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74
그가 앞장서서 조정에 출사한 황족들의 사직서를 거두었고, 도움을 구할 길 없는 그들은 무력하게 벼슬을 반납한 뒤 아무 실권도 없는 봉작을 받고 물러났다.
그럼에도 그들의 의사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어서, 조비는 황족들에게 공신들의 것을 충분히 상회하는 만큼의 식읍을 하사했다. 식읍은 나라에 바칠 것을 개인에게 바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식읍이 늘어나는 만큼 조정의 곳간은 비게 되었다.
정욱의 늙은 얼굴이 며칠 새 더 늙어보였다.
“태자의 전횡을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하후돈이 점잖게 정욱을 만류했다.
“어허, 말씀을 그래도 가려하시오. 요즘 같은 세태로는 그 말 한 마디로도 목이 달아날 수 있음이니.”
“목을 치신대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으으음……”
침묵으로 일관하던 하후연도 참다 참다 못해 한 마디를 보탰다.
“폐하께서 다시 복귀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정욱은 비관적이었다.
“이미 의욕을 잃으셨는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소.”
하후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말씀을 안 드렸던 부분이 있습니다.”
“북비의 승상 정욱의 전서입니다. 직접 읽어보시겠습니까?”
나는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줘보세요.”
정욱의 글씨가 종이에 꽉 들어차있었다.
합비에서 제위에 등극하심을 늦게나마 경하 드립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소인의 적이지만 적절한 정치로 백성들을 편안케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소인이 하후묘재(하후연)에게 듣기로는, 합비에 우리의 대사마(조인)께서 억류되었다고 하더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가능한 빠른 시일에 대사마를 본국으로 송환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사마는 나라의 동량인 동시에 비뚤어진 정치를 바로잡을 유일한 인물이니, 부디 간절한 뜻을 물리치지 말아주십시오.
적에게 비굴하게 구는 것이 선비로서 온당한 자세가 아님을 알지만 사세가 그만큼 급합니다. 하후묘재에게 듣기로는 폐하의 노복이 먼저 접근하여 대사마의 일을 알리고 협조하겠다고 밝혔다더이다.
늙은 머리로 생각을 해보건대, 대사마를 송환시키는 것은 아조에 분란을 야기하여 폐하가 어부지리를 얻고자 하는 포석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폐하께 간청하나이다. 부디 대사마를 업도로 송환하여 주시오소서.
나는 서신을 다 읽고 나서 상서령 제갈량에게 넘겨주었다. 제갈량은 슥 대충 보고도 내용을 충분히 숙지했다.
우리는 조인의 필치로 쓰인 서신을 세작을 통해 하후연에게 전달했다. 하후연은 조비에 의해 숙청된 서군의 일원이었다. 또한 정욱처럼 두뇌회전이 빠르지도, 하후돈처럼 조정 내의 권위가 막중하지도 않았다. 다만 빼어난 무장이자 군부의 중핵 정도에 그치는지라, 수신인을 하후연으로 상정한 것이었다. 하후연 정도의 인물이라야 조인의 행방과 우리 신왕조가 조인을 송환할 의사가 있음을 타진하기에 적합했다.
두뇌회전이 빠른 정욱이었다면 만일 조인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경우 우리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두절할 염려가 있었다. 하후돈은 정욱 등과 논의하여 결정을 내릴 정도의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하후연은 그 정도의 두뇌도, 권위도 없는 인물이었으니 조금씩 정보를 흘리면서 적정을 탐지하기에 적합했다. 결국 최후의 때까지 몰린 하후연은 정욱과 하후돈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고했고, 정욱이 부랴부랴 서신을 보내온 것이었다.
“송환시키는 것이 좋겠지?”
제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욱의 말처럼 우리의 계책을 알고도 조인을 부를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인 듯합니다. 이대로 두어도 조는 자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약한 독에 감염되어 오래 앓다가 죽는 것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는 것은 우리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속히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일터로 돌려보내 전비를 줄이고 생산력을 높여야 하니까요.”
“그렇지.”
제갈량은 덧붙였다.
“또한 북비의 엉망진창의 정치가 계속된다면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곧 미래 신의 백성이 될 것이니, 어찌 저들의 수난을 계속 지켜만 보겠습니까.”
