한의 서론에서 그의 감정을 건드렸다.
멀리 업도에서도 그대의 비극적인 이별 소식을 들었노라. 비명에 부인을 잃었다고 들었다. 제갈찬의 창칼에 죽었다고 들었다. 제갈찬의 흉악무도함에 짐의 이빨이 시리다. 그대의 슬픔이 이곳 업도까지 전해진 듯하다. 두견새 울음이 유난히 구슬프다. 사나이가 떨쳐 일어나 한 목숨을 사는데, 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음식을 먹고 똥오줌을 갈기기 위해 삶은 아니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함)는 필부의 몫이 아니나, 수신제가(修身齊家,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의 질서를 가지런히 함)는 필부의 몫이다. 그대는 웅걸이 아니요 다만 필부이다. 그런 그대는 수신제가의 사명을 지녔다. 그대는 제갈찬의 창칼에 부인을 잃음으로써 제가에 실패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나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수신에마저 실패하려 하느뇨?
“수신에마저 실패하다니, 이렇게 떵떵거리고 사는데!”
여기까지 읽은 두호가 툴툴거렸다.
어찌하여 원수가 내리는 술과 고기를 먹고, 원수가 내리는 벼슬을 받고, 원수가 내리는 성을 쓰는가? 그것이 정녕 사내가 살아가는 길인가? 그대의 육신은 살지고 마음은 즐거울지 모르나 실은 그대는 그대를 스스로 죽이고 있다. 독에 가라앉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구천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그대의 부인을 생각하라. 부인을 잊고 원수가 제공하는 안락에 젖다니, 어찌 이를 수신이라 하겠는가. 도리어 망신이다.
두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짐과 함께하자. 짐은 그대의 원수를 이길 만한 힘이 있다. 짐을 도와라. 짐을 도와 치국평천하하고 원수를 갚아 수신제가마저 이루라. 어찌 망설임이 있을 수 있는가? 만일 짐의 판단에 동감한다면, 업도로 올 적에 짐을 알현토록 하라.
서한을 다 읽은 강호의 표정이 음울해졌다. 그의 목울대는 울음을 참느라 연신 꿀렁거렸다. 그는 한숨을 탁 쉬며 등불에 조조의 밀서를 불태웠다. 밝은 불똥이 튀어 오르다가 이내 사라졌다.
“평아.”
강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왕평을 불렀다. 왕평은 한 발짝 강호에게 가까이 가며 고개를 숙였다.
“예, 주공.”
“정청령께서 복안을 일러주셨느냐?”
“예, 주공.”
“북비를 해치고 신왕 전하를 도울 복안이더냐?”
“예, 주공.”
“그렇느냐.”
강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네 생각을 묻자.”
왕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나는 장기판의 말이다. 말 중에서도 제일 하찮은 졸이다. 그러나 나는 초의 졸이 될 수도, 한의 졸이 될 수도 있느니라. 그것이 지금 내가 쥔 유일한 칼이구나. 누구를 해칠지 결정할 수 있는, 심지어 나까지 해칠 수 있는 칼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