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93
“음, 제갈 종정의 아드님이 과연 기린아라고 하더니, 역시 남다른 통찰력이로군.”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원자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종요는 가만히 웃었다.
“정치보다는 권력을 먼저 맛보게 해야 하네.”
“허면?”
“원자께서는 계집을 즐기시지 않는가?”
종요의 말에 깨닫는 바가 있어 제갈각은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과연……”
제갈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정에서는 구실할 수는 있으나, 원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전적으로 자네에게 달렸네. 자네는 원자의 지음이니까. 아무튼 잘 해주시게.”
제갈각은 종요를 향해 읍했다.
“요즘 조정이 좀 뒤숭숭해요.”
시영은 춘군의 잔에 차를 얌전히 따랐다. 춘군은 한 모금씩 홀짝이는 차보다는 들이 붓는 술을 좋아했지만 엄연히 황실의 서열이 있으므로 시영의 차를 고개를 숙이며 받았다. 시영은 웃으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태자를 지명하실 때까지는 계속 그러지 싶은데요.”
시영의 말에 춘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시영과 춘군 역시 이 일의 당사자였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경쟁자였다. 그런 입장에서 먼저 선뜻 불편한 얘기를 꺼내니 춘군은 다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감지한 시영도 서둘러 진화했다.
“딱히 불편하게 해드리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아, 예에.”
그럼에도 춘군은 불안했다. 종요와 결탁했다가 호되게 혼쭐이 난 전력이 있는 그녀였다. 그렇기에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호방한 기질을 쉬이 드러내지 못했다.
“어차피 태자는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에요. 우리들이 끼어들 계제가 아니죠. 물론 삼황후께서는 원자가 보위에 오르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지만요.”
춘군은 시영의 말에 함정이 있을까 두려워 쉽게 입술을 열지 못했다.
“저는 그래요. 단이가 보위에 오르든 주가 보위에 오르든 똑같은 아들이니까. 권력이라면 질색이에요. 누가 다음 천자가 되든 나는 그 꼴을 보기 전에 차라리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폐하와 한날한시에 죽는다면 정말 꿈만 같을 거야.”
시영은 비밀얘기를 하듯 소곤거렸다.
“권력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폐하를 보면 알아요. 예전에는 막 침을 질질 흘리고 그러던 조무래기와 다름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봐봐요. 승냥이가 따로 없다니까.”
격의 없는 험담에 춘군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의 귀여운 맛이 하나도 없어졌어.”
시영은 그것이 정말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권력은 무서운 거예요.”
그녀는 춘군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우리 그 무서운 거 앞에서 무너지지 말자고요. 우리가 괜히 으르렁거릴 필요가 없어요.”
그 말에 춘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옳고 옳은 말이었으므로.
“다음부터는 이황후도 같이 불러야지. 이것도 권력의 폐해란 것이에요.”
춘군도 긴장이 봄눈 녹듯 누그러져서, 제법 편한 얘기를 시영에게 건넸다.
“옛날의 폐하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혹 우스운 일화를 소개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바라던 바예요. 이런 좋은 얘기는 우리끼리 아니면 공유할 수가 없으니까. 대신 폐하께는 꼭 함구를 하셔야 돼요. 뿔난 성성이처럼 길길이 날뛸 수도 있으니까.”
춘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도 어렴풋이 들은 얘긴데 말이죠. 폐하께서 소싯적 별명이 낭야구자라고 하는데, 그 뜻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나누시오? 짐도 좀 들읍시다.”
나는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와 끼어들었다. 그러자 시영과 춘군은 동시에 놀라며 내 쪽을 바라봤다.
“폐, 폐하! 어찌 기별도 없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꼭 기별을 해야만 하오? 그저 두 황후가 모여서 차를 마신다기에 가던 길에 들렀소이다.”
“여인의 밀담은 지켜주셔야 하는 거예요.”
나는 툴툴거렸다.
“그 밀담에 사내가 끼어들면 안 되는 것이오? 짐은 사내 중에서도 천자란 말이오.”
“천자라 해도 여인의 밀담에 사내는 금지예요.”
“퍽 엄격한 법도구려.”
“헌데 어딜 가시던 길이셨는지요?”
“아, 동방의 백제국에서 사신을 보냈다기에 그를 접견하고자 가는 길이었소. 그를 맞아 연회를 열까 하는데, 황후들도 같이 가십시다.”
“백제국과는 본디 연이 깊지 않았는데 사신을 자주 보내는군요?”
“아, 짐이 삼한의 제국(諸國)과 깊이 통교하고 있지 않소? 짐이 그들을 각별히 여겨 금으로 만든 나비를 보내주었더니 이를 잊지 않고 답례를 한다 하여.”
춘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신첩이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많은 사방제국 중에서 유독 삼한을 가까이 여기시는지 말입니다.”
