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95
“원자 전하, 을나고니가 마음에 드십니까?”
제갈단의 대답이 이례적으로 빨랐다.
“응.”
“허면, 가지시면 되지요.”
이에 제갈단은 김 샌 표정으로 퉁을 놓았다.
“어찌 가진단 말이냐? 이미 부황께서 아우에게 을나고니를 넘기겠다고 천명하셨느니라.”
“왜 못 가집니까? 하긴, 지금의 원자께서는 이루기 힘든 요원한 꿈이지요. 지금의 원자시라면 말입니다.”
“지금의 나? 허면 지금의 나가 아니라면 그 계집을 가질 수도 있단 말이냐?”
제갈각은 숨죽여 웃었다.
“그럼요. 원자께서 원자에 머무르지 않으시면 됩니다.”
“자세히 얘기해라. 나 머리 나쁘다.”
제갈각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태자가 되십시오.”
“뭐?”
“태자가 되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태자는 나라의 근본, 천자의 뜻도 가끔은 그 앞에서 무력해지기 마련이지요. 더군다나 오랑캐 계집의 처분쯤이야 한발에 어린 싹이 죽듯 쉬운 일이지요.”
“그럴까?”
제갈각은 확신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음만 잡수시면.”
“으음……”
“마음만 잡수십시오. 허면, 제가 원자 전하를 태자 전하로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제갈단은 펭 웃었다.
“비서랑 나부랭이가 무슨 수로?”
“제가 돕고, 승상이 돕고, 백각의 각신들이 돕고, 또한 삼황후께서 도우시면 가능합니다. 어디까지나 장자승계의 원칙이 택현론(擇賢論, 어진 사람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에 우선하는 법이요, 무수한 역사의 사례들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니까. 마음만, 마음만 잡수십시오.”
제갈각은 슬그머니 제갈단의 손을 잡았다.
“허면, 그 계집도 잡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유엽과 독대했다. 유엽은 항상 깨어있었다. 푸진 연회에도 그는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청금의 요원들이었던 어사대의 이러저러한 이들이 유엽의 깨어있는 귀에 쉴 새 없이 나라 안팎의 사정을 고했다. 유엽이 중한 것을 골라 내게 아뢨다.
“비서랑 제갈각의 발이 바쁩니다.”
“녀석, 제 아비를 닮았으면 좋았을 걸. 넘치는 지모를 성급한 그릇이 담아내지를 못한다.”
“부쩍 제갈각이 원자의 침소에 머무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나는 약간 취한 정신을 따끈한 찻물로 달랬다.
“둘이 몸을 부대끼지는 않을 것이고, 허면 그 목적이야 뻔하다.”
“비서랑 제갈각과 종 승상이 합을 짠 듯 백제녀를 이황자 전하의 배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수상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상한 것도 좀 수상한 게 아니지.
“동방의 여인 하나가 어쩌면 아조의 중대사를 결정 지을지도 모를 일이구나.”
나는 차를 마시려다가 물리치고, 다시 술을 들게 했다. 유엽은 내 고독한 고뇌를 위하여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고뇌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졸지에 제갈주는 자신의 침소에 생면부지의 여인을 들이게 되었다. 주의 나이도 슬슬 정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범상한 또래들과는 달리 주는 오로지 서책만을 가까이하고 정치를 엿보는 일에 시일을 많이 소비했다. 한 쪽이 차면 한 쪽이 비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니 여인을 깨닫는 쪽에는 도리어 범상한 또래만도 못했다.
그러한 탓으로 버젓한 여인을 앞에 두고도 주는 풀을 본 사자처럼 물끄러미 멍청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저… 차를 들겠는가?”
아직 화어(華語, 중국어)에 능하지 못한 탓으로 을나고니는 미간만 살짝 좁힐 뿐이었다. 주가 지필묵을 들어 음다(飮茶, 차를 마심)라고 쓰자 그제야 말뜻을 알았다. 그러나 미간에 잡힌 을나고니의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그녀는 차를 원하지 않았다. 몸을 원했다.
을나고니는 그야말로 방년, 꽃다운 나이이니 그녀도 남자를 원했다. 그녀가 특별히 음탕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욕구였다. 한밤에 몸 대신 차를 권하는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점잖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 허면, 음식이라도 좀 들겠는가?”
을나고니는 음식이란 화어를 알아듣고 안쓰럽게 웃었다. 당최 이 소년의 말은 야밤에 적당하지 않았다.
“전하는 소녀를 사랑하지 않으신가요?”
을나고니가 묻자 주는 당혹했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찻잔만큼 가까웠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우주만큼 멀었다.
“잘 모르겠네.”
“허면, 소녀가 알려드릴까요?”
