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44
가후는 냉소를 지었다.
“제 조언은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전하 마음의 문제입니다.”
공융이 빈손으로 돌아가자, 유총은 이를 갈았다. 공융은 유총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제갈찬이 입에 담았던 거친 언어들을 최대한으로 순화해 전달했다. 그렇게 순화된 언어들도 유총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천자가 굶주리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허울뿐이라지만,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외면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쌀 한 톨도 내주지 않았다는 것이지.”
유총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분노를 억눌렀다. 승상 화흠이 무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굶주림은 노인에게 치명적이었다.
“군신의 의리를 희생하여 관민의 의리를 도모한 것입니다.”
낙준이 화흠의 말을 보충했다.
“백성에게서 거두어간 양곡을 천자께 헌납하면, 그렇지 않아도 악화된 민심을 더더욱 배신하는 행동이니까요.”
유총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고작 그런 것이 제후가 천자를 저버릴 명분이 되는가?”
“명분을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제갈찬의 실리적 선택을 말씀드린 것뿐이죠.”
“젠장!”
유총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굶주린 노인들은 천자의 분노를 제어할 여력이 없었다. 화흠, 관녕, 왕랑은 풀린 눈을 껌뻑거릴 뿐 더 말하지 않았다.
마량이 나서서 진언했다.
“폐하, 신왕의 불충은 다만 가뭄에만 유효하지 않을 겁니다. 쌀 몇 가마를 제공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의 균열은 앞으로의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은혜는 금방 잊히지만 원수는 영원하다. 신왕 제갈찬이 천자 유총에게 양곡을 제공하지 않았단 사실은 극복할 수 없는 악업이 될 터였다.
낙준이 유비를 비호했을 때도, 신왕 제갈찬은 이에 보복을 감행했지만 예의의 틀을 잊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예의가 실종되었다. 군신의 관계로 이어진 동맹의 암묵적인 파기를 의미했다.
이제 모든 관계에 있어 신왕 제갈찬과 천자 유총은 불신을 고정된 상수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유총이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용하겠다 공언을 해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될 터.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유총은 시름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량은 말을 이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천자께서는 신왕부에 진 빚을 청산하신 겁니다. 이제 단독행동에 나설 수 있습니다.”
“단독행동이라니.”
“지금까지 폐하의 일거수일투족은 제갈찬에 메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갈찬이 폐하를 옭아맨 사슬을 스스로 포기하였으니, 천자께서는 마음껏 자유로운 입장을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서가 눈을 빛냈다.
“계상(마량의 字)의 진언이 옳습니다.”
“으음……”
서서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신왕이 이렇듯 방자한 것은, 천자께서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이제는 다릅니다. 천자께서 신왕을 몰락시킬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마량이 서서의 말을 받았다.
“폐하의 땅은 제갈찬의 땅에 둘러져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갈찬은 폐하를 입속의 혀처럼 여겨 이다지도 무례하였지만, 입속의 혀가 얼마든지 입속의 가시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유총은 마량의 말을 곱씹었다.
“입속의 가시라……”
천자의 입이 오랜만에 웃었다. 얼마나 짜릿한 상상인가. 제갈찬의 연약한 입속을 뾰족한 가시로 찔러버린다니.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고통에 날뛰는 제갈찬을 상상하니, 오줌이 찔끔 나올 정도로 짜릿했다.
유순은 익주에 도착했다. 익주의 동쪽 관문 역할을 하는 백제성에 다다랐다. 옛날의 역적인 공손술이 이곳에서 흰 용을 보고 반역을 결심한 지역이었다. 유순은 자연스럽게 역적 공손술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불길했다.
“어서 오시우.”
삼파도독 좌자가 유순을 맞이했다. 품계는 같았으나 유순은 촉왕부의 세자이므로 좌자가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잔뜩 먹구름이 낀 유순의 얼굴을 보고 좌자는 웃었다.
“너무 그렇게 죽상 하지 마시우. 허면 될 일도 안 된다니까.”
“그건 알지만……”
유순은 좌자의 말을 듣고 웃음을 지어봤지만 억지스러웠다.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신왕의 고민이 깊을 것이우. 안 봐도 알지. 부디 백각령이 전하를 많이 도와주시우.”
“노력해보지요……”
좌자는 입맛을 쩝 다시며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파란 하늘이 질리는 건 생전 처음이군.”
유순은 삼파도독 좌자의 호위를 받아 서촉도독부로 들어갔다. 아비인 촉왕 유장과 오랜만에 재회했다. 유쾌한 계기가 아닌 것이 부자는 씁쓸했다.
“토족들과 차분히 얘기를 나눠야겠습니다.”
“네가 오기 전에 내가 익주자사 동화와 회담을 가졌다.”
유장으로서도 이 문제는 중요했다. 신왕 제갈찬이 유장을 그와 동등한 눈높이로 대하면서 촉에 남겨둔 것은 그저 그가 자애로운 탓만은 아니었다. 제갈찬은 그 대가를 원했다. 토족들의 입김이 강한 익주에 촉왕부를 세워 적절히 견제하는 한편, 합비 중앙에서 익주에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는 데 혁혁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만일 나라의 환란을 당한 이때, 제대로 구실하지 못한다면 다리를 절룩거리는 사냥개의 취급을 당할지도 몰랐다. 절름발이 사냥개의 마지막 충정은 솥에 몸을 던져 주인에게 살코기를 먹이는 것이다.