말 못할 사정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공자께서도 구이(九夷, 동쪽의 오랑캐)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셨고, 구이가 누추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답하시기를 군자가 그곳에 살거늘 어찌하여 누추하냐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그때부터 무언가 삼한이 가깝게 느껴지더이다.”
“그런가요.”
문장에는 어두운 여춘군에게 어려운 말이었다. 나는 공융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든 백제국의 사신이 왔다고 하니 같이 갑시다. 아조의 미색을 저들에게 자랑해줘야겠소.”
그 말에 시영이 가볍게 퉁을 놨다.
“아조의 미색이라면 이황후만 데려갈 일이시지요? 신첩들도 엄연히 나라의 어미이거늘 어찌 미색으로만 자랑하려 하십니까?”
나는 그녀에게 오랜만의 질린 표정을 지어주었다.
“제발 고운 말은 곱게만 들으십시다.”
“고운 말이 아니니까 드리는 말씀이지요.”
나는 빠르게 항복했다.
“내가 졌소.”
시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나를 따라 나섰다. 혹자는 천자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떠드는 모양인데, 과연 그러한가.
“소인, 백제국 초고대왕의 명을 받들어 신의 천자를 알현하고 양국의 화호를 다지고자 하옵니다.”
백제의 사신은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상석을 권했다.
“먼 곳의 이웃이 이렇듯 사람을 보내어 화호를 말씀하시니 짐은 심히 기껍소이다.”
“황송무지로소이다. 폐하께오서 외방을 번국으로 두지 않으시고 벗으로서 대등하게 두시니 왕께서 심히 감사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짐이 그대를 비롯한 외방의 사신들을 모아놓고 천명하기를, 사대와 조공을 폐하여 소화평을 도모하고자 했소. 마땅히 벗의 예로써 대우할 것이오. 그러하니 그대들도 짐과 아조를 가까운 벗으로 삼아주기를 바라오.”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래, 왕께서는 잘 계신가.”
나의 먼 조상과 교우의 예를 가진다는 것이 새삼 가슴이 뛰었다.
“예, 왕께서는 오래 전 즉위하시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안정되니 이렇듯 바다 건너의 폐하께 예를 다할 수 있사옵니다.”
백제가 복잡한 내부사정을 지녔음에도 먼 곳까지 사신을 보내는 것은 해외의 인정을 받아 한반도 내의 선진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일일이 헤아릴 의지도, 필요도 없었다. 다만 먼 곳에서 벗이 와주니 기뻐할 뿐.
백제의 사신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께서 이르시길, 백제국의 여인이 참으로 절색이니 부디 가까이 두시어 즐기시라 하셨나이다.”
“아.”
나는 짧게 탄성을 내지르고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시영과 춘군, 그리고 따로 부른 교의 따가운 시선이 세 방향에서 쏘는 까닭이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혼자 올 걸.
“그, 그렇구려……”
백제국의 사신이 온다는 소식에 만조백관이 모두 연회에 참석해 있었다. 원자 제갈단과 이황자 제갈주도 그리했으며, 제갈각과 종육 등 고관의 자제들도 말석이나마 꿰차고 있었다.
사신은 여인에게 눈짓을 보냈고, 여인이 다가와 절을 올렸다.
“소녀 백제국 좌보(左輔, 백제의 재상)의 여식인 을나고니라 하옵니다.”
“을나고니.”
“예, 폐하. 이렇듯 폐하를 알현하게 되어 참으로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천자 제갈찬은 그녀를 꼼꼼히 보지 못했다. 감시의 눈빛이 지엄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감시하는 눈이 없는 자들은 그녀를 꼼꼼히 보았는데, 개중 원자 제갈단도 그러했다.
“허어… 정말 절색인걸……”
그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를 주목하고 있던 제갈각은 넋 나간 듯한 원자의 얼굴을 보고 가만히 입술을 쓸었다.
을나고니의 자태는 확실히 고왔다. 곱다는 것이, 그저 보기에 흐뭇하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멀쩡한 사내도 홀려버릴 정도였다. 천자 제갈찬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여인으로 하여 아조의 정사를 혼탁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미 미색이라면 삼황후로 차고 넘치는 분수인 천자였다. 게다가 삼엄한 감시의 눈길로 하여 천자 제갈찬은 그야말로 보기에 흐뭇한 정도로만 을나고니의 미색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정말 아름답다……”
그러나 혈기가 끓기로는 죽 끓듯 하고 건강하기로는 야생마에 비견할 제갈단에게는 정말 가만히 앉아있기도 좀이 쑤실 정도의 충동을 느꼈다. 잘록한 허리와, 허리에서 떼어낸 것을 덧붙인 듯한 크기의 풍만한 가슴을 보고 제갈단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