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70
조조가 몸을 돌아 눕자마자 조비는 몸을 불쑥 일으켰다. 축 늘어진 아비의 어깨를 보면서 조비는 옅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조조를 곁에서 모시는 궁녀가 조비의 웃음을 보고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조비는 즉시 낯빛을 단속하고, 부리나케 조조의 앞에서 물러나왔다.
조비는 정욱이 물러난 이후 공석으로 남은 승상의 자리를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주유에게 후위를 단단히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태자시중으로 강등했다. 태자시중 자리는 주유의 위상을 생각하면 낮은 지위였다. 그러나 이것은 주유를 배척하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시중은 그야말로 천자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벼슬이었다. 태자시중은 본래 없는 직위였는데, 조비는 구태여 그 자리를 신설하여 주유에게 맡겼다. 태자시중이라면 태자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벼슬인 것이었다.
태자시중은 비록 관질은 낮으나 권세는 어마어마했다. 승상이 궐석인 상태인 데다가 황명의 출납을 맡은 상서령 두기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했다.
조비는 오로지 태자시중 주유만을 통하여 정사를 주무했다. 또한 자신의 친한 동무인 오질은 관질 천석의 태자복으로 삼았는데, 태자복은 태자의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직무였다. 업도의 일대에서는 나랏일은 태자시중과 태자복을 통하지 않고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았다.
정사에서 완전히 배제된 정욱은 한탄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끝내 병을 얻어 궁중에 출입하지 못했다.
“자명.”
태자시중 주유는 심복 여몽을 불렀다. 여몽은 주유를 따라 관질 사백석의 태자중윤을 맡고 있었다. 태자중윤은 태자의 주변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예, 태자시중.”
“가끔, 아니 항상 혼란스럽구나.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여몽은 짧게 대답했다.
“상황이 바삐 바뀌는 까닭입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백부를 따라 강동을 평정하여 백부에게 소패왕의 위명을 선사했다. 그러나 백부는 산월의 수괴에게 가슴이 찔리고 요절했다. 나는 유비에게 흘러들어갔고, 유비가 절명한 후 다시 조조에게 흘러들어갔구나. 변변한 군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제는 그 아들에게 빌붙었다.”
주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아들에게 빌붙어, 주유는 간신이라 안팎으로 소문이 번지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느냐.”
“태자시중께서는 간신이 아닙니다. 간사하지도 않고, 신하도 아니십니다.”
주유는 여몽에게 시선을 옮겼다.
“말이 재밌다.”
“태자시중, 아니 주공께서는 누구를 섬기지 않고 의탁해오셨을 뿐입니다. 날개가 큰 새는 강한 맞바람이 불어야만 높게 나는 법입니다. 아직 미풍만 찾아와 비상하지 못하셨을 뿐입니다.”
“네 덕에 한탄을 하여도 청승맞지 않다.”
“소장은 비록 태자중윤의 벼슬을 받았으나 이는 오로지 주공을 위한 것일 뿐, 조비를 성심으로 지킬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조비를 성심으로 지키는 것이 주공께 이롭다면, 그리할 것입니다.”
“고맙다.”
주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을바람은 거세지 않고 잔잔하게 주유의 얼굴로 불어왔다.
한바탕 전란이 불어 닥쳤던 천하는 당분간 화평했다. 화평하다는 말은 어쩌면 가식일지도. 다시 전쟁을 예비하기 위한 시간으로써, 그 시간 역시 화평보다는 전시라고 봄이 옳을지도 몰랐다. 죽은 아비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설 수 있도록, 어린 아들에게 자라날 시간을 주는 것.
그러하니 이 당분간의 화평은 어린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었다. 저마다를 위해 마련된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시간. 그 아들은 저 척박한 땅을 가는 농부의 아들이기도 하거니와 합비의 구중궁궐에서 천하를 주무하는 천자의 아들이기도 했다.
이 화평은 나의 아들 단의 것이었다. 그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자리로 나아갔을 때, 버티지 못할 터였다.
나는 태사 화흠을 자주 불렀다. 화흠은 본디 송경의 천자 유총을 섬기던 몸이었으나 나는 그를 포함한 세 원로를 모두 기용했다. 그들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상징이었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경륜과 지혜를 빌려주는 그야말로 원로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개중 화흠을 자주 찾은 것은 그러한 거창한 담론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원자 단 때문이었다. 사람이 자라 어른이 되고 어느 정도 개인의 사업을 완성하면 모든 촉각은 자식농사로 곤두서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태사, 어떻게, 원자가 학습에 흥미를 보이오?”