“유재(幼宰, 동화의 자)는 난색을 표했다. 쉽지 않다고 했어.”
“허나 신왕의 명령을 그로서도 감히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겠지. 그러나 신왕의 요구가 과중하다고 털어놓았다. 유재 스스로는 동의할 수 있어도 다른 토족들이 그 정도의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신왕 제갈찬은 익주자사 동화의 협조를 필요로 했지만, 익주자사 동화 역시 다른 토족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또한 동화는 제갈찬의 요구를 최대한 방어해낼 필요가 있었다. 동화가 익주자사에 올라 터줏대감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은 압도적인 토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족들이 동화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것. 동화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토족들은 그에게 내주었던 신임을 가차 없이 거두어들일 터였다.
“내일 제가 동화를 만나서 결판을 내겠습니다.”
“우선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음식을 배불리 먹고 잠을 푹 자두도록 하여라. 수고했다.”
유장은 긴장감으로 뻣뻣해진 유순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관우는 그야말로 쾌진격했다. 초기 대응에 실패한 예주도독 고순은 압도적인 완력에 밀려버렸다. 황하 이북의 모든 땅이 관우의 손에 넘어갔다. 신왕 제갈찬에게 빼앗겼던 만큼을 만회하지는 못했지만, 단기간에 여러 고을을 석권하는 관우의 수완은 발군이었다. 관우는 더욱 적극적으로 군량을 풀어 백성들을 먹였다. 백성들의 이탈은 가속화되었고, 어떤 고을에서는 백성들이 현령을 죽이고 통째로 관우에게 제 고장을 넘겼다. 귀순한 백성들을 즉석에서 병사로 징발했다. 백성들은 굶어죽으나 창칼에 찔려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었다. 쓸 만한 사내들이 관우의 병력이 되어 자신들이 섬기던 치들을 도륙했다.
“군량 제공은 여기까지다.”
관우는 적절한 시점에서 군량의 반출을 중단했다. 그러나 관성이 남아있어서 여전히 백성들의 이탈은 이어졌다. 이미 예주의 양곡을 거둬 신왕부의 모든 백성을 먹이는 것에 불만이 팽배했던 백성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지방관을 죽이고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배곯는 농민인 아비가 관군인 아들을 설득하여 반란에 동조하도록 했다.
“맏공자(관평)께서 하(河, 황하)를 건너 관도를 제압했습니다.”
위연이 보고하자, 관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도는 중요한 거점이다. 놈들의 타격이 작지 않을 것이다.”
“장정들이 자원으로 사졸이 되기를 청했습니다. 일만 오천 가량이 늠구후(관우)의 수족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싸움는 데는 어두운 자들이겠으나 쓸모가 많을 것이다. 잘 먹여주어라.”
“옛.”
“합비의 움직임은 없는가?”
“아직 고민하고 있는 듯합니다.”
“오래 머뭇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항상 합비의 동향을 잘 살피도록 하라.”
“존명.”
위연은 읍하며 실실 웃었다. 관우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뭐가 좋다고 그리 웃느냐?”
“오랜만에 제갈찬 녀석한테 제대로 응수하는 것 같아 즐거워서 그럽니다.”
“자만하지 말라. 판은 순식간에 뒤집히기 마련이다.”
“옛!”
각지의 지방관들이 저마다의 성의를 합비에 표했다. 월주자사 회계공 반림과 강동도독 오공 제갈근은 직접 합비를 내방하여 나를 위로했다. 기실 위로가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백성들이었지만, 나는 백성들을 대변하여 그들의 위로를 받았다.
제갈근이 그렇지 않아도 축 처진 눈매를 더욱 내리깔며 나에게 말했다.
“신왕, 얼마나 시름이 깊으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신왕의 곳간을 미곡으로 꼭꼭 채우고 싶지만 강동의 사정도 좋지 않습니다. 다만 다행인 것은 강(江, 양자강)의 하류에서 고기가 많이 잡혀 어포를 만들었으니 이것이라도 요긴하게 쓰시기를 바랍니다.”
쌀이 없으면 물고기를 먹으면 되지, 뭐 그런 건가. 물론 배고픈 자들을 모두 배불리 먹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충분히 도움이 될 정도는 되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관우가 북방에서 날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악랄하기 짝이 없는 위인입니다.”
“답답한 노릇이지요. 예주도독이 힘쓰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고 합니다. 대책을 고심 중입니다.”
제갈근과 나란히 앉은 반림도 나를 위로했다.
“도움이 못 돼서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신왕.”
“월주의 상황도 매우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듯 몸소 방문해주시니 이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칡을 대량으로 캐서 가져왔습니다. 꺼진 배를 불리는 데는 효험이 있으니 부디 잘 써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가루를 내서 국수를 만들어먹도록 해야겠군요. 고맙습니다.”
그때 우리 셋이 이야기를 나누는 방 안으로 공이 데구루루 굴러 들어왔다.
“응?”
나는 그 공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 공?
“아이고, 소, 송구합니다!”
늙은 시녀 하나가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나에게 사죄했다. 단이를 도맡아 기르는 시녀였다. 나는 최대한 자애로운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괜찮네. 어서 몸을 바로 하시게. 삼왕후가 말하기를 그대의 허리가 성치 못하다고 했네. 몸을 잘 간수해야 원자도 잘 기르지 않겠는가?”
“황송하나이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