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399
제갈단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숨이 멎을 때까지 느꼈을 고통을 참을 수 없었고, 그녀의 주검을 반역의 땅이 버려두고 의기양양 개선한 자신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건, 여인과 통하기 위해 태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자신의 치기 어린 마음가짐이었다.
“이것이 정치입니다.”
단호한 육의의 말이 그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아, 나는 얼마나 잘못된 인간인가. 사랑을 하려고 정치를 하다니. 그렇게 무수히 목숨을 해쳐야 하는 사업을 사랑을 하려고……
제갈단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나는 전장에서 돌아온 후장군 육의를 격려한다는 구실로 그를 내 침전으로 소환했다. 육의는 부리나케 내 소환에 응했다. 이미 불콰하게 취한 그에게 나는 술 대신 차를 내주었다.
“천방지축을 상관으로 섬기느라 고생이 많았어.”
내가 말하자, 육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도리어 신이 배웠나이다.”
“배우다니.”
“원자 전하께 말입니다. 전하께오서는 신이 진두에 서는 것을 만류하자, 친히 지필묵을 대령케 하여 신과 동남도독이 진언한 바를 글로 남기셨습니다. 그리하여 혹 변을 당한다 하더라도 신들의 책임을 면케 배려해주셨습니다.”
나는 차를 마시며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원자에게 그런 면이 있었던가.”
“그리고 폐하께 연좌제를 폐해달라는 주청은 참으로 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나, 칼을 가까이 하면서도 사람을 아낄 줄 아는 마음은 명징한 것이니 얼마나 기꺼워하실 일이겠습니까? 신은 지금껏 무수한 인명을 해치면서도 그와 같은 생각에는 닿지 못했습니다.”
“그럼, 누구 아들인데.”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육의에게 동감했다.
정위 상존과 백각대부 사마의는 한동안 만나지 않았다. 신에 귀부한 이후로, 둘은 중용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한 시선은 꼭 그들을 미워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전적에 지레 겁을 먹고 조심하는 까닭이었다.
천자 제갈찬은 그간 싸워오면서 백중세에서 근소하게 패배한다든지, 적은 피해를 입고 물러난다든지 하는 패배를 겪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병가지상사였다. 질 때는 적게 지고, 이길 때는 대승을 거둬 마침내 천하일통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쓰디 쓴 잔을 마신 적이 있었으니, 바로 백수관전투였다. 그것은 사마의의 기략에 의한 것이었고, 상존은 그런 사마의를 거느린 장군이었다. 그런 탓으로 백관들은 그들과 적당한 친교는 유지하면서도, 자파 깊숙이 들이지는 않았다. 그를 가까이했다가 혹 천자의 눈총을 받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상존과 사마의도 그러한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상존이야 애초에 복잡한 정치적 수싸움에는 질릴 대로 질린 사람이었고, 사마의는 굳이 한쪽 정파에 치우쳐 자신이 또렷이 규정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들이 오랜만에 뭉쳤는데, 사마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사마의는 작금의 상황을 자신의 운명을 가를 가장 가치 있는 시간으로 여겼다. 후발주자가 선도하는 위치에 이르기 위한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첫째, 선발주자가 탈락하거나, 둘째, 선발주자보다 빨리 나아가거나.
그 기회가 도래하려고 했다. 태자 책봉. 원자 제갈단이냐, 이황자 제갈주냐. 조정이 둘로 갈린 상황에서 둘 중 하나로 태자가 결정될 경우, 그 반대쪽은 썩은 동아줄을 잡은 대가로 대대적으로 실각할 터였다. 개중 몇몇은 실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사마의가 정확한 선택을 하고 그 물결에 올라탄다면 그들이 그 자리에 머물러있어도 얼마든지 추월이 가능할 터였다.
그러자면 정확한 선택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홀몸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의 중량감을 확보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사마의는 상존을 택했다. 상존은 정위로서 사법을 책임진 중신이자 야심마저 없는 인물이니, 더없이 좋았다.
“정위,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사마의의 말에 상존의 얼굴에 잠깐 긴장이 어렸다.
“지금이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은 나 또한 알고 있네.”
“우리가 무슨 권세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이 위협받기에 자위적인 차원에서라도 뭉쳐야 합니다.”
사마의는 구실로 권세 대신 생존을 내밀었다. 상존에게 권세란 저자에 구르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것이기에. 상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중달만 믿어.”
“얼마 전 천자께서 이황자께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소인을 꼽았다고 합니다.”
“오잉? 그래? 이황자가 직접 말씀하시던가?”
사마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황자께서 감사하게도 시생을 기껍게 보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것 좋은 일이군! 허면 이황자께 줄을 대는 것인가? 듣자하니 학식으로는 원자가 이황자를 따르지 못하고, 얼마 전 개선했지만 그 공을 연좌제 폐지를 운운하는 발언으로 다 까먹었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사마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릅니다. 연좌제 폐지를 입에 담는 원자께 황상께서는 멍청한 말이라고 하시면서도, 그 마음이 화평의 시작이라고 하셨으니. 아직 안개 속이라고 봐야 합니다.”
“으음, 역시 정략은 어렵네.”
“이황자께서 시생을 기꺼이 여긴다고 덥석 섬길 수는 없습니다. 허면 이황자께서 낚시꾼이 되는 것이고 시생은 겨우 미끼를 문 고기가 될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성공하기 힘들지요. 대신.”
