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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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신뢰는 불신의 어미
수만에 달하는 대군은 군령에 맞춰 절도 있는 걸음을 동시에 내딛었다. 그들이 내딛는 걸음마다 땅이 울리고 먼지가 일었다. 전장은 복양과 견성 사이의 너른 들판이었다. 거대전력끼리의 맞대결. 양측은 모두 승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 고로 변수 없이 오로지 가진 힘으로써 부딪치는 평야 전장을 택했다. 근방의 주민들은 혹여 창칼의 저주가 자신의 가솔들에게도 미칠까 행장을 꾸려 목적지 없는 여로에 올랐다. 포식을 예비한 까마귀들이 관객이 되어 솔가지 위에 앉아 눈알을 굴렸다. 연주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인가. 여포인가, 조조인가. 오로지 그것을 판가름하기 위해 십만을 넘는 목숨들이 죽을 준비를 했다. 나도 오천의 목숨들과 함께 동쪽의 산을 올랐다.
“이래가지고는 밤중에도 당도하지 못하겠는걸.”
영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잔가지를 헤쳤다. 산길은 제법 험해서 군마가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말에 재갈을 물리고 말에서 내려서 고삐를 끌었다. 제대로 된 등산로도 나 있지 않은 산길은 장애물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어둠마저 내리니 날도 쌀쌀했다. 나는 속으로 진궁을 욕했다. 산기슭에 오를 즈음 먼 곳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전에 왕왕 울렸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치르는 것은 전쟁이고 지금 벌어지는 것은 전쟁의 편린인 일개의 전투일 따름이지만, 전력을 다해 치르는 전투는 전쟁의 향방을 명백히 가를 것이었다. 비명과 쇠붙이가 얽히는 소리가 초겨울 산기슭의 한기를 타고 처량하게 울렸다. 불을 피우면 연기가 올라 위치가 발각되는 터, 우리는 꽁꽁 언 주먹밥을 앞니로 갉아먹고 진군을 계속했다. 진군의 도중에 나는 속속 첨병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좌익의 노국상, 적군 우익 하후돈과 격돌! 백중세!”
“우익의 낭야상, 적군 좌익 하후연과 격돌! 고순 장군과 함진영 활약! 우세!”
“적군 선봉 조홍, 중군으로 진격! 복양후 고전!”
“중군 부장 왕해, 부상으로 전선 이탈!”
“고순 장군과 함진영, 적진으로 침투하여 분전!”
“적장 우금, 중군 돌파! 송헌 장군, 우금의 창에 전사!”
“좌익 노국상, 적군 우익 돌파!”
“중군 위속 장군 패주! 중군 와해 위기!”
“적군 우익 주령 부대 패주!”
전황은 시시각각 빠르게 돌아갔다. 여포가 개입하지 않은 전장에서 조조군이 유리했다. 중군이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내가 적의 치중거점을 치기도 전에 중군이 와해되고 말 것이었다. 나는 더욱 속도를 내어 산을 탔다. 말에서 내린 상태의 나는 다만 일개의 약골일 따름으로, 내가 숨이 벅찰 정도로 진군하니 병졸들도 그것보다 고되진 않을 터였다.
“설란과 이봉은 평지의 길을 따라 움직일 터인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거지……”
내가 서쪽으로 움직였다면 벌써 견성에 닿았을 터다. 또한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장초의 부대도 이즈음이면 보리밭에 불을 놨어야 마땅했다. 그들에 대한 정보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우선 내 일에 집중했다. 슬슬 어둠이 짙어지고 횃불을 들지 못하는 우리들은 천지분간이 쉽지 않았다. 눈 밝은 이들을 앞세워 진격했지만 불 하나 없는 산 속에서 진군하기란 쉽지 않았다.
“찬, 차라리 지금 야영하고 이른 여명에 움직이는 게 어때?”
영자가 제의했지만 만지가 일축했다.
“손 장군, 기습은 때가 있는 법. 서둘러 적을 치지 않으면 중군이 궤멸되고 전황이 아예 넘어가우. 무리를 해서라도 적의 거점을 공략해야만 하우.”
나 또한 만지의 의견에 동감했다. 병법을 알기나 싶을까, 허저는 속 편한 얼굴로 다만 부족한 주먹밥이 아쉬울 뿐이었다. 깊은 산 속에서는 이제 전황을 전달하는 전령의 걸음도 끊기고 말았다. 맹인이 되어 진격하는 일은 고됐다. 이따금 잔가지가 내 뺨을 스쳐 생채기를 냈다. 긁힌 데 또 긁히니 고통이 더했다.
“으이구, 진궁 이 미친놈! 반드시 이 보상은 받고 말겠어.”
나는 상처를 손등으로 매만지며 산을 탔다. 종일 이어진 전장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는지 잠잠해졌다. 쫑긋 귀를 세우고 있던 만지는 입맛을 다셨다.
“소리가 잦아드는 걸 보니 일단 오늘 전투는 끝낼 모양인데……”
그 말을 하자마자 영자가 반색했다.
“만사마, 그럼 숙영하는 게 어떻소?”
이쯤 되니 나도 고단해졌다. 이 상태로는 야습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성싶었다.
