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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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함포고복(含哺鼓腹)
포위는 사흘 간 이어졌고 장졸의 포식도 사흘 간 이어졌다. 떡을 쪄먹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선별된 인원에게 술을 잔뜩 먹였다. 사슴고기를 모닥불에 구워먹기도 하고 민물고기를 푹 고은 진국을 먹기도 했다. 무얼 먹든 성벽의 적병들은 죽을 맛이었다. 성 밖에서의 먹거리 자랑도 효험이 있기는 했지만 가장 잘 먹혔던 것은 육포 화살이었다. 굶주린 사람에게 약간의 요기는 도리어 곱절의 허기를 불러오는 법이다. 군침만 돌게 할 정도의 육포는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나마도 육포를 맛본 자는 소수였고 쟁탈전에서 패배한 대다수는 울 듯한 표정으로 소수의 육포 맛보기를 부럽게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정욱은 육포를 먹는 자는 즉시 사형으로 다스리겠다고 공언했지만 병졸들의 본능적인 손놀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내는 공황에 빠졌고 병졸들은 정욱의 통제를 벗어났다. 병졸 삼십 여가 탈영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날은 위속이 나에게 와서 보고했다.
“별가, 성내의 식수가 바닥났다고 합니다.”
“오호라.”
다음 수는 굳이 상술하지 않아도 되리라. 범현의 성은 강가와 인접해있지만 성 안으로는 얇은 물줄기만 흐를 뿐이었다. 물론 식수를 상비해놓을 만큼의 수량은 되지만, 상비된 식수가 없는 상태에서 성 밖의 적이 수로를 차단한다면 해갈의 도리가 없어진다. 나는 응당 그렇게 했다. 작은 제방을 쌓아 꼴꼴 흐르던 성내의 물길을 끊어버렸다. 그 다음은 덩치 큰 몇몇을 선발해 물쇼를 선보이는 것이다. 항아리채로 물을 한 번에 들이키게 했다. 범현의 수성은 그다지 길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여포에게 가서 아뢨다.
“온후, 정욱은 앉은자리에서 패배를 선언할 이가 아닙니다. 반드시 속임수를 써서 우리의 포위를 돌파하려 할 것입니다. 항시 예비를 해놓아야 합니다.”
여포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대의 말이 옳다.”
“날이 갈수록 병사들의 갈증과 허기가 심해지니 정욱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반드시 오늘 아니면 내일 탈출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한참 내 말을 듣던 여포는 역시 옳다고 하며 내 의견을 채택한다고 했다.
우리는 점심에 자라와 잉어, 기타 등등의 잡어를 삶아 거한 식사를 했다.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취사를 맡은 부대에게 곧장 명령했다.
“바로 저녁 먹을 준비를 하라.”
“별가, 아직 해가 중천에 걸렸사온데……”
“오늘은 점심은 물론이요 저녁 또한 호화롭게 먹어보자.”
“이제 지닌 양식이 넉넉하지는 않습니다요.”
“관계없다! 물고기든 육고기든 뭐든 좋으니 오늘 저녁은 전례 없이 푸짐하게 차려라. 술도 좀 내오고.”
급양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제법 용기 있는 제언을 했다.
“아무리 적이 굶주렸다지만 항시 경계를 해야 하는 법이옵니다…… 다소 군기가 흐트러질까 두렵습니다.”
군령에 토를 다는 자는 지휘관이 까다로운 성격이라면 참형으로도 다스릴 수 있었다. 오래 군에서 종사한 급양대장이 모르지 않을 터. 위험을 무릅쓰고 고언을 아끼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다 예비한 계책이 있는 까닭이다. 훌륭한 조언이었다.”
내가 웃으며 말해주자 그제야 급양대장도 수긍하고 읍하며 명을 받들었다.
