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405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놀라지 마.”
그날, 깊은 잠을 잤다. 깊은 잠에서 꿈을 꿨다. 잠이 깊을수록 꿈은 희미해지는 법인데, 어쩐지 깊은 잠이면서도 선명한 꿈이었다.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구분이 모호할 정도로.
나는 풀조차 없는 광야에 홀로 서있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이 있다면, 빛이 있으라, 하는 첫 번째 명령 후에 세상 만들기를 망각해버린 상태와 같았다. 흑암이 물러가고 빛이 그 빈자리를 메운 드넓은 땅만 있었다. 외로웠다.
그때 저 멀리 사람의 형상이 있기로, 나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다름 아닌 공융이었다. 그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먼 곳에서 친구가 와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이군요, 신왕 전하.”
그는 내가 등극하기 전에 죽었으니 어쩌면 신왕이라는 부름이 오히려 적당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나에게 차를 내주었고, 나는 그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자 장면이 전환되었다.
내가 든 찻잔은 온 데 간 데 없어졌다. 대신 눈앞에 큼지막한 만두가 담긴 접시가 있었다.
“오라버니, 시장하면 만두 하나 들어요.”
“아……”
윤랑이 순수한 웃음을 지으면서 젓가락으로 만두를 집어 나한테 내밀었다. 만두를 꽉 채운 고기의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나는 뭉클하게 웃으면서 그것을 한 입 가득 넣으려는데, 만두는 사라지고 정작 내 입에 들어온 것은 쓰디 쓴 독주였다.
“크크, 임자, 아직도 술을 잘 받는구먼.”
원술이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급격한 장면 전환에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고, 편안히 웃으면서 대답 대신 원술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기분이 흡족해진 원술은 천천히 일어났다.
“임자, 오랜만에 춤이라도 한 번 출까.”
원술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들썩이는데, 그 들썩이는 움직임을 따라 공간이 뒤집히고, 원술의 콧노래와 춤사위가 엄청난 속도로 멀어져갔다. 원술이 한껏 뻗친 팔은 장검으로 변했다. 유복의 손이 그 장검을 받치고 있었다. 유복의 툭 불거진 배가 반가웠다.
“합비공! 서량 땅에 흘린 이 유복의 피를 아직 잊지 않으셨지요?”
내가 유복에게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유복의 바로 옆에 여포가 등장했다. 그 떡 벌어진 덩치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흥! 장인을 잡아먹은 못난 사위새끼!”
“으아, 죄, 죄송……”
내가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몸을 배배꼬며 더듬거리자, 여포와 유복은 허리를 젖히고 폭소했다.
“크하하하! 그래도 주제에 제법 잘 해냈었다! 애송이 주제에 전락을 종식하고 천하를 일통하였어!”
나는 그들의 폭소에 마음 한쪽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서너 발짝 다가가려는 찰나, 그들은 그대로 자기 심장에 칼을 파묻었다.
붉은 피가 팍 터지며 내 시야를 붉은색으로 가득 채웠다. 나는 혈관 속에 부유하는 적혈구가 된 듯 알 수 없는 기류에 몸을 맡겨 흘러갔다. 나는 붉은 공간을 타고 흘렀는데, 머리만 남은 낙준이 나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며 외쳤다.
“이놈! 제갈찬!”
그 뒤를 유비와 조비, 조홍의 대가리가 따라갔다.
“이노옴!”
나는 대가리만 들썩이는 그들을 기분 좋게 무시해주었다. 붉은 기류는 내 몸을 어딘가에 떨어뜨렸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벌린 다리 사이로 날카로운 쇠붙이가 날아와 꽂혔다.
“윽!”
나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그 쇠붙이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관우의 부리부리한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맹수의 눈빛에 나는 초식동물이 되어 얼어붙었다. 관우의 완력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어깨가 쑤셔오는 듯했다.
관우는 말없이 나를 한참 내려보다가, 그 무거운 입술을 뗐다.
“시간이 다 되었다.”
“화, 화평의 내림말씀……”
내가 간신히 중얼거리자, 관우는 눈을 지그시 감고 탄식했다.
“그래, 달성되었다. 나를 불명예 속에서 죽이면서 달성되었다. 화평은.”
관우는 땅에 박힌 창을 뽑아 내 목을 겨누었다.
“시간이 다 되었다. 돌아가라!”
화평 4년 12월, 제께서 사라지셨다. 죽음을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붕어라고 쓰지 못한다. 태자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금을 통틀어 천자가 사라진 것은 유례가 없으므로, 황실과 조정이 크게 당혹하였다. 세 황후는 울다가 정신을 놓았고, 만조백관은 황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졸도하였다.
