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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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경기는 조조 쪽으로 기울고(2)
“이것은 일전에 공청주께서 소인에게 하사하신 미주이온데 실은 소인은 이 미주에 어울릴 만한 선비가 아닌지라 먹지를 못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온후께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온후께오서는 이 술이 어울리는 귀인이십니다.”
나는 접대용 미사여구를 남발하며 여포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여포는 공치사가 듣기 나쁘지 않았는지 헤벌쭉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술을 권했다.
“술은 혼자 먹으면 맛이 없고 나눠야 향미가 더하는 법. 별가도 한 잔 하지.”
“소인은 이 술에 어울리지 않는 포의(布衣, 하찮은 선비)올시다.”
“어허, 점잔은 그만 빼고. 낭야의 내로라하는 세가이며 일주의 별가씩이나 되는 사람이 포의 운운한다면 천하에는 선비다운 선비가 열 사람도 남지 않을 터.”
나는 헤헤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염치 불고하고 들겠습니다.”
여포도 화답하듯 호탕하게 웃었다.
“편히 드시게. 전장에서 술을 찾는 이가 흔치가 않아서 적적하던 참이었어. 다들 딱딱하게 굳어서는 말이야. 그래서는 전쟁을 제대로 못 치른다고.”
“옳은 말씀이십니다.”
나와 여포는 둘이서 환담을 나눴다. 여포는 그다지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대하기에 불편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일 조조와 대작을 한다고 했으면 나는 얼어서 할 말도 못하고 멋쩍은 미소로만 일관했을 터다. 조조 같은 인물은 말 한 마디, 찰나의 표정에서 상대의 속내를 읽어내는 능력을 가졌다. 그러니 그의 앞에서는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황금률로 작용한다.
그러나 여포는 달랐다. 내 속내를 들여다보기는커녕 기분이 내키면 제 속내를 먼저 모조리 털어놓는 인물. 그렇게 되면 나는 적극적, 공세적으로 상대와의 소통에 나설 수 있는 터. 내가 더 털어놓으면 여포도 더 신이 나서 주저리주저리 있는 얘기 없는 얘기를 쏟아내니 일종의 선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포는 제법 진솔한 투로 제 인생역정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북방의 변경에서 태어나 제 양부인 정원을 죽인 이야기, 동탁의 휘하에서 어쩌고저쩌고. 누구의 객장으로 있다가 원소의 밑에 있다가 종내 이곳에 이르렀노라고 술회하는 말에 나는 우호적인 맞장구를 쳐주었다.
“솔직히 나는 말이야, 여기 연주도 당최 믿을 수가 없다고.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나를 반기면서도 꺼려. 그래, 나도 할 말 없다고. 내 주군의 피를 친히 묻혀온 더러운 인생이니 반겨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나도 나름대로 새로운 마음으로 살려고 해도 이게, 내 이마에 떡하니 찍힌 낙인이 도와주질 않아. 이놈은 일생을 배신으로 구른 놈이다. 조심해라. 나의 애마 적토보다도 빠르게 발 없는 말이 먼저 도착해서 그렇게 낙인을 찍어버린단 말이야. 그러니 될 일도 되지 않는 게지.”
여포는 거푸 석 잔을 넘겼다.
“장막과 진궁의 꿍꿍이도 아마 그럴 테지. 난적 조조를 나의 손으로 해치우고 결국엔 연주를 자신들의 입에 털어 넣으려고 할 거야. 지금은 온후, 온후 떠받들지만 조조를 먹어치운 후엔? 그때도 내가 그 사람들에게 온후일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포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 걸.”
나는 말이 궁해 쩝, 입맛을 다시고 술을 마셨다.
“그래서 나는 쉽게 조조를 칠 수 없어. 이대로 대치하는 쪽이 내 가치를 온전히 지키는 책략이거든.”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사실 여포와의 술자리를 만든 것도 어찌어찌 잘 구슬려 조조를 치라고 권하기 위해서였다. 여포는 바보천치다.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결론 내리기 마련이니. 나도 조심한다고 했지만 그렇게 여겼나보다. 그러나 책에서 읽는 것이 아니라 이 악다구니판을, 그것도 그 중심에서 견뎌낸 사람이다, 여포는. 잠깐의 추론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나도 어줍지 않은 연극은 버리고 진솔하게 대담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온후께서는 대치가 가치를 지키는 책략이라고 하셨지만… 이 대치가 길겠습니까. 대치를 고집하신다면 조조는 그 사이에 의뭉한 책략을 꿈꿀 것입니다.”
여포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술을 마셨다.