나의 물음에 화흠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리 즐기지는 않으십니다.”
나는 짧게 탄식했다.
“허나 신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사력을 다하고 있사오니, 원자께서도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실 겁니다.”
“꼭 좀 부탁하겠소. 나라의 명운이 달린 일이올시다.”
“예, 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끈지끈 오르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서원은 어린 조무래기들의 공간이었지만 그곳은 아이들을 괴뢰로 삼은 정치꾼들의 대리전장이기도 했다. 원자 제갈단은 저 멀리서 뭉게뭉게 뭉치고 있는 먹구름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그 먹구름은 몰려올 것이고, 한바탕 비를 퍼부을 터였다. 그 먹구름에 대처하는 방식은 입장마다 달랐다.
“육아. 너는 서원에 들어간 자제들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또한 네 아비는 알다시피 조정의 으뜸이니라. 마땅히 점잖게 행동하고 책 잡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종요는 종육을 앞에 앉혀놓고 신신당부를 했다. 종육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님.”
“비록 원자는 너와 동문수학하고 연치도 적으시지만 엄연히 네 주인이시다. 그것은 내가 폐하를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러하니 지극한 충심으로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
“예.”
“절대로 원자의 말씀을 거스르지 말고, 원자의 명령이 이치에 닿지 않아도 간하지 말거라. 간언이란 간언을 듣는 이의 그릇이 충분히 깊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간언이란 간언을 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깊은 사랑을 받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간언은 그야말로 만용일지니, 너는 원자의 그릇이 깊어지고 네가 원자의 사랑을 받을 때까지 간언을 삼가라. 이는 너와 나와 우리 종 씨 가문을 위한 것이니 말이다.”
종육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각령 등애는 왕평의 어깨를 약하게 잡았다.
“너는 총명하니까 잘 알 것이다. 네 신분이 얼마나 미천한지. 미천한 만큼 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하는지.”
등애는 씁쓸하게 말했다. 등애 역시 땅을 파먹고 살던 농군의 천한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상대로 하여금 천한 신분을 들먹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귀한 출신의 왈가닥 아가씨는 시종 푼수여도 남들로부터 호감을 얻지만, 천한 출신의 여인은 아홉 번 얌전하다가 한 번만 실수를 해도 호된 꾸지람을 듣는 법이었다.
왕평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입으로 하는 말이 너의 말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본파의 말로 비화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원자는 비록 우리보다는 참파에 가까우나 충분히 성좌에 오를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의 앞에서 결코 행실을 가벼이 하지 말 것이다.”
“알겠습니다.”
종정 제갈근은 비탄에 젖은 상황에서도 서원에 들어가는 아들 제갈각에 대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함은 물론, 역시나 원자의 앞에서는 조심 또 조심할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자와 친분을 두터이 쌓아둘 것을 조언했다. 제갈각은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렸다.
“원자께서는 소자를 기꺼워하십니다. 아마 소자만큼 원자를 잘 아는 자는 이 합비 땅에 없을 겁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원자를 성심으로 보필하고 원자의 총애를 잃지 않겠습니다.”
제갈각은 그렇게 말하며 한 마디 더 보탰다.
“그렇게 하여 우리 강동종족(제갈찬의 합비직계의 방계인 제갈근의 제갈씨)을 더욱 융성케 하고, 나아가 마냥 황실의 곁가지가 아닌 당당한 중심으로 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제갈근이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아서라,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역모로 다스려질 수도 있다!”
제갈각은 킬킬 웃으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손을 내저어 아비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자, 위험한 일은 하지 않사옵니다.”
서촉도독 장료는 임지가 변방의 먼 곳에 있는 까닭으로, 더욱 아들에 대한 당부를 간절히 남겼다. 변방의 장수는 항시 중앙의 군왕에게 의심을 받는 법이었다. 역사의 수많은 변방 장수들은 군왕이 맡겨놓은 병사를 제 수족으로 부려 그들의 주인인 군왕을 찌르곤 했으므로. 서원에 서촉도독 장료를 비롯한 여러 도독의 자제들이 들어가게 된 것도 이러한 의심의 일환이라는 점을 장료는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옛 주인 여포의 죽음으로 그런 의심의 강도가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정녕 그런지는 천자만이 알고 있는 일이겠지만.
