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45
“단이 녀석, 궁내에서 공놀이를 하다니 괘씸하군.”
내가 툴툴거리자, 제갈근이 난처하게 웃었다.
“원자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신왕. 원자께서 각이에게 합비궁을 구경시켜주던 모양이더이다.”
“각이가 왔습니까?”
“예.”
각이는 제갈근의 아들인 제갈각(諸葛恪)을 말했다. 나이는 단이보다 몇 살 많았지만 조무래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갈자유(제갈근)의 아들이 당대의 영재라고 추켜세우는 말들이 천하에 파다했다. 나는 못내 그 평판이 단이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샘이 나기도 했었다.
“오랫동안 각이를 보지 못했는데, 만나봐야겠군요. 각이를 들라하라.”
내 명령에 내 아들 단이와 내 조카 각이가 나란히 서서 허리를 숙였다. 사실 허리를 숙인 것은 제갈각이 먼저였다. 단이는 그런 제갈각을 보고도 멀뚱멀뚱 서있기만 하니, 제갈각이 점잖게 그에게 속삭였다.
“원자, 예를 갖춰야지요.”
“응? 그래.”
그제야 건성으로 허리를 숙이는 단이였던 것이다. 아비로서 속이 타들어갔다.
“오공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신왕 전하를 뵙습니다.”
앳된 목소리는 아주 공손한 예법으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특했다.
“사사로이는 네 당숙이 되질 않으냐. 편히 대하여라.”
“어찌 그러겠습니까. 사사로운 인연보다 군신의 의리가 앞서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갸륵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바라보다가, 넋 놓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는 단이를 가볍게 질책했다.
“오공은 네 당숙이 되신다. 어찌하여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이냐?”
단이가 겁먹은 표정으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제갈각이 그를 변호했다.
“전하, 원자께서는 장차 전하를 이을 분이시니 함부로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공은 비록 제 아비이고 원자의 당숙이나 차후 원자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다만 신하가 될 뿐입니다. 이를 해량하여주십시오.”
제갈각의 말을 제갈근이 받았다.
“그렇습니다, 신왕. 너무 분개하지 마십시오.”
제갈각의 총명함이 부각될수록 단이의 미진함이 돋보여서 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되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익주자사께서는 잘 생각을 하셔야 하오. 신왕께서는 어떻게든 토족들로부터 양곡을 얻어내실 것이오. 차라리 흔쾌히 응하는 것이 토족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오.”
동화는 한숨을 팍 쉬었다.
“제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세자께서도 익히 아시겠지만 저들은 당장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게다가 개중 하나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뭐라 말이오?”
“익주를 급할 때 꺼내먹는 쌀 주머니쯤으로 여긴다면 곤란하다. 익주는 익주일 뿐이다.”
동화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합비보다 서량이 가깝다는 걸 우리가 모르지 않는다.”
유순의 표정이 뒤틀렸다. 반역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동화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송경과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소식이 익주에도 파다합니다. 게다가 관우가 황하 이북의 땅을 모조리 취하여 그 기세가 등등하다는 것 또한 압니다.”
“그래서, 그들에 호응하여 반란이라도 일으키겠다는 말씀이오?”
동화는 쓴웃음을 지었다.
“본관이 그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민심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말이올시다.”
“아무리 신왕부가 가뭄으로 여념이 없다 하나 토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가볍게 제압할 것이오. 게다가 서촉도독과 삼파도독이 눈을 번뜩이고 있는데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소?”
“익주자사 직할의 병력이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서촉도독과 삼파도독의 산하 장군들은 대개가 익주의 토족 출신입니다. 만일 반란이 일어난다면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유순이 항의하려는 찰나 동화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본관은 반란에 가담할 의사가 없소이다. 아직은.”
아직은……? 유순은 입술을 악물었다.
“그렇다고 해서 신왕부를 섬기는 우리가 모든 부담을 거부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는데, 익주가 쌀 백오십만 섬과 콩 삼십만 섬, 기장 삼십만 섬, 묵은 보리 십만 섬을 부담해줬으면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소이다.”
“백오십만 섬은 과합니다. 쌀 삼십만 섬과 기장과 조 십만 섬, 도합 사십만 섬을 합비로 보내겠습니다.”
터무니없는 후려치기였다. 유순은 딱 잘라 거절했다.
“그것으로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소.”
동화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이상이라면 저희의 정권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익주의 정권은 신왕 전하께 속하고 촉왕 전하께서 대리하고 계시오.”
“명분은 집어치우십시오. 그것이 아니란 걸 세자도 알고 있질 않습니까?”
“정녕 역도를 걸으려 하는가!”
“우리가 걸으려는 것은 충신의 길도, 반역의 길도 아닙니다. 다만 죽지 않고 살아가는, 생도지방(生道之方)을 염려할 뿐입니다.”
“신왕께 적대하고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모르오?”
“신왕 전하의 요구는 차라리 죽으라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전하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에게 남은 것은 멸망뿐입니다.”