“그래, 우선 간이막사를 치고 이곳에서 숙영하는 것이……”
만지도 잠시 고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수.”
허저는 어깨를 으쓱이며 휘하를 채근해 막사를 치도록 했다. 지친 병사들도 숙영이 기뻤는지 기쁜 표정으로 막사를 쳤다. 혹여 적이 알아챌까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동트기 전 어두울 때 움직여서 삽시에 적을 공략하고 산으로 숨어 응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지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옳습니다. 적이 혼란에 빠졌을 때 몸을 빼내 높은 곳에서 적을 대항한다면 적이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게 다음날의 군략까지 마련해놓고 가장 먼저 완성된 나의 막사로 들어가려는데, 산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자면 영원히 자게 될 거다, 제갈찬!”
우호적이지 않은 목소리에 나는 불길한 느낌을 감지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군 전원이 그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삽시간에 사방에 빛이 들어왔다. 무수한 횃불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좀체 놀라는 일이 없는 만지도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 못했다.
“무슨……”
영문 모를 의문사를 중얼거리는 나의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정욱……”
이름이 불린 이가 응답했다.
“오냐.”
식은땀이 흘렀다. 정욱이 왜 여기에……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정욱이 여기에 있으려면 두 가지 전제가 있어야 했다. 첫째, 복양에 감금된 정욱이 탈출할 것. 둘째, 조조군이 우리의 작전을 알고 있을 것. 우리의 낌새를 보고 알아차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손오공을 굴리듯 처음부터 작전을 알고 있어야 했다. 정욱은 애초부터 우리를 이 심심산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의 동향을 읽고 나서 비로소 움직였다면 이렇듯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맞이할 물리적 여유가 없다.
정욱은 천천히 말을 몰아 내 쪽으로 다가왔다. 만지의 위명을 잘 아는지 중장기병 몇이 그를 호위했다. 정욱의 얼굴은 무표정한 듯하면서도 엷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놀라울 것이다, 제갈찬.”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그대가 나에게 투항을 권했지만……”
정욱은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내가 그대에게 그래볼까 하는데.”
“……”
“충격이 큰가보군.”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기가 막히네.”
정욱은 무거운 말을 가볍게 말했다.
“진궁이 말해줬다.”
“진궁……”
나는 진궁의 이름을 발음하면서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혔다. 진궁, 진궁, 진궁. 비단 나뿐만일까. 만지도, 영자도, 허저도 당장 죽음에 놓인 상황보다도 진궁이라는 이름이 더욱 충격적이고 선명하게 다가왔다. 왜? 진궁이 왜? 그 단순한 질투심 때문에 전쟁을 수렁에 빠트리는가? 제 목숨을 해칠 수도 있는데? 정욱은 나에게 거듭 무거운 말들을 일상어처럼 읊었다.
“진궁은 이른바 일석이조를 노렸던 모양이야. 나한테 재밌는 얘기를 하더군. 세작을 잡았는데 우리 쪽의 치중거점을 알아냈노라. 동쪽 산지를 경유하여 별동대를 보낼 작정이노라고.”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우습게도 나는 그 와중에 이상한 질문을 제기했다.
“헌데… 우리 앞에 두고 환담하실 만큼 한가로우십니까?”
“그대가 동아현의 백성들을 생각해준 만큼 나도 그대를 생각하려고.”
“고맙습니다. 제가 죽게 된 경위를 훌륭하게 설명해주셔서.”
“진궁 그 녀석은 조사군을 함께 섬길 때부터 나랑 잘 안 맞았거든? 끝까지 밉살맞더군. 사흘 후였나, 일어나보니 자물쇠가 풀려 있고 내 처소 앞에 말 한 마리가 울고 있었어. 친절하게 성문도 열려 있었지. 진궁이 일부러 나를 놔준 거야. 나는 말을 타고 가면서 생각했네. 진궁이 이렇듯 형편없는 이중 책략을 구사할 리는 없고,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가, 치중거점에 별동대를 보내겠다는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을 했어.”
정욱은 검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불현 듯 생각이 났지. 그대의 생각이 났어. 진궁은 셈이 많은 자야. 이른바 차도살인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짐작하고 사군께 아뢰어 이곳에 군을 매복하였네. 불쌍하게도 그대가 여기 걸려들었고. 그대가 진궁의 셈을 샀군?”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어쩐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정욱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진궁은 셈을 해서 얄미운 사람을 죽일지언정 전군을 망치는 책사는 아니거든? 그렇다면 반드시 우리의 이목을 돌려서 또 다른 별동대로 치중거점을 노릴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아래에서 왁자한 소리가 났다. 치중거점이 있는 쪽. 정욱은 씩 웃었다.
“바로 맞아떨어졌군. 그대는 모르는 또 다른 별동대가 거점을 공격했어. 안쓰러운 목숨들. 진궁은 좋은 책사지만 훌륭하지는 않아.”
나는 심호흡했다.
“자, 오늘 그대에게 제의하지. 조사군을 섬김이 어떠한가. 크게 쓰겠다.”
나는 날숨을 뱉으며 전군에 호령했다.
“허저, 손관, 만지! 전군의 선두에 서라! 전군 진격하여 적장 정욱의 목을 취하고 포위를 정면 돌파하라!”
내가 군령을 외치자 장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