하느님이 계시다면 퍽 오만하게 볼 정도의 발언이었으나, 나는 제갈량의 말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했다. 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할 것이고, 우리가 중화의 전토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조의 백성은 곧 나의 백성이다. 백성은 곧 천자의 자식들이니, 어찌 자식들의 수난을 방관하겠는가.
“좋다. 허면 북비의 대사마 조인을 북으로 돌려보내겠다.”
“예, 그리고 마지막 전쟁을 예비하심이 좋겠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얕은 숨을 쉬었다.
“제발 이것이 마지막 전쟁이었으면 좋겠군.”
조의 대사마 조인은 나의 포로가 되었을 때 입고 있던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그것은 당시의 처절한 기억 그 자체였다. 참담한 패배, 조비의 협잡, 조앙의 고집, 그리고 다시 참담한 패배, 조비의 협잡, 조앙의 고집, 그리고 지금.
“객지에서 고생이 많았소.”
나는 웃으면서 조인을 전별했다. 그러나 조인은 웃을 기분은 아닌 듯했다.
“적장을 베지 않고 온정을 베풀어준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나, 그 온정에 구더기 끓는 흉계가 있을까 싶어 진심으로 대하지 못하겠소이다.”
구더기 끓는 흉계라.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어쨌든 짐은 그대와, 업에 있는 그대의 친구들에게 전적으로 선택하도록 한 것이니까.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그것은 짐의 구더기 끓는 흉계 탓을 할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선택을 탓해야 할 것이오.”
조인의 눈빛은 다부졌다.
“어떠한 결과를 맞이하든 의연할 것이오.”
“암, 그러셔야지.”
나는 조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또 볼 일이 있을까?”
조인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다시 보지 않았으면 좋겠소. 다만 그대의 부음을 듣고 싶군.”
그의 배포가 흡족하여 나는 크게 웃었다.
“그러려면 오래 사셔야겠소.”
조인은 내가 나누어주는 전별주를 그대로 내려놓고 북방으로 향하는 말의 궁둥이에 매운 채찍을 더했다. 나는 주인 없이 식어가는 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꼭 술잔이 식기 전에 돌아올 필요는 없소. 기어코 식은 술을 마시겠다니, 굳이 만류하지는 않겠단 말이지.”
나는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조인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중얼거렸다.
“상서 동리곤이 태자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는 자택에서 자결했다 합니다.”
간의대부 주삭이 오질에게 말했다. 간의대부는 태자복의 벼슬보다 품계가 한창 높았음에도, 주삭은 꼬박꼬박 오질에게 말을 높였다. 주삭 역시 조비를 따르던 인물로서, 오질에게 줄을 대어 고관의 자리를 꿰찼다.
주삭의 보고에 오질은 콧방귀를 뀌었다.
“헹! 형편없는 놈. 나는 그런 부류가 제일 싫어.”
오질은 떡을 맥아당에 찍어 먹으며 죽은 동리곤을 욕했다. 단 것에 단 것을 더하니 이가 시릴 정도의 단맛이 오질의 입 안에 감돌았다. 그러나 오질은 그리 달다고 여기지 못했다. 이미 권력의 향미가 그것보다 곱절은 달거늘.
“얼마나 한심하냔 말이다. 나를 탄핵할 거면 당당하게 탄핵을 한 뒤에 그 처분을 기다렸어야 옳다. 처분이 두려워 먼저 목숨을 끊어버린 거거든. 얼마나 한심하고 형편없어?”
“어찌할까요?”
“뭘 어찌해! 굳이 태자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까닭이 없다. 상소는 자네 선에서 묻고 상서 동리곤의 주검도 저 어디 야산에다 묻어버려.”
“그리합지요.”
오질은 입술을 꾸물거렸다.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백날 해보라지! 까치가 쇠북에 대가리를 박아 소리를 내보려 한들 그것이 천리 밖까지 들리겠느냐?”
오질은 떡을 하나 더 집어 우물거렸다. 그는 떡을 우물거리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고 죽어가는 주제에, 스스로 대단한 일을 했다고 여기며 뿌듯함 속에 죽어가는 거야. 참으로 딱한 인생이지.”
그때 태자사인 포소가 들었다. 포소는 조조의 벗이었던 포신의 아들이었다. 그는 별 능력은 없었으나 천자가 아끼는 벗의 집안이란 것을 이용, 재물을 끌어 모은 뒤 오질에게 줄을 대어 태자사인의 벼슬을 얻은 인물이었다.
