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41
왕수는 낙준이 달갑지 않았다.
“장강 일대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소.”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습니다.”
“합비의 상황도 무척 안 좋을 것을 알고 있소만.”
왕수는 낙준의 속을 짐작하고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 자가 적선을 바라는구나. 그의 짐작은 옳았다.
“황궁의 상황이 지극히 궁핍해졌소. 신왕께서 몇 차례의 정기적인 조공을 중단했소이다. 아무리 합비의 상황이 어렵다 하나 군신의 예를 저버려서야 되겠소이까? 개자추(介子推)가 진문공(晉文公)을 섬기는 지극함까지 바라지는 않소만, 그럼에도 군신의 의리가 흐트러질 정도로 무심해서야 되겠소?”
왕수는 낙준이 아주 적절한 예화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진헌공에 의해 축출된 진문공이 아주 어려워 배를 곯게 되었을 때, 그의 신하 개자추가 제 허벅지 살을 베어 진문공의 주림을 면해주었다. 그런데 진문공은 개자추를 어찌 대하였는가? 훗날 군주의 자리에 오르고서도 진문공은 개자추에게 어떠한 벼슬도 내리지 않았다. 개자추는 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고, 이를 후회한 진문공은 거듭 하산을 권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결국 진문공은 산에다 불을 지르고 개자추는 그대로 타죽었다는 고사다. 그리하여 이 개자추를 추모하기 위해 찬 음식을 먹는 날이 바로 한식(寒食)인 것이다.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무심하였듯, 아무리 극진한 예의로 섬겨봤자 유총이 제갈찬에게 무심할 것이다. 왕수는 속으로 낙준의 말을 비웃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자제했다. 어쨌든 정해진 조공을 사정상 중단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 점은 참으로 송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합비를 비롯한 신왕부의 상황이 지난합니다. 신왕부의 백성 역시 천자의 백성이 아닙니까? 그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기에 그들을 구휼코자 천자께 헌납할 물산을 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천자는 백성의 어버이이니 해량하실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허어, 그러나 어버이가 자식을 생각하듯 자식도 어버이를 생각해야 하는 법이오. 이른바 군부일체(君父一體)이니, 신왕께는 천자가 임금이며 아비입니다. 아비께서 굶고 계시거늘 어찌 자식은 제 자식만 가엾이 여긴단 말이오?”
왕수는 당장 이 대화를 종결하고 싶었다. 그럴 듯한 화법에 말을 담아서 그랬지, 생떼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양곡으로 잔뜩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와중에 송경까지 몽니를 부리니 절로 두통이 올랐다.
“신왕께 품신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조공을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수로서는 모범답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낙준에게는 모범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일자와 조공의 물목을 약속해주시오. 조속한 시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두루뭉술한 화법이 아니오?”
왕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일은 제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잖습니까. 신왕께 품신하여 되는 대로 송경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동어반복에 낙준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
“신왕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자께 사섭을 교지공에 봉하라 주청을 하면서 마땅한 책무는 저버리니 참으로 목불인견이올시다. 천자께서 너른 마음으로 해량하셨지만 이 어찌 묵과할 수 있겠소이까.”
왕수의 귀에는 어줍지 않게 들렸다. 나아가 주제넘은 소리로 들렸다. 왕수는 낙준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며 눈빛을 쏘았다. 낙준도 지지 않고 버텼다.
“묵과할 수 있겠냐고 말씀하셨습니까?”
왕수의 미간에 주름이 단단히 잡혔다.
“지금까지 신왕 전하께서는 당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심으로 참람한 일들을 묵과해오셨습니다.”
그의 표정은 절제된 분노로 가득 찼다.
“신왕께서 묵과한 만큼 당신도 묵과하십시오.”
왕수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의 쥔 주먹이 살짝 떨렸다.
“묵과하지 못하시겠다면 묵과하지 마십시오. 허면, 신왕께서도 더 묵과하지 않으실 겁니다.”