정비(正妃) 원씨가 제께서 남긴 유훈을 찾았다. ‘짐이 갑자기 사라지거든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태자에게 제위를 물려줄 것’이라 적혀있었다. 그대로 따랐다.
화평 5년 정월, 태자가 즉위하셨다. 연호를 명조(明朝)로 고쳤다.
명조 원년 2월, 선제의 시호를 화평으로 하였다. 본디 시호를 한 글자로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제께서 특별히 명하시기에 화평 두 글자로 올렸다.
사관이 평한다. 제께서는 빈손으로 일어나 천하일통의 위업을 달성하셨다. 그것은 화화평평의 높은 뜻 위에 세워졌으니, 그 뜻과 행함이 눈부시고 눈부시다. 마땅히 화평제본기를 써서 남김이 옳으나, 제께서는 그저 임금에 그치지 않고 화평의 도로써 선비를 깨우치고 백성을 가르쳤으니 가히 큰 스승이시기도 하다. 제께서는 임금이시며, 스승이시며, 또 뭇 백성의 아버지이셨으니, 군사부일체란 제를 위한 말이리라.
그렇기에 화평제라 칭하는 것보다는, 마땅히 큰 스승으로서 자(子)를 붙여 칭송함이 옳을 것이다. 이에 화평제본기를 찬술하는 대신 화평자전이라 이름 붙여 찬술한다.
나는 눈을 떴다.
“아……”
눈을 뜨자마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고요한 궁중에 익숙했던 내 귀가 왕왕 울렸다. 나는 살짝 귀를 틀어막았다.
“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꿈은 아니었다. 꿈은 생각해낼수록 증발하는 법이지만, 그곳에서의 내 시간은 아주 또렷이 기억되었다. 전장에 무성했던 창칼의 부딪치는 소리, 세 황후와 나눴던 사랑의 냄새, 정치의 순간에 긴장으로 일렁이던 신료들의 목젖이 일렁이는 모습. 모조리 기억되었다.
“젠장, 이게 무슨 심통이람!”
시영이랑 제대로 작별도 못했단 말이야. 제갈량에게 태자의 뒤를 제대로 부탁하지도 못했단 말이야. 가후의 능글맞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싶기도 했고…… 이게 대체 무슨 심통이냔 말이야. 심통을 부리는 까닭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곳에서의 시간도 아주 생생히 기억났지만, 이곳에서의 시간, 내 몸이 겪었되 내 정신이 겪지 않은 이곳에서의 3년 역시 모조리 기억났다. 기억나는 정도가 아니라, 이곳에서의 생활, 문화, 관습, 지식, 인간관계가 내 세포 하나하나에 깃든 듯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고된 시간이었네. 내 정신으로는 도저히 해내지 못했을 인고의 학습과 엄격한 조직에의 적응. 그것을 나를 대리한 영혼이 용케도 해내주었네.
마지막 사법시험을 패스하고, 나는 검사가 되어있었다.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팔자 한 번 시원하게 고쳤네. 나는 물끄러미 내 목에 걸린 신분증을 내려다봤다.
대검찰청. 김윤.
김윤은 내 이름이고, 대검찰청은 아마… 내 소속이겠지. 3년 전에는 어느 고서점의 이것저것 하는 알바생이었는데.
나는 다시 동묘에서 눈을 떴다. 관우의 목상이 그대로 세워져있었다. 꿈속에서, 혹은 전장에서 마주했던 그의 부리부리한 눈빛이 생각나서 나는 얼른 시선을 회피했다.
내가 동묘 앞에 철퍽 주저앉아있는 관계로, 익숙하되 익숙하지 않은 21세기 서울의 복식을 한 사람들이 힐끔힐끔 바라봤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내 뒤를 따르는 무수한 환관과 궁녀들은 없었다.
나는 지독한 악연으로 점철돼버린 관우와의 시간들을 기억하며, 관우의 목상에 꾸벅 인사를 올렸다.
저벅저벅 걸어서 동묘의 밖으로 나왔다. 원래 동묘 주변에는 구제시장이 제법 넓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내 눈에는 내가 알던 풍경이 아니라 퍽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관우를 위해 지은 동묘의 족히 서너 배는 돼 보이는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동묘를 지은 양식과 유사한,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었다.
그리고 내 뇌에는 저것이 누구를 위한 건물인지 각인이 돼있었다.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화평사 和平祠 Hwapyeong-sa’
화평사. 누구를 위한 건물인지, 이제 누구나 알 것이다.
이 근처의 지하철역도 동묘앞역이 아니라, 화평사역이 되어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안으로 들어갔다.
동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마구 붐비고 있었다.
“크핫!”
