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73
“어허, 그래도!”
내가 기어코 그를 물리치려는 찰나, 백경 가후가 일어나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폐하, 신 백경 가후 아룁니다. 원자께서 그리도 간곡히 원하시니 청을 들어주시지요.”
“백경!”
나는 가후에게 눈빛을 쐈다. 가후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원자 단이가 아무리 용을 써본들 허저를 이길 리 만무했다. 백성들이 보고 있는 와중이었다. 원자 단이 대신 적자 주를 내심 후원하는 가후가 원자의 편을 들어준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그를 백성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하여 신망을 떨어뜨리고, 만용이 앞서는 부적격자라는 것을 만조백관의 앞에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가후가 죽일 듯이 미웠다. 가후가 말하자, 백각대부 사마의가 은근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신 백각대부 사마의 아룁니다. 원자의 뜻이 크고 당당하시니, 폐하께서 윤허하심이 어떠시온지요?”
사마의가 가후의 편을 드는가. 나는 헛기침을 하며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승상 종요가 침을 꼴깍 삼키며 만류했다.
“이 좋은 날에 구태여 일을 더 벌일 까닭이 없습니다. 이쯤 하시지요, 폐하.”
내가 아무런 비답을 내리지 않는 사이에, 허저가 허리를 젖히고 와하하 웃었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허저는 내 앞에 엎드려 아뢨다.
“폐하! 좌장군 허저 아뢰옵니다! 원자의 포부가 연치에 맞지 않게 참으로 당당하옵니다! 이 허저가 어찌 저 뜻을 피하겠습니까! 장부로서의 도리가 아닙니다!”
오, 사투리를 완벽하게 교정하다니. 나는 사소한 사실에 잠시 감탄하고 허저를 바라봤다. 허저가 가후의 쪽에 선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원자 단이의 포부를 높이 사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의 순수한 의지가 마음에 들어, 피식 웃었다.
“좋다. 윤허하겠노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단이는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하옵니다!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최선을 다해 싸우라.”
“부황의 명예를 걸고 싸우겠습니다!”
하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지면 어쩌려고. 네놈이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동시에 내 명예도 땅바닥에 갖다 버리려느냐. 그렇게 말하면 허저의 입장이 대체 뭐가 되는지. 나는 조정의 원로로서 가까이 배석한 태사 화흠을 흘끗 바라봤다. 화흠도 나를 잠깐 바라보고는 얼른 눈빛을 피하며 한숨을 팍 쉬었다.
나는 단이의 실수를 교정해주었다.
“짐의 명예는 되었다. 너의 명예를 걸고 싸우라. 이기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너의 명예는 지켜지리라.”
“옙!”
단이는 그렇게 대답하고 훌렁 상의를 벗어던졌다. 뭐가 저리도 천진한지. 미우면서도 밉지 않았다.
허저는 일단 원자 단의 도전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왔다. 전장에서 더운 피를 등목 하듯 뒤집어쓰는 무부들을 제압한 허저였다. 그런 무부이거니와, 저런 핏덩이를 상대해야 한다니 자존심이 조금 상하기도 하고 얼마나 힘 조절을 해야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원자! 봐드리지 않을 거구먼유.”
원자 단은 당당하게 받아쳤다.
“봐달라고 한 적 없다!”
어쭈, 이것 봐라? 허저는 당돌한 반응에 웃음을 머금었다. 허저는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손뼉을 치면서 전의를 드러냈다. 단도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소싸움을 벌이는 소처럼 맞닥뜨렸다. 허저는 전력을 사용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어린 애를 상대로 진지하게 덤벼봤자 웃음거리만 될 터였다. 허저는 가볍게 단의 바지춤을 잡았다. 수월하게 잡아들어 원자의 채신을 고려하여 부드럽게 고꾸라뜨릴 계획이었다. 그런 계획으로 허저는 단의 바지춤을 슬쩍 들어올렸다.
허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허저가 힘을 주는 방향으로 자연스레 끌려와야 할 단의 하체가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이 요지부동이었다.
“으음……!”
허저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단을 잡아당겼다. 그의 두꺼운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그럼에도 단은 허저의 의향대로 되지 않았다. 도리어 다리를 거는 등 반격을 시도했다.
“허어!”
이제 허저는 저도 모르게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원자 단도 지지 않으려는 듯 용을 써가며 허저의 공세에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허저는 혀를 빼물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허, 참! 천하의 허중강이 어린 애를 두고 전력을 다하다니!