그날 저녁은 정말로 호화롭게 먹었다. 닭을 삶고 그 살을 결대로 찢은 후에 진하게 우린 국물과 함께 담았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닭국은 살은 살대로 고소하고 연하게 씹히고 국물은 국물대로 진국이었다. 짭짤한 짠지를 곁들여 먹으면 금상첨화였다. 마지막에 밥을 말아 죽 들이키면 속이 뜨끈하게 달아올라 제대로 보양하는 기분이 들었다. 남은 닭고기를 더 부탁하여 술을 곁들여 먹으면 얼굴까지 발그레 훗훗한 열기가 미쳤다. 군기가 확 풀린 병졸들의 왁자지껄한 음담패설이 진영에서 웅성웅성 울렸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식사는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식사를 즐기던 나는 막사로 들어가 허리춤에 칼을 차고 의관을 정제했다.
“별가, 성문이 열렸습니다.”
위속이 내 막사로 들어와 거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굳이 그렇게 작게 얘기 안 해도 적들이 못 듣습니다.”
그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다시 목소리를 원래대로 냈다.
“그, 그런가요.”
“준비한 대로 결행합니다.”
“알겠습니다.”
철로 만든 성문은 원래 여닫을 때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기 마련인데 어찌나 조심스레 열었는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여전히 요란하게 지껄이는 아군의 목소리에 묻혔을 수도 있다. 정욱의 군사들은 숨죽여 암흑 속에서 잠행했다. 그러다가 아군의 진영에 근접하여 서서히 빛을 받기 시작했을 때 급히 기동하여 전력을 다해 돌격했다.
“적진을 돌파하라!”
우리 진영까지 접근한 정욱이 힘을 쥐어 짜 소리쳤다. 그러자 정욱의 휘하들도 있는 힘껏 기합을 내지르며 돌격했다. 철석 앉아 술이나 축내던 병졸들은 삽시간에 공황상태에 빠졌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허리춤의 검을 뽑아 정욱을 향해 겨눴다.
“쳐라!”
내 명이 떨어지자 막사에 숨어 있던 아군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미리 배를 채워두었고 술을 먹지도 않았다. 오로지 정욱의 야습만을 대비해 막사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이었다. 내가 여포에게 제안했던 계책이었다.
“병법은 기만술. 결국 승패는 속느냐, 속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정욱이 교묘한 책략가이나 굶주린 그에게는 남은 패가 많지 않으므로… 승산은 충분합니다. 오늘은 저녁에도 거한 연회를 베푸십시오. 정욱은 반드시 우리가 며칠간의 연회로 기강이 심히 해이해졌을 것이라 판단할 겁니다. 더군다나 온후께서는 술을 즐기시니.”
“그렇지.”
“정욱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전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끼만 걸러도 죽을 맛인데 저들은 벌써 사흘을 넘게 굶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물길까지 끊겼으니. 우물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때문에 틈이 보이면 바로 비집으려 들 것입니다.”
여포는 점잖은 태도로 내 말을 경청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가 지고 나서도 술을 마시는 것을 안 정욱은 반드시 오늘 야습을 감행할 겁니다.”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성렴이 의문을 표했다.
“헌데 병사들이 술을 계속 마시고 있다면 적의 야습을 안다고 해도 곧바로 대처하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병사를 무장시키고 야습을 대비하라 군령을 내려놓으면 정욱이 알아차릴 겁니다.”
“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력을 둘로 나눠 절반은 연회를 즐기게 하시고 나머지 절반은 막사 안에 대기하여 적습을 대비하도록 하십시오. 이미 굶주릴 대로 굶주린 정욱의 군대는 우리를 꺾지 못합니다. 때문에 정욱은 우리를 야습으로 섬멸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포위망을 뚫고 조조의 본진과 합류하려 할 것인즉, 술을 마시던 병력이 굳이 정욱의 앞을 가로막지 않는다면 정욱도 우리를 치지 않을 겁니다. 병력이 크게 상하지 않을 테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야습이 들통 난 공격군은 야습에 걸려든 수비군보다 훨씬 쉽게 공황에 빠집니다. 게다가 온후와 성렴, 위속 장군이 그들을 맞는다면 그들이 이길 도리는 절대 없습니다.”
여포는 시원시원하게 내 계책을 받아들였다.
