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80
“그런 거 없다.”
“예?”
“나는 일생을 모사로 살아왔다. 모사란, 누군가의 밑에서 그를 위해 꾀를 내는 자를 일컫는다. 나는 백부(손책의 字)의 밑에서, 유비의 밑에서, 조조의 밑에서, 이제는 조비의 밑에서 꾀를 내며 살아왔다. 나는 실로 모사였다.”
여몽은 잠자코 주유의 말을 들었다.
“허나, 조조가 저렇듯 보란 듯이 탈출할 줄은 몰랐구나. 조조가 업도를 탈출하여 조인에게 붙은 그때부터, 조비가 이길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단정적인 말에 여몽은 침을 삼켰다.
“용케 조조와 조인을 이긴다 해도 신의 병마에 의해 금방 침몰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게 꾀를 강구하는 자에게 꾀를 내주었으나 그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나는 백부도, 유비도, 조조도, 이제는 조비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주유는 씁쓸하게 자조했다.
“즉, 차로 치자면 하품(下品)인 것이다.”
“어찌 자책하십니까. 주공의 무능 탓이 아닙니다.”
주유는 여몽의 위로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차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하품으로서의 차는 그저 하품으로 끝나야 하는가, 하고 말이야. 차는 마시지 않고 다르게 쓸 수는 없는 것인가.”
주유는 여몽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데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시렵고, 눈이 시려워 눈을 감았지. 그런데 눈을 감고 있자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건드리는 것이 아닌가. 차의 냄새인 거야. 차는 하품이되 냄새만큼은 상품이 되는 거야.”
“허나 차는 마셔야만 온전히 그 쓰임이 다하는 것이요, 냄새만 맡아서는 그 쓰임이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냄새는 오래가지 않고 또한 옅을 뿐이니, 그것이 차의 온당한 쓰임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러나 나는 선택했다. 하품으로서 다 쓰일 것이냐, 아니면 상품으로서 적게 쓰이고 버려질 것이냐, 그 가운데서.”
대개 세상일이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작은 일도 그럴진대, 큰일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전임 승상과 대장군 이하 황족과 고관대작들을 직접 처리한 한 장교는 제 공을 나불대고 싶어 환장했다. 스스로 여기기에도 참으로 대견하고 위대한 공훈이었다.
그는 그러한 내용을 가장 절친한 벗에게 속닥거렸고, 그 절친한 벗은 술자리에서 떠벌릴 무용담이 다 떨어지자 그의 이야기를 제 것처럼 꾸며 떠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소문에 날개가 달렸다. 조비는 장교를 잡아냈고, 그의 벗 또한 잡아다 그와 나란히 죽음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죽기 직전까지 누구의 잘못이 더 큰 것인지를 두고 언성을 높였다.
소문의 진원까지 엄히 다스리면서, 세인들은 정말 조비가 제 아비의 공신들과 제 족척을 잡아다 주륙을 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업도의 북쪽에서 진을 치고 도사리고 있던 조조와 조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둘은 부둥켜안고 애처럼 울었다. 정욱과 하후돈, 하후연, 그리고 수많은 공신들과 황족들은 단지 조조의 수족에 그치지 않았다. 냉혹한 술수로 일생을 살아왔고 사람 버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던 조조였다.
그런 그가, 수 십 년 동안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쉽게 사람을 버리지 않은 이가 끝내 버리지 않은 사람은, 곧 그의 일생과도 같았다. 조조가 애처럼 우는 까닭이었다.
“자효,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좋겠는가.”
조조가 묻자, 조인이 마른 눈물자국을 손으로 지우며 대답했다.
“응징이 마땅한 답입니다.”
“옳다. 나는 조비를 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또한 그놈을 돕는 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한다.”
“일거에 들이쳐서 이기지 않으면 응징에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옳다. 업도는 원소가 만들었으되 내가 새로 고친 도읍이다. 누구보다도 업도는 내가 잘 안다. 오래 버티기 용이한 옹성이다. 지구전으로 들어간다면 필히 패하고 말 터, 이대로 내 육신마저 저놈들의 손에 찢긴다면 그 원한을 어찌한단 말이냐.”
조조의 눈에는 잠깐의 슬픔이 사라지고 원래의 결기가 맺혔다. 젊은 시절의 그 결기.
“전권을 그대에게 일임하겠소.”
약식에 졸속으로 제위에 오른 조비는 태자시중 주유를 대도독의 자리에 앉혔다. 오질은 승상이 되었다. 이름은 하나같이 하늘에 걸렸으나 그들의 권위는 결코 그에 걸맞지 못했다. 주유는 그것을 알기에 대도독의 인수를 끝까지 사양했으나, 조비는 끝까지 안겼다.
주유를 대도독에 앉혀놔야만 속이 편할 수 있었다. 그가 아니면 당최 누구를 앉힌단 말인가. 오관중랑장 풍해 같은 머저리를 앉혀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자명아, 참으로 부끄럽구나. 대도독이라니. 변기에 금칠을 한다고 귀해지겠느냐.”
여몽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조비가 주유에게 모든 군권을 맡겼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생을 전쟁으로 살아온 아비를 이기지 못할 것이기에. 또한 형장의 이슬 신세를 면한 아비의 장수들이 저쪽에 있었다. 조인, 이전을 비롯한. 그들을 주유가 아니고선 누가 상대하겠는가. 주유는 조비의 애걸복걸을 외면하지 못하고 대도독의 인수를 받았다.
“작전을 품신하오니 윤허해주십시오.”