나는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화평사의 긴 복도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금칠을 한 거대한 조각상이 나와 마주하게 되었는데, 저 얼굴을 보라지! 어설프게 짐의 모습을 흉내 낸 저 얼굴을 말이야!
그리고 그 좌우로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대략 열 명 정도 되었는데, 친절하게도 그 조각에는 다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익숙한 이름들.
가장 큰 금칠 조각상은 화평제 제갈찬 和平帝 諸葛贊 Jegal-chan the peace,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서있는 여인상은 황후 원시영 皇后 袁翅瀛 Won-siyeong the queen.
그 다음으로 큰 좌우의 조각상, 문관은 승상 제갈량 丞相 諸葛亮 Jegal-lyang the
chancellor 무관은 태위 여포 太尉 呂布 Yeo-po the commander.
나는 중국식 병음이 아니라 우리 발음을 그대로 적어놓은 것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내심 반가웠다.
다시 그 좌우로는 백각경 가후와 태위 손관, 다시 그 좌우로는 대도독 노숙과 서남도독 좌자, 다시 그 좌우로는 어사대부 유엽과 좌장군 허저.
다들 반가운 얼굴들인데, 너무 어설프게 닮아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노구도 넣어줘야 맞는데 말이야. 반림도 그렇고, 조운이나 장료, 감녕도……”
나는 안타깝게 배제된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조각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그 앞에 설치된 설명을 찬찬히 읽었다.
화평사, 보물 제142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명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동맹국인 명은 즉각 대군을 파병하여 적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명의 만력제는 ‘지난날 신왕조의 화평제께서 삼한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이래로 양국은 깊은 우애를 나누었다. 어찌 오랜 친구를 버릴 수 있겠느냐’며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강행했다.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선조는 전란이 끝난 후, 신화평제를 기리는 사당을 세워 조명 양국의 영원한 우애를 다짐했다.
화평사에서 기리는 신화평제는, 동아시아 고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된다. 조공-책봉의 수직적 국제관계의 전통을 계승하지 않고, 내정불간섭•우호친선의 원칙을 확립하여 수평적 국제관계를 기반으로 한 소화평 개념을 도입했다.
이 소화평 개념은 근대까지 계승되어 동아시아 각국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문명을 보존하고 상호간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1912년, 화평사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1945년 광복 후 한중합작으로 화평사를 재건했다. 1994년, 장쩌민 당시 중국국가주석이 방한하여 화평사에 참배하고 한중 양국의 영원한 친교를 강조했다. 2002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화평사를 방문하여 ‘내가 가장 존경하는 해외의 역사인물은 단연 신화평제다’고 말하며 ‘소화평의 대화평으로의 이행은 우리 시대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풋.”
나는 몸을 배배꼬며 그 앞을 물러났다. 화평사의 규모는 크기도 커서, 전경을 다 둘러보는 데도 퍽 많은 품을 들여야만 했다.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은 한중 우호의 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 있을 만한 까닭이 있었다. 아주 훌륭한 유물 한 점이 전시되어 있었거든. 그 설명을 그대로 인용해보면 이렇다.
화평금접 和平金蝶, 국보 제320호, 3세기 백제, 신화평제가 백제 초고왕에게 선물한 금제공예품. 나비의 형상을 본떠 금을 세공하였다. 나비의 날개에는‘짐은 삼한을 사랑한다 朕愛三韓’고 적혀있어, 한중 양국의 오랜 교류의 역사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경주(당시 서라벌)의 왕궁에 보관하였으며,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모두 국보로서 간직했다.
그렇게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는데, 내 귓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푹 파고 들었다.
“그랑께, 요 화평사는 다 좋은디 한 가지 오류가 있단게요. 화평제 내외를 위시혀서 가장 공이 많은 신하 여덟 명의 조각을 갖다가 놨는디, 서남도독 좌자란 사람을 거의 끄트머리에다 박아놨더 이거시요. 근디 이것은 순 엉터리란 말여! 역사에넌 기록되지 않었는디 그 옛날 쪼조가 화평제를 궁지에 몰아넣었을 때 좌자란 사람이 나서서 쪼조의 불알을 터트려불구……”
노인의 목소리였는데, 그의 장광설을 듣던 어린 아이들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르르 웃으며 내놓고 무시를 했다.
“무슨 조조의 불알을 터트려요! 할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가이드가 너무 뻥이 심한 거 아녜요?”
“머, 머시라고? 뻐엉? 이 씨벌, 진짜랑께!”
나는 쿡쿡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아요? 조조 불알 터지는 걸 직접 보기라도 했어요?”
“답다배 죽겄네, 참말로! 조조는 진짜루다가 고자였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