이대로 고꾸라뜨리자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지만, 황실의 장유와 문무백관, 그리고 합비의 백성들이 모두 보고 있는 자리에서 천자의 원자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허저와 원자 단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치했다.
‘엎어뜨려, 무너뜨려……’
가후는 저도 모르게 살짝 손톱을 물었다. 원자 단이 유일하게 무기로 삼는 든든한 체력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원숙한 무술에 허저가 찬물을 끼얹어 준다면 원자의 위상도 흔들릴 터였다.
덕이 없고 힘만 센 군주는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몇 대 전의 걸물인 초패왕 항우가 잘 보여주었다. 가후는 자신의 이익을 차치하고서라도, 원자 제갈단을 제위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어야만 속이 편해서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종요는 종요대로 속이 타들어갔다. 멍청한 녀석! 괜히 난입해서 이런 시련을…… 본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수비가 공격보다 쉬운 것은 만고의 진리였으니까. 그저 가만히 숨죽이고만 있으면 알아서 천자의 자리를 너에게 떠먹여줄 텐데!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는…… 종요는 이 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허저와 원자 단은 쌕쌕 숨을 몰아쉬며 대치를 이어갔다. 허저는 모양새 부드러운 승리는 물 건너간 상태에서, 냅다 원자를 바닥에 꽂느냐, 혹은 부러 패배하느냐의 곤란한 선택을 요구받았다. 둘 다 내키지 않았다. 허저가 고심하는 사이에 원자 단은 하룻강아지처럼 켕켕 짖으면서 허저의 체력을 갉아먹었다.
“그만, 두 분은 그만 관두십시오.”
이어지는 대치에 군중의 마음이 지루해질 때쯤, 상서령 제갈량이 일어나 외쳤다. 좌중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나는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인 채로 그를 바라봤다. 제갈량은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의 용맹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충분히 느꼈습니다. 좌장군께서는 원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원자께서도 부황의 충용한 장수를 함부로 하지 못하니 대치가 계속될 수밖에요. 자, 이쯤에서 관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서령의 말이 과연 옳다. 원자와 좌장군 모두 수고했다.”
나의 말에 허저가 먼저 대치를 풀었고, 그래도 사람만큼의 눈치는 있는 원자 단도 무리하게 덤비지 않았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두 장사는 이리 와서 나의 잔을 받으라. 그대들은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굉장한 웅력이로다.”
내 옆의 시영이 입을 가리고 속닥거렸다.
“원자는 아직 연치가 어린데 술을 마셔도 괜찮겠어요?”
나도 속닥거리며 대답했다.
“짐은 원자의 나이에 술을 한 말을 먹었소이다?”
“어머, 그래요?”
시영의 되묻는 목소리에 의심이 가득했다. 조정의 고관으로서 나의 가까이에 앉아있던 태위 손관이 말했다.
“순 거짓부렁입니다. 소신이 폐하가 열다섯일 적부터 봐왔는데 어쩜 그렇듯 태연하게 거짓을 말씀하십니까?”
나는 표정을 구겼다.
“기회만 생기면 파직하리라.”
허저와 원자 단에게 술을 한 잔씩 내리고, 아랫것에게 명하여 금두꺼비를 둘로 갈라 반씩 가지도록 했다. 나는 웃으면서 원자 단에게 말했다.
“너는 아비에게 없는 지극한 무용을 가졌구나. 반드시 나라에 이롭도록 너의 무를 가려 쓸 것이다. 알겠느냐?”
단은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네가 짐의 뒤를 이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다. 위태롭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나의 말에 원자 단보다도 본파와 참파 관료들의 귀가 쫑긋 곤두섰다. 위태롭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즉, 모든 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축제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백성들도 흉년의 아픈 기억을 잊고 다시 딛고 일어설 힘을 얻었다.
업도에서는 조비를 등에 업힌 주유와 오질의 정치가 펼쳐졌다. 오질은 뇌물을 있는 대로 처먹고 그 대가로 벼슬을 멋대로 나눠주었다.
주유는 그 꼴이 보기에 눈이 시렸지만, 일단은 인내했다. 오질은 조비에게 죽마고우였고, 자신은 오로지 쓸모에 의해 선택된 수하일 뿐이었다. 그를 건드린다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하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유는 오질의 농단에 침묵했다.
또한 오질의 행보가 주유에게 득이 되기도 했다. 조앙을 지지하던 옛 신료들을 연쇄적으로 파직하고 그 자리에 어중이떠중이들을 배치하면서, 조정에 주유를 능가하는 권위가 남지 않게 되었다. 명예만을 좇아 벼슬을 얻었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그들은 주유가 하라는 대로 군말 없이 일했다.