“대신?”
“이황자를 미끼로 삼는 것은 좋지요. 정략을 관측할 유용한 도구로 쓰는 것입니다.”
상존은 콧수염을 살짝 잡아당겼다.
“퍽 말투가 건방지구먼.”
“언제는 안 그랬습니까?”
사마의는 웃었다.
“아마 황상께서도 시생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원자를 택하든, 이황자를 택하든 일대 정국 개편은 필수니까요.”
사마의는 덧붙여 말했다.
“종 승상을 위시한 사족들은 폐하께 큰 부담입니다. 원자를 보위에 올리면 반드시 그들이 물렁하게 여겨 달려들 것이고, 이황자를 보위에 올리면 그들이 이황자의 정적이 될 테니까요. 그들 중 쭉정이를 솎아내는 일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황상께서는 그에 대적하기 위해 흩어진 야인들을 규합할 것입니다.”
“흩어진 야인이라면?”
“광록훈 장합이나 상장군 조인, 중랑장 여몽, 그리고 제 앞에 계신 정위나 저 같은 관료들 말이죠. 끄나풀이 없는 자들.”
“종 승상에 대적하기 위해서라면 백각경이 이끄는 본파를 동원해도 충분하지 않은가?”
사마의는 미소를 띠었다.
“천자는 종 승상을 배척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백각경께 더 많은 힘을 실어주는 것을 원치 않아 하십니다. 허면 백각경의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부스러기 같은 저희를 모아 종 승상을 물리치게 하고, 그 여백을 채우도록 하여 다시 백각경과 균형을 맞추게 하고 싶으신 겁니다.”
그럴 듯한 관측에 상존은 고갯짓만 할 뿐이었다. 그때 환관 하나가 사마의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사마 대부, 천자께서 찾아계십니다.”
사마의는 상존에게 찡긋, 눈짓을 했다. 거 봐요. 천자께서 부스러기를 모으고 계신다니까. 상존은 과연 그렇다는 표정으로 무언의 공감을 표했다.
“아, 즉시 가겠네. 침전으로 가면 되는가?”
“예, 대인.”
사마의는 의관을 정제하고 천자의 소환에 즉각 응했다.
나는 그때 이황자 주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연신 기침을 콜록거렸다. 나는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의 기침이 독하구나. 병세가 완전히 호전된 것이 아니었더냐?”
“예, 부황. 황송하옵게도 소자에게 병마는 가까운 벗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쯧쯧 혀를 찼다.
“벗으로 둘 것이 없어서 병마를 둔단 말이냐.”
“산월의 의원이 말하기를, 소자가 단명할 상은 아니나 일생의 절반은 병상에서 자리보전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얀 놈, 의원이란 작자가 병을 낫게 할 생각을 해야지! 당장 그놈을 산월로 내쫓고 다른 이를 들이리라.”
주는 쓸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정하십시오, 부황. 의원이 환자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도리어 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도 산월의 약이 소자의 몸에 잘 받는 탓으로 이렇게 부황과 마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다만.”
나는 주와 대화하는 도중, 문풍지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살짝 드리우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짐짓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너의 몸이 그토록 허약하니 대사를 집행할 수 있겠느냐? 짐이 보건대 불씨(佛氏, 석가모니)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마음 역시 사람의 몸에 달려있는 것이다. 네 몸이 허약하니 어찌 마음이 강건하기를 바라겠니? 대업을 맡기기에는 어렵도다, 어려워.”
주는 고개를 얌전히 숙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환관의 목소리가 문풍지 밖에서 들렸다.
“폐하, 백각대부 사마의 입시이옵니다.”
나는 손을 저어 주를 물리쳤다.
“너는 이만 가보거라.”
주는 일어나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나는 소매를 다시 얌전히 다듬으며 환관의 말에 대답했다.
“중달이 왔군. 들라하게.”
내 말에 문이 열렸고, 주와 사마의가 교차했다. 주는 사마의를 지나칠 적에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연신 독한 기침을 했다. 사마의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내 앞에 절을 올렸다.
“신 백각대부 사마의가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음, 자질구레한 예의는 됐네. 와서 앉지.”
사마의의 눈빛이 나에게 한 번, 주에게 한 번 갔다.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어떤가, 합비에서의 생활은.”
“배려해주신 덕택으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폐하께서는 신을 독대하신 적이 없는데, 오늘 부르신 까닭을 감히 여쭈어도 될는지요.”
“뭐 그리 급한가. 먼저 차라도 한 잔 하고.”
“아, 예.”
나는 직접 그에게 차를 우려 내주었다. 사마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차를 몇 모금 머금고 운을 뗐다.
“경은 짐에게 참 특별한 신하일세.”
사마의는 공손히 내 말을 경청했다.
“참파도, 본파도 아닌 이는 백각에서 자네가 유일하지. 솔직히 말할까. 짐은 경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네. 백수관에서의 구원이 아직 남아있거든. 짐의 그릇이 작아서 쉬이 잊히질 않는군.”
“그 무례는 신이 평생 껴안아야 할 대죄이옵니다. 거듭 사죄드리나이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짐은 경을 인간적으로 우대하지는 않으나, 천자의 입장으로 보건대 그 쓰임이 참 많은 신하라고는 생각해.”
“황망하나이다.”
“어때, 짐이 경을 좀 써도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