“태자복 어른, 남쪽의 제비로부터 밀서가 당도했습니다.”
포소는 나름 중차대한 소임을 띠고 있었다. 바로 신과 은밀히 교류하는 일이었다. 남쪽의 제비란, 신의 어사대부 유엽을 일컫는 말이었다. 내놓고 적국의 고관을 들먹일 수는 없으니 일종의 별명을 썼다.
오질에게 먼저 접근한 것은 신이었다. 어사대부 유엽은 그가 청금령일 적부터 부단히 오질에게 줄을 대었다.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시적인 정보업무의 일환이었다. 유엽은 오질의 하수인에게 이왕평에서 장사할 수 있는 권리를 내주었고, 그 대가로 활발한 정보교류를 제안했다. 오질이 거절할 리가.
그렇게 열어놓은 대화의 창구를 유엽은 지금 사용한 것이었다. 태자사인 포소의 보고를 들은 태자복 오질은 의심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잠잠하다가 갑자기 왜 말을 거는 게야.”
미리 내용을 접한 포소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다급한 소식입니다.”
“다급하다?”
백문이 불여일견. 포소는 유엽의 서신을 오질에게 보여주었다. 유엽의 서신은 요약할 수 있었다. 대사마 조인 업도 송환으로. 오질의 뇌리에서 불빛이 타다닥 튀더니 본능적인 상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젠장! 조인이 살아있었나!”
조인은 조비의 치밀한 협잡을 고발할 유일한 증인이었다. 합비가 그를 보호하고 있었고, 이런 시점에서 업도로 송환시킨다? 오질은 침이 바짝 말랐다.
이를 간하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을 그대에게 은밀히 알리니, 부디 잘 조처하여 뒤탈이 없기를 바란다. 나도 천자께서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전쟁광 조인과 그의 당여가 득세하게 된다면 천하는 다시 어지럽지 않겠는가?
유엽은 그렇게 서신을 끝맺었다. 오질은 부리나케 태자전으로 향했다. 유엽의 서신에는 본문만큼 긴 추신이 달려있었다. 그 추신의 내용이 오질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듣자하니, 전 승상 정욱과 전 대장군 하후돈 등이 대사마 조인의 행방을 알아내고 이를 천자께 주청하여 업도로 송환해달라 청했다는군. 천자께서는 업도가 어지러운 것을 원하시니 그들의 청을 들어주신 게야. 그러나 나는 천자와 생각이 다르네. 그대가 내내 집권해야만 양국의 사이가 평화롭지 않겠는가. 내 주제넘게 조언을 하자면, 서두르는 것이 옳을 것이네.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당하고 말 것이야.
오질은 저도 모르게 목젖을 매만졌다. 그는 태자 조비에게 즉각 이와 같은 사실을 아뢰었다.
“전하! 큰일이 났습니다! 폭풍전야이옵니다!”
조비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대번에 인지했다. 정욱과 하후돈이 아무리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신세라지만, 천자를 오랫동안 지근거리에서 모셔온 신하들이었다. 신하라기보다도 창업동지에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일거에 여론을 조성하여 태자 조비를 탄핵하고 천자 조조의 친정을 떠들어대면, 늙은 수사자처럼 안락함만을 추구하던 조조도 더 누워만 있지 않을 터였다.
형을 죽여 태자의 자리를 탐한 조비의 죄과를 아무리 아비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물며 조비가 그럴진대 오질, 주유 따위임에야. 죽어도 곱게는 죽지 못할 것이었다.
“대책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조비는 오질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오질은 가까이 두면 즐겁지만 중대사를 논의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그릇이었다.
“태자시중 주유를 들라하라.”
그가 기댈 만한 언덕은 지금 주유가 유일했다. 주유는 조비의 급한 소환에 응하여 태자전으로 향했다.
나는 참모들을 소집했다. 상서령 제갈량, 백경 가후, 어사대부 유엽. 물론 기타 등등의 두뇌들이 있었지만 믿을 만한 자들만을 불렀다. 각별한 보안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어사대부, 서신은 무사히 도착했답니까?”
내가 묻자 유엽이 답했다.
“오질에게 보낸 서신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세작이 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