왕수는 낙준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 자리를 떴다. 낙준은 왕수가 떠나고도 한참 자리를 지켰다. 그는 수치심과 증오심으로 점철된 눈빛으로 왕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왕수는 사섭과의 교섭에 들어갔다. 왕수가 먼저 교지공으로 책봉한다는 칙서를 들이밀고 그 대가로 양곡을 요구하니, 사섭은 기선이 제압된 채로 교섭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양곡을 거부하게 되면, 자신을 교지공에 책봉하도록 한 신왕의 배려를 무시한 것이 된다. 배려를 무시하면 증오가 된다. 사섭으로서는 신왕부의 증오를 사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중원의 패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교주의 지배권을 인정받고 주변의 이민족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면 그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교지공의 책봉도 물리고 양곡도 내주지 않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신왕의 배려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도 사정이 좋지만은 않으니, 양곡을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일은 어렵다.”
사섭이 절충안을 제시하자, 왕수도 받아들였다.
“물론 그렇습니다. 교지공께서 부족한 물목을 일러주시면 최대한 맞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으음…… 세부적인 논의는 내 휘하와 진행하도록 해보시게. 우리로서도 신왕과의 교린은 중요한 문제이니 가능한 협조하도록 하겠네. 신왕께서는 지금껏 우리를 후히 대우해주셨으니 그대도 만족할 만한 교섭이 되도록 노력하겠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은 비록 신왕부가 환란에 처하여 교지공께 청탁을 하는 입장이나, 훗날 이 재앙이 지나가면 신왕께서는 반드시 받은 것 이상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사섭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왕께서는 신왕이시기 전에 화평자를 자임하시지 않았는가. 나의 영지에도 화평도를 받드는 이들이 많네. 모쪼록 양측이 양보하고 배려하여 좋은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군.”
“교지공의 따뜻한 말씀에 신왕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허허……”
자신을 꼬박꼬박 교지공이라고 부르는 왕수의 말에 사섭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느낌이었다. 자신을 교지공이라고 일컬을 때마다 명치가 쿡쿡 쑤셨다.
왕수는 복귀하여 나에게 보고를 올렸다. 군마 삼천 필과 금, 은, 쇠 등속을 제공하고 새로이 건설할 교지공부를 짓는 데 필요한 기술자와 인력을 보내준다면 결손분의 이 할에 달하는 양곡을 출연하겠다고 했다.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대신들의 사재출연으로 약 일 할을 메울 수 있었고, 강호를 압박하여 재물을 내놓게 하니 이왕평의 몇몇 상인들이 이에 동조하여 쌓아두었던 양곡을 털어놓았다. 이것이 다시 일 할이 되었다.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어 스무 배까지 뛰었던 쌀값이 평시의 서너 배 정도로 하락했고, 통재대부 부손이 주도적으로 이 쌀들을 사들여 구휼미로 충당하여 다시 일 할을 메웠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절반의 결손이었다.
나는 백각령 유순을 소환했다. 절반의 결손은 익주가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들에게 부담을 요구해야 했는데, 촉왕 유장의 세자인 유순이야말로 이 임무에 적임이었다.
“백각령.”
내가 부르자 유순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예, 전하.”
“지금은 백각령이 아니라 촉왕의 세자에게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소. 고가 굳이 이르지 않아도 세자 또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유순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신료들 사이에서 의논이 된 일이옵니다.”
“부탁 좀 하겠소.”
유순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전하, 물론 익주가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이 사리에 닿는 일입니다. 하오나 부족분의 절반씩이나 익주에 부담하는 것은 익주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입니다.”
나는 최대한 달래는 투로 그를 대했다.
“왜 모르겠소? 그러나 익주가 해주지 않으면 다른 곳의 백성들이 더욱 큰 고통을 겪소. 세자는 이 참극을 방관할 작정이오?”