“알아, 나도 알고 있어. 허나… 쉽지가 않아. 언제나 첫 발이 어렵다. 나는 조조를 알면서도 모른다. 그의 무서움은 알지만 그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해. 나는 싸움에 능하다는 것만을 장기로 이곳에 불려왔어. 헌데 출진한 첫 전투에서 처참히 무너진다면 나는 일거에 신망을 잃을 것이다.”
이거 의외다. 여포는 앞뒤 안 재는 멧돼지 같은 싸움꾼이고 가진 것도 없으니 물불 안 가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여포가 전투를 두려워한다. 오로지 싸움에 능하다는 명성만이 그의 전 재산이니까. 싸움을 두려워하는 여포라.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렇다면 낭야가 먼저 출진하지요.”
“뭐라.”
“이기든 지든 첫 전투는 낭야가 맡아서 하겠습니다. 온후께서는 전황을 살피다가 출진하십시오. 싸움의 향방을 잘 읽으시니 적절한 곳을 습격하십시오. 그리하면 낭야의 군사를 잃을지언정 온후의 군사는 보존하고 패전지장의 멍에를 쓰지 않을 터이니 온후로서는 가장 나은 방책일 터입니다.”
여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내게 물었다.
“그대들은 조조에 맞서 한 차례 패했다. 이번에도 쉽게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터. 그대로서는 유리한 결정이 아닐 텐데?”
“허면 누가 선봉을 맡겠습니까. 장맹탁 등 연주의 호족들은 세는 있으나 군략에 능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맡기느니 차라리 낭야가 낫습니다. 낭야를 선봉으로, 노국상을 그 다음으로 삼는 것이 옳습니다. 연후에 온후가 전장에 개입하여 좌충우돌하면 마냥 지라는 법도 없지요.”
“나는 두려워 꼬리를 마는데 그대는 의기가 충만하군. 부끄럽다.”
“저희는 조조에 뿌리 깊은 원한이 있습니다. 아끼는 사람들을 그의 손에 잃었습니다. 두려움을 모르고 오로지 깊은 증오만을 압니다. 또한 온후께서는 군의 중심이시며 아군의 수장이십니다. 온후를 돕는 것이 곧 소인 스스로를 돕는 것이니 어찌 선봉을 주저하겠습니까. 온후의 무공만을 염두에 두고 싸운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의 수급을 취할 줄로 믿습니다.”
여포는 남을 휘하에 두고 부리기를 좋아하며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고 했다. 나는 그의 비위를 철저히 맞춰주었다. 나는 이런 치들을 잘 안다. 과할 정도의 충성을 보여주고 그를 한껏 높여주면, 도리어 그는 그 이상의 것을 수행해낸다. 충성에 대한 보답 차원이 아니다. 아랫것의 신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한껏 띄워진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속되게 말해, 이른바 가오를 살리기 위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협화음을 내는 까닭은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치들의 밑으로 들어가기를 꺼리기 때문이며 이런 치들은 꼭 상대를 굴복시켜야 성미가 풀리기 때문이다.
진궁의 경우가 그렇다. 진궁은 여포를 주군으로 섭외한 것이 아닌 다만 동맹의 일익으로 끌어들였을 뿐이다. 그의 계산에서 여포는 조조를 제거한 후 용도폐기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진궁은 여포와 비스듬한 사선 모양의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전략을 의논했다. 그러니 여포의 마음에 차지 않을 수밖에. 조정으로부터 후작의 작위를 받고 천하의 용맹을 떨친 여포가 한낱 조조의 막료로 구르던 진궁과 군략을 의논하는 것은, 여포의 논리로는 성립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로지 여포와 진궁 사이에는 명령과 굴종만이 존재해야 했다. 그런 고로 진궁은 옳은 말을 하되 그 말을 여포가 채택하지 않는 것이다. 먼저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여 과도한 충성을 보여준다면, 여포 같은 사람이야말로 주군으로 모시면서 통제하기 가장 손쉬운 부류다.
“나는 일생을 반목과 질시 속에 살아왔노라. 나는 그것에 배신과 증오로 앙갚음해왔다…… 그런데 네가 오늘 나를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리고자 한다. 나는 그것을 무엇으로 갚아야겠느냐?”
나는 손을 모으면서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빛나는 화극의 끝에 조맹덕의 수급을 꿰어주십시오.”
여포는 나를 일으키며 술잔을 건넸다.
“반드시 그리하리라.”
나는 여포를 성부까지 배웅하고 다시 내 처소로 돌아왔다. 나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느른한 몸을 쭉 펼 수 있었다. 이것으로 여포를 출진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물렁한 베개에 내 머리를 맡겼다.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 잠기운이 슬슬 올라왔다. 나는 곧 잠에 빠졌다. 실로 단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