주유는 다른 장수들과의 논의 없이 독단으로 전략을 입안했다. 다른 장수들의 불만이 솟았으나 주유는 개의치 않았다. 주유의 전략을 검토하던 조비는 아연했다.
“업도의 옹벽을 박차고 나가 적을 요격한다?”
조비가 비로소 아비를 스스럼없이 적이라 불렀다. 주유는 그에게 남은 정이 똑 떨어졌다. 후레자식. 그는 표정에 생각을 숨기고 전략을 설명했다.
“부황을 뭐라 일컬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주유가 이렇게 운을 떼자, 승상 오질이 끼어들었다.
“저 남쪽의 신제(晨帝) 제갈찬이 좋은 별명을 지어내지 않았는가?”
주유는 얼굴을 찌푸렸다.
“북비를 말씀이오?”
오질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그렇지, 북비! 적은 우리의 북쪽에 있기도 하니까, 우리에게도 유효한 부름이지.”
아무리 척을 졌다지만 아비에게 도둑 비(匪) 자를 붙여 부르게 하는가. 주유는 께름칙한 표정으로 조비를 돌아봤다. 조비는 내놓고 웃지는 않았지만 오질의 말에 썩 기분이 좋아보였다. 과연 파리가 꼬이는 것은 쓰레기가 있는 까닭이로다. 주유는 속으로 경악했다.
“뭐, 호칭이야 어쨌거나 상관없습니다만. 승상의 말마따나 북비라고 하지요. 북비는 업도의 지형지물에 능하고 기발한 책략에 능합니다. 때문에 그가 예상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만은 없습니다.”
조비는 눈빛을 벼렸다.
“그가 예상하는 방향은 우리가 수성에 임하는 것이고?”
주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첨언했다.
“또한 마냥 수성이 이롭지만도 않습니다. 신의 병력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지구전으로 돌입하면 신에 의해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조비는 가벼운 진저리를 쳤다.
“그건 안 되지.”
“그렇기에 적극적인 요격으로 북비를 물리치고, 연후에 최대한 빨리 전열을 가다듬어 신의 병력과 맞닥뜨리는 게 순서입니다.”
조비는 이마를 짚었다.
“쉽지 않군.”
주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줄 알고 일어서신 것 아닙니까?”
조비는 샐쭉 입을 내밀었다.
“그건 그렇네만.”
“감당하실 일입니다.”
주유의 말에 조비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알았네. 모든 군략에 대한 권한은 그대에게 있어. 모쪼록 나에게 기쁨을 안겨다주게.”
“천자는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릅니다.”
조비의 그 사납던 성정이 주유의 앞에서는 좀체 기를 펴지 못했다. 조비는 더 움츠러든 어깨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에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유는 조비에게 꾸벅 절을 올리고 성큼성큼 당당한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군주는 고민하기를 포기한 순간부터 자격 박탈이다.’
주유는 손을 툭툭 털었다.
‘너는 자격이 없어.’
조조의 병력은 질풍처럼 남하했다. 전쟁에는 이골이 난 그들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보급선을 견실히 다지면서도 과감할 때는 과감했다. 조조의 명성을 모르지 않는 하북의 성주들, 태수들은 최후까지 고민하다가 조조의 병마가 육박해오자 조비를 버리고 조조를 택했다. 무수한 고을들이 원래의 주인을 찾아갔다. 손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 하였으니, 조조는 제 이름값으로 최선의 전쟁을 치러내고 있었다.
“대도독.”
군부의 지휘실에는 주유와 여몽만이 있었다.
“대도독이라 부르지 말라. 치욕적인 이름이니라.”
“주공.”
“오냐.”
“업도의 옹성을 박차고 나가 적을 요격한다고 하셨는데, 아무리 적이 조맹덕이라고는 하나 견실히 지켜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조맹덕의 기세가 들불과 같아 맞불을 놓아 끄겠다는 복안은 이해합니다만, 맞불이 들불만큼 커야만 잡을 수 있는 터, 업도의 전력으로는 위험한 도박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주유는 웃으면서 여몽을 바라봤다.
“물론이다. 백 번 좋게 생각하여 이 주유가 조조에 필적한다고 해도, 야전을 수행할 장수들의 역량이 결코 조조에 미치지 못한다.”
전장에서의 잔뼈가 굵은 장수들은 모조리 숙청되었다. 그러한즉 업도의 병력을 지휘하는 장수들은 대개 저 전국시대의 조괄을 닮아 오로지 입으로만 용병을 해봤던 이들이었고, 또한 그 입으로만 하는 용병이란 것도 시시한 수준이었다.
“이기려고 애를 쓴다면 농성이 올바르다.”
주유가 그렇게 말하자 여몽의 얼굴에 아연한 빛이 떴다.
“허면……”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마시기 위한 차가 아니라 향을 맡기 위한 차가 되기로 하였느니라. 이번 전쟁도 저 시시한 조비란 녀석이 이기는 전쟁이 아니다.”
주유는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천하가 이기는 전쟁이다. 천하를 화평하도록 하는 전쟁이다.”
“그게 무슨……”
화평이란 말이 불길했다. 화평이란 원수의 명분이다. 주유는 지금껏 단 한 차례도 화평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미 결과는 예정되어있다. 조비는 멸망할 것이요, 조조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제갈찬이 이미 천하의 우러름을 받아 가장 높은 곳에 올라있다. 녀석이 중얼거리는 화평은 이제 목전에 다가왔어.”
주유는 그것을 못내 질투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이내 편안해졌다.
“급류에 휩쓸리는데 사지를 휘젓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용한 것은 없다.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