유순은 눈빛을 벼렸다.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오, 익주자사.”
“합당한 명령이 아닙니다.”
“명령에 합당과 부당은 없소. 오로지 복종만 있을 뿐.”
동화는 입술을 비틀었다.
“왜 없습니까? 신왕께서는 왜 구태여 백각령이시자 촉왕부의 세자이신 그대를 익주로 보내셨을까요? 스스로 여기시기에도 부당한 명령이기 때문 아닙니까?”
“말씀을 가려 하시오.”
“그 말, 그대로 신왕께 되돌려드리고 싶군요. 명령을 가려 하셨어야 했습니다.”
“이보시오, 익주자사……!”
동화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다.
“세자, 이리도 협상을 못하십니까.”
“뭐, 뭐요?”
동화는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언성을 높였다.
“신왕 전하의 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본관의 체면은 어찌 되겠습니까? 익주에서 상당한 출혈을 감수할 만한 대가를 치러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유순은 섣불리 그 대가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제갈찬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무너져버린 경험이 그의 뇌리에 생생했다.
“허면… 무엇을 내놓으면 그대가 신왕의 명령을 이행하겠소?”
“그것은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한 시가 급한 일이오! 뭉개고 시간을 지체할수록 신왕의 진노가 끓어오를 터, 대체 그대는 무슨 배짱으로 신왕을 상대로 그렇듯 떳떳하단 말이오?”
“떳떳한 것이 아닙니다. 처절한 것입니다. 살 궁리를 신중하고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니까요.”
유순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량왕부, 천수군.
“세자빈이 또 밥상을 엎었소……?”
량왕의 세자 마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법정에게 말했다. 법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잘 넘기지 못하셔서 죽을 올렸는데 그마저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뜨거운 죽을 엎어 시녀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마초는 이마를 짚었다.
“미칠 노릇이군.”
제갈근의 딸이 제갈찬의 딸로 둔갑하여 화평공주에 봉해지고, 량과 신 양국의 화호를 위해 먼 땅으로 팔려간 그녀는 필연적으로 서량에 적응하지 못했다.
량왕 마등은 양국의 화호를 해치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녀를 견뎌냈다. 서량 사내의 기질대로라면 벌써 돌려보냈을 터였다. 그는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런 충동을 느꼈으나, 정권을 양분한 상존, 정확히 말하면 사마의의 뜻에 의해 자신의 뜻을 꺾어야만 했다.
마초와 화평공주 사이의 합궁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마등은 단 한 번도 화평공주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화평공주는 스스로 한 발자국도 제 침소를 벗어나지 않았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고 마시고 잤다.
본디 성정이 억센 량왕부의 시녀들, 내관들은 모였다 하면 화평공주의 뒷담화로 열을 올렸다. 량왕부의 불만이 아래 위를 가리지 않고 고조되었다.
량왕 마등은 어두운 표정으로 상존, 사마의와 담화를 나눴다. 상존은 양주자사로서, 량왕 마등과 정권을 양분한 집정대신이었다. 마등은 그를 은나라의 이윤에 비유했다.
은나라의 탕왕 시대 전설적인 재상으로, 당시 약소국이었던 은나라를 이끌어 하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이었다. 탕왕의 사후, 은왕에 즉위한 장손 태갑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윤은 왕위에 오른 태갑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그를 3년 간 쫓아내고 대신들과 더불어 정사를 돌봤다. 이때의 정치를 공화집정이라고 불렀다. 태갑은 3년 뒤 다시 이윤에 의해 초빙되어 선정을 베풀게 된다.
그러니까 상존이 이윤이면 마등이 그에 의해 쫓겨난 태갑이 되는 것인데, 마등이 상존을 이윤에 비유한 것은 도리어 이윤이 되지 말라는 무언의 부드러운 경고였다. 그러는 한편 포악한 태갑을 가르쳐 성군이 되게 한 이윤에 비한 것은, 서량의 사나운 사내인 자신을 가르치고 도와 성군이 되게 해달라는 호의 섞인 손짓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량왕부의 권력을 둘로 나누어 가진 상존이기에 마등으로서는 그를 잘 대우하고자 했다.
어차피 상존은 어리석은 자, 그 휘하의 사마의와 법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준재였다.
상존의 어리석음이 모순적이게도 영민한 그 둘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만일 상존이 모종의 이유로 사망하게 된다면, 그 둘은 반드시 반목하게 될 터였다. 마등은 둘 중 하나의 손을 잡아 상존의 세력을 안전하게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날까지 마등은 상존을 후대할 생각이었다.
“이보오, 사보(師保).”
이윤은 태갑의 사보였다. 그러하니 마등은 스스로를 태갑으로 낮추고 상존을 이윤으로 높인 것이었다. 상존은 얼굴을 붉히며 겸손하게 대응했다.
“어찌 그런 부끄러운 말로써 부르십니까. 듣기 민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