을나고니가 그렇게 말하면서 얇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자, 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아, 아닐세. 차차……”
지엄한 명령이 그러하니, 을나고니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옷을 입었다. 제갈주는 을나고니에게 드넓은 침상을 양보하고 자신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밤을 새웠다. 을나고니에게 그 침상은 벌판처럼 넓게 느껴졌다. 남녀가 모두 잠들지 못한 밤, 둘의 생각이 각자 복잡했다.
결국 천자의 배려로 서로를 알게 되어라 주어진 시간은 어색한 거리만을 확인하고 끝났다. 을나고니는 다시 객관으로 보내졌다. 그녀의 표정에는 언뜻 수치심도 엿보였다. 여인으로서 사내를 넘어뜨리는 데 실패한 열패감도 엿보였다.
객관으로 보낸 을나고니를 함부로 다시 누군가의 침소로 보내지 못했다. 일단 관계를 맺었건 맺지 않았건 이황자 제갈주와 한 공간을 썼던 그녀였다. 이미 이황자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누구에게 보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다시 섣부르게 일을 처리했다가는 민망한 상황이 재발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백제와의 화호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 터였다. 나는 신중하고자 했다.
“이황자가 아주 부황을 빼다 닮았군요.”
시영은 나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반농반진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길길이 날뛰었다.
“황후! 어찌 그리 말씀하시오? 황후에게 먼저 다가가 결국 쟁취해낸 장본인이 짐이란 것을 잊은 것이오?”
시영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솔직히 남자로서의 재능은 꽝이었어요.”
“황후!”
“왜요, 천자를 능멸한 죄로 다스리시게요?”
“황후의 촌평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군! 적어도 짐은 여인을 앞에 두고도 어리둥절하지 않았소. 방향만은 명백했지!”
시영은 살짝 몸을 돌아 누이며 일축했다.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황후가 나를 과소평가하니 어쩔 수 없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시영에게 파고들었다.
“사내다움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겠소!”
내가 전투적으로 달려들자, 시영은 손으로 찰싹 내 손바닥을 내리쳤다.
“가족끼리 왜 이래요!”
을나고니의 기분을 체험했다. 서러운 밤이었다.
을나고니가 객관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제갈단의 귀에도 들어갔다. 을나고니는 혼자서 뭘 하고 있을까? 듣자하니 아우가 제대로 을나고니의 객수를 위로해주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넘치는 한창 때의 정욕을 어떻게 풀 것인가. 혼자서 수음을 할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제갈단의 마음이 더욱 졸아 들었다.
“안 되겠다.”
그는 야음을 틈타 객관으로 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눈을 감아도 어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환관들과 궁녀들이 따르겠다는 것을 겁박하듯이 뿌리쳤다.
객관에는 지키는 자들이 여럿 있었으나 원자의 지체가 높고 높아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했다. 태자는 그들에게 물어 남의 이목을 피해 잠입할 개구멍의 위치를 알아냈다.
“얘.”
마침내 을나고니가 머무는 곳까지 닿은 제갈단은 속닥거리는 소리로 을나고니를 불렀다.
“얘, 백제녀야.”
을나고니라는 이름이 제갈단에게 지극히 어려웠으므로, 그는 백제녀라고 불렀다. 홀로 외로움을 달래던 을나고니는 자신을 부르는 속삭임에 귀가 쫑긋 섰다.
“여기다, 여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다. 을나고니가 난간을 붙잡고 빠끔 고개를 내밀자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십니까?”
제갈단이 대답했다. 어둠 속의 음성은 더욱 간질거리는 맛이 있었다.
“너를 사랑하는 자이니라.”
낯 뜨거운 소리였지만 을나고니에게는 달콤하게 들렸다. 을나고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너를 만나러 가도 되겠니?”
그러나 을나고니는 재상가의 여식인 동시에 백제국을 대표하여 신에게 보내진 화호의 징표였다. 몸가짐을 함부로 했다가는 그 여파가 개인에 그치지 않을 터였다.
“저는 남을 함부로 들일 수 없어요.”
“괜찮다. 나는 지체 높은 자이니라.”
“누구신데요.”
“이 나라의 태자가 될 몸이니라.”
“허면 제가 당신을 들여도 폐가 되지 않겠어요?”
“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폐가 되리라.”
그렇게까지 말하니 을나고니가 제갈단을 부르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을나고니는 문을 활짝 열어 그를 맞이했다. 제갈단의 모습이 호롱불에 은은히 비쳤다. 을나고니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적당히 그을린 얼굴에 잘 자리잡은 이목구비,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팔 근육이 그녀를 매혹시키기에 알맞았다.
그것은 제갈주의 미음처럼 허여멀건 피부와 나뭇가지나 제대로 쥘까 싶은 연약한 팔뚝과 비교하자면 더욱 사랑스러웠다. 을나고니의 얼굴에 사랑이 떠올랐다.
“아, 정말 아름답구나.”
제갈단이 가까이서 본 을나고니 역시 제갈단의 마음을 끓게 하기에 족했다. 둘이 그러했으니 결과야 명약관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