“별가가 우리 군의 참군이니 그대로 따르겠다.”
그리고 그 계책의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다. 술을 마시던 병력은 급습에 혼비백산했지만 워낙 정예한 부대라 위속의 통솔에 금세 정신을 차리고 군의 측면으로 피했다. 동시에 여포가 정면에서 등장하고 성렴이 좌군을, 내가 우군을 통솔하여 정욱을 에워싸니 그의 군대는 삽시에 혼란에 빠졌다. 가뜩이나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확정적인 패배에 의욕을 상실했다. 중무장을 하고 비상한 각오로 탈출을 감행하던 정욱도 입을 벌린 채 무어라 할 말을 잊었다. 나는 웃으며 정욱을 굽어보았다.
“그동안 견디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내 인사치레에 정욱은 아랫입술을 악물었다.
“그만 투항하십시오. 공연한 목숨 상하게 하지 마시고.”
나는 칼날로 여전히 김이 오르는 솥을 탕탕 두드렸다.
“정 공, 닭 국물 한 사발 하실래예?”
“……”
정욱 저 아저씨 지금 센 척 하는데, 분명히 입 안에는 침이 고였을 걸.
“사흘 넘게 굶었잖소. 무장을 해제하면 일단 배불리 밥은 먹여 주겠소. 아무리 칼을 맞댄 사이라지만 우리가 짓궂게 굴긴 했으니.”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건만 그는 체면치레를 하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떨어뜨리고 들고 있던 칼을 내려놓았다.
“투항하지.”
정욱의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병력은 일제히 병장기를 내려놓으며 우리를 향해 읍소했다. 밥을 주시오! 마실 것을 주시오! 죽기 직전이오! 제발 먹을 것을 주시오! 울음 섞인 청원에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위속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몹쓸 짓을 하기는 했습니다.”
“적병에게 음식을 베푸는 것만으로도 군자의 자격이 있으십니다.”
“배곯는 이에게 음식을 주는 것으로 군자 소리를 듣다니, 정녕 독한 시대가 아닙니까.”
위속은 대답할 말이 없는지 겸연쩍은 미소만으로 화답했다.
나는 급양대장으로 하여금 밥을 더 지어 투항병들을 배불리 먹이라 명령했다. 이들은 대개 이 고을 출신의 병력이다. 이들을 잘 다독인다면 이 고을의 민심을 다잡는 것은 물론 그들을 온전히 우리의 병력으로 삼을 수 있다. 범현에서 여포가 투항병들에게 밥을 먹이더라는 풍문은 생각보다 위력적일 것이다. 조조와 여포 사이에서 고민하는 고을들의 훌륭한 귀감이 되겠지. 더군다나 조조의 패악질이 빚은 선혈로 서주의 땅이 아직 축축하니까. 선명한 비교가 이루어지리라.
“온후, 정중덕의 처분을 어찌 하올까요.”
내 물음에 여포는 그다지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죽이지, 뭐.”
나는 경악했다.
“온후, 정중덕은 일대의 명망가입니다. 함부로 해치면 민심이 사나워집니다.”
여포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깟 늙은이 어찌하든 내 상관할 바가 아니네. 별가가 알아서 하도록 하고 굳이 나한테까지 보고할 필요 없어.”
나는 읍하며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여포가 역발산기개세의 무용을 지니고도 성공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제 힘을 과신한 나머지 인심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 정욱은 동아현과 범현 일대의 명망가다. 그를 잘 다독이지 않으면 간신히 휘어잡은 이 지역의 민심이 이반된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정욱을 접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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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열전 18. 위속(魏續)
여포의 휘하 장수. 여포는 위속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무용과 공훈이 더 뛰어난 고순의 병력을 뺏어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위속은 송헌, 후성과 함께 진궁을 붙잡아 조조에게 바치며 투항한다. 정사에서의 기록은 이게 끝.
일전에 여포와 성렴과 함께 흑산적 장연의 본진을 기병 수십 기로 돌파한 위월이라는 장수가 나오는데, 그가 위속과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추론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