“우리는 어떤 파벌도 후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천자의 지도를 받는 신하로서 구실할 뿐이다. 그러므로 너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행동도 부러 굼뜨게 해라. 이 아비는 천자의 영원한 충용한 장수이고 싶다. 네가 그리해야만 아비가 공신각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릴 것이다.”
장호는 과연 주문받은 대로 읍하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예.”
이렇듯 조무래기들의 공간은 어른들의 복잡한 생각으로 마냥 순수할 수 없었다.
어사대부 유엽은 삼공의 지체에 올랐지만, 입수된 정보를 나에게 보고하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올랐으면 아랫것에게 맡겨두고 쉬어도 좋으련만. 그래서인지 나도 가끔은 그의 자리를 잊고 청금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폐하, 북비가 이황자 조비를 태자로 임명하고 청정하도록 했다는 전갈이옵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앙에게 호위라도 딸려 보낼 것을 그랬나요?”
“적병을 등에 업고 돌아가기를 조앙도 바라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조비가 손을 써서 척살한 모양입니다.”
조비야, 태자 자리가 그리도 좋았더냐. 제 형을 해치고 얻을 만큼 그리도 좋은가. 비록 그것은 적의 사정이었지만 나는 씁쓸한 맛을 지울 수 없었다. 혹여나 그 비극이 내 아들들에게서 재현될까봐 더욱 그러했다. 다른 모든 것에서 실패하더라도 그것만은 막으리라.
나는 이마를 짚으며 유엽에게 물었다.
“허면 북비는 조앙의 죽음을 알고 있을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유엽도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비가 구태여 자신의 손으로 형을 죽였다고는 고하지 않았을 터이니, 아마 짐작은 하여도 확신은 못할 것입니다.”
“행방이 묘연하다고 믿는 것인가.”
유엽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북비의 정신건강에도 좋을 테니까요.”
“으음.”
나는 턱을 쓸었다. 조앙에 대한 생각은 남지 않았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없었다. 이제 나의 생각은 적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 문제에만 천착했다.
“관련해서 쥐고 있는 패가 하나 있긴 하지.”
말귀가 밝은 유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패 중에서도 큰 패이지요.”
조의 대사마 조인을 이르는 것이었다. 서군의 참모와 장수들은 조앙의 단호한 명령에 의해 뒤로 물러나 무사히 업도로 돌아갔지만, 대사마 조인은 끝까지 남아 항전했다. 그런 고로 조앙의 결기와 행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내가 조인을 업도로 송환한다면? 그렇다면 업도에는 어떤 천지풍파가 일 것인가. 그 파장이 작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바위도 뚫는다는 강노(强弩)를 쏜다고 한들,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대사마 조인의 송환은 꽤 파괴력을 지닌 포석이 될 것이나, 때를 적절히 맞추지 못하면 허공을 가르는 헛발이 되고 말 터였다.
“조비가 청정을 맡았으면, 정욱과 하후돈 등 북비의 구신(舊臣)은 퍽 처지가 안타깝게 됐겠습니다?”
자연스러운 추측이었다. 조비 대신 조앙을 지지하던 그들을 조비가 중용할 리 없었다. 유엽은 내 추측을 확인해주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주유가 태자시중에 임명되어 정사를 쥐락펴락한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오질은 태자복으로서 조비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다고 합니다.”
“하기야 구신들을 배제하면 정사를 처리할 적임은 주유 정도가 고작이니까. 북비의 조정도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졌군.”
나는 손가락으로 톡톡 탁자를 건드렸다.
“정욱이 다시 일선에 복귀하고 싶어 할까요?”
“정욱의 나이도 나이인지라, 다시 조정의 복잡한 일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분명 조비의 청정에는 불만을 갖고 있겠지요.”
그는 이어 말했다.
“굳이 정욱이 아니어도 정사에서 배제된 구신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또한 북비의 황족들은 대개 조앙에게 호의적이었으니, 그들은 조비의 청정에 다소간 불만을 지니고 있을 겁니다. 개중 대부분은 조비의 청정에 머리를 숙이겠지만, 하후돈 등 대놓고 대립각을 세웠던 이들은 지금의 상황이 답답하기만 할 겁니다. 또한 조비의 성미가 잔학한지라,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다는 부담을 안고 있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