“그것은 아닙니다만……”
“고가 친서를 작성하여 익주자사 동화에게 보냈소. 동화 역시 고의 고충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소. 세자는 익주로 가서 세자의 인덕으로 이 나라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시구려. 세자는 능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허면……”
유순이 조심스레 운을 떼자, 나는 흔쾌한 승낙을 기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오.”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서촉도독부를 해체하고 그곳을 촉왕부의 직할로 삼아주십시오.”
오, 이것 봐라?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나를 상대로 협상을 하자는 말이었다. 얼굴이 확 뜨거워지면서 분노가 꿈틀거렸지만 나는 억눌렀다.
“그것이 가뭄을 해결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소?”
유순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익주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면 반드시 토족들의 불만이 끓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촉을 병탄하신 이후 그렇지 않아도 억눌렸던 토족들이 이번 일로 크게 반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촉왕부와 토족들의 자치권을 확대하면……”
나는 찌릿 눈빛을 쐈다.
“잠깐, 지금 억눌렸다고 했소?”
“아, 그, 그게……”
목덜미를 물었다.
“고가 촉의 토족들을 억눌렀는가?”
“전하, 신은 그러한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오라……”
나는 목덜미를 놔줄 의향이 없었다.
“똑똑히 들으시오, 세자. 고가 입촉할 때에 한 명의 토족이라도 숙청했소? 경의 아비이자 고의 적이었던 촉왕을 고가 죽이거나 유폐하였소? 지금도 촉왕께서는 성도에서 왕의 노릇을 하고 계시오. 참으로 기가 막히구려. 억눌려? 대체 누가 억눌렸다는 것이오?”
“전하, 신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고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감히 신하가 임금의 입을 막고 제 말을 외는가!”
유순은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소, 송구합니다……!”
유순의 시도는 나쁘지 않았으나, 방법이 틀려먹었다. 이런 위험한 거래는 직접 나에게 시도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정청령 제갈량에게 걸었어야 옳았다. 그는 이번 가뭄에 익주가 협조하는 대가로 촉왕부의 권력을 돋워보려고 한 모양이나, 방법이 틀려먹었다. 완전히 틀려먹었다.
기실 오만 가지 일을 다 겪은 나로서는 유순의 말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으나, 이 호재를 그냥 놓칠 정도로 호인은 아니었다. 나는 부러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신하가 임금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 드는가!”
“신이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나는 그의 읍소에 응답하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순은 몸을 와들와들 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청령 제갈량에게 말했다.
“당장 청금령 유엽을 불러.”
“백각령 유순이 백각경의 밑에서 정치를 어설프게 배웠군요.”
“같은 백각이라고 백각경답지 않게 싸고 돌았던 모양이지. 이번에는 내가 호되게 가르쳐줘야겠다.”
“청금령께 고하여 당장 백각령 유순의 죄과를 감찰하고 처분을 내리게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제갈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분이야 유엽이 알아서 잘 해주겠지?”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대가로 익주를 압박하는 데 앞장을 서도록 말이지요?”
세련된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사법거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금령 유엽이 주관하여 유순의 불충을 엄히 질타했다. 정청의 대신들도 더욱 목소리를 드높여 유순을 공격했다. 신왕 제갈찬이 친히 청금령에게 유순의 징계를 명령한 만큼, 그들에게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컹컹 짖어대는 것이 신왕의 의지라고 확인했으니까. 유순은 참담한 표정의 얼굴을 푹 숙인 채로 유구무언이었다. 가후는 잠잠한 표정이었지만, 속은 폭풍우 같은 분노에 휩싸여있을 것이라 제갈량은 확신했다.
“백각령 유순! 어찌 그리도 방자하였소? 전하께서는 크게 진노하시며 본관에게 그대의 징벌을 명하셨소이다!”
유엽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꾸짖자, 유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입이 열 개라도 올릴 말씀이 없소이다.”
“전하께서는 지극한 분노에도 친히 추국하지 않으시고 본관으로 하여금 나라의 율법에 준거하여 다스리게 하셨소이다. 전하의 자애와 영명하심에 그대는 감사하고 더욱 부끄러워하여야 할 것이오.”
유순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유엽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