“계속 이런 상태라면 제갈씨의 침노가 있기 전에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전 승상 정욱은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전 대장군 하후돈 역시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폐하께 낱낱이 사실을 고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정욱과 하후돈 등 서군의 신료들은 태자 조앙의 명령으로 일찍이 물러나 업도로의 퇴군행렬에 동참했다. 퇴군 행렬에 조앙은 없고 오로지 조비만이 있었고, 조비가 후위를 자처하는 것을 보고 정욱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천자 조조의 명령이 결사항전이 아니라 즉각 퇴군이었다는 것을 듣고 그는 격분했다. 그보다 더 격분한 하후돈이 조조에게 아뢰려는 것을, 정욱이 제지했다.
조비가 말끔하게 일을 처리한 이상, 조앙은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을 정욱은 알았다. 그렇게 되면 조조는 결국 조비를 후계로 선택할 것이었고, 훗날 조비가 권력을 쥐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 까닭이었다. 정욱은 당장의 화를 삭이고 우선 조정의 단합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변했다. 이러쿵저러쿵 조조에게 아뢰어봤자 대안이 없는 조조는 조비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터였고, 훗날 조비는 서군의 신료들을 가혹하게 대할 것이 분명한 까닭이었다. 게다가 조조는 그 당시 몰락적인 패전으로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럼에도 정욱은 조비가 아예 자신들을 정치에서 배제할 줄은 몰랐다. 그것은 나라에 해로운 일인 까닭이었다. 정욱과 하후돈 없이 문무를 논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조비는 문무를 논하지 않고 오로지 권력과 아첨만을 기꺼워했다. 정욱은 절망했다.
“제가 틀렸었습니다, 대장군.”
하후돈은 지난 일을 두고 왈가왈부할 의사가 없었다. 또한 당시 정욱의 의견은 합리적이고 타당했다. 그는 과거에 함몰된 정욱을 다시 지금의 일로 끌고 왔다.
“폐하께 다시 복귀하여 정사를 돌보시라 말씀을 드려보는 것이 어떨는지.”
하후돈의 말에 만총이 고개를 저었다. 만총 역시 조비의 신뢰를 받지 못해 응달로 쫓겨난 신세였다.
“이미 폐하께 말씀을 올려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남을 참소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만총이었으나, 참소가 아니었기에 용기를 내어 조조를 알현했다. 조조는 조앙의 행방불명 이후 기력을 잃더니, 조비에게 청정하게 한 이후로는 아예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버렸다.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지새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폐하, 신 만총이 폐하의 존안을 뵙사옵니다.”
조조는 그를 등져 누운 채로 손가락을 까딱거려 알은체를 했다.
“무슨 일이냐. 졸리다.”
“폐하, 태자(조비는 이황자에서 태자로 정식 책봉되었음)께서 청정하신 이후로 너무나도 조정이 급변하는지라, 대소신료들의 심려가 매우 크옵니다.”
“무엇이 어떻게 급변하였느냐.”
조조의 목소리는 병자의 것처럼 무기력했다.
“옛 신료들이 자리를 잃고 이름 없는 자들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사옵니다.”
“이름이 없다고 하여 능력이 없다고 볼 수 없느니라. 명성만을 좇는 것이 능사가 아니야.”
“하오나……”
조조는 만총의 뒷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짐은 정사에서 손을 떼었느니라. 더 말하지 말라.”
“폐하……”
“곤하다. 자자.”
조조가 그렇게 말하니 만총이 더 할 말이 없었다. 조조는 심히 무기력해져있었다. 만총은 조조의 늙은 등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주유는 태자 조비에게 품신하여 황족의 관직 겸임을 금지했다. 명분이야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여 나라의 초석으로 삼는 것이 고금의 응당한 도리올시다. 황족은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으나 그것이 반드시 능력을 담보하지는 않소. 대개의 경우 천자의 빛나는 권위를 등에 업고 조정의 고관을 독식하는 것이오. 그렇기에 황족이 조정의 일에 관여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여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고자 하는 것이오.”
조비는 조조의 종제인 조홍을 동해왕에 봉하고 식읍 2만 호를 내렸다. 그는 조조가 물러나고 조인이 행방불명된 현재의 황실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조정의 권세보다는 재물에 더 관심을 보였다. 조비가 그에게 왕의 작호를 내리고 어마어마한 식읍을 하사하자, 조홍은 조비의 열렬한 지지자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