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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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천자 만세
사자후에 버금가는 원술의 진노에 나도 흠칫 놀랐다. 장훈과 교유는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남양파의 가신들은 괜한 소리를 지껄여 변을 보게 생겼다며 속으로 고소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화기애애하던 성부의 분위기에 긴장감이 독처럼 퍼졌다.
주나라에서 비롯된 전통의 분봉제는, 가장 높은 존재인 왕의 밑에 잘 알려진 공후백자남의 구분이 있다. 여기에 최초로 황제를 자칭했던 진왕 영정의 시대부터 황제, 왕, 공후백자남의 구분이 생겼으며 내가 땅을 디디고 있는 이 시대는 후한 말엽, 당대는 백작, 자작, 남작은 거의 사멸되었고 황제, 왕, 공, 후의 구분이 대체로 유효했다. 황제는 천하를 다스리고 왕은 일개 국(國)을, 공은 일개 군(郡)을 영지로 하였다. 후는 열후와 관내후의 구분이 있는데, 열후 중에서는 일개 현(縣)을 영지로 하는 현후가 으뜸이었고, 현의 하위 행정단위인 향(鄕)이나 정(亭)을 영지로 하는 향후·정후가 버금이었다. 그래서 같은 후라고 해도 서열이 달랐다. 관우가 조조에게 의탁했을 때 한 조정의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명받은 적 있는데, 그는 정후이고 나는 합비현의 현후이므로 굳이 서열을 따지면 내가 그의 위에 있는 것이었다. 이들 향후·정후의 밑으로는 영지는 분봉 받지 않고 다만 후의 작위만 명받는 관내후(關內侯)가 있었다. 이 밑으로도 18등급의 자잘한 구분이 있지만 후략하겠다.
진왕 유총은 천자의 근족으로서 진국의 봉왕이었다. 그의 봉국인 진국은 수춘의 북쪽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무너져가던 진국을 다시 일으키고 스스로 보한대장군(補漢大將軍)을 자칭하며 무리를 이끌었다. 그는 강단이 있으면서도 인품이 온후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장훈과 교유는 그를 지목하여 천자로 옹립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사실은, 내가 건의한 것이다. 장훈과 교유가 나를 찾아왔던 날, 그들은 나에게 원술의 등극을 저지할 묘책을 물었고 나는 그것에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량이의 얘기는 듣게 해주었다. 나는 량이의 혀를 빌려 나의 얘기를 대신했다.
“장사 제갈량이 장군을 뵙습니다.”
장훈과 교유는 그를 돌아봤다.
“어, 그래, 장사도 있었군.”
“잠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량은 그렇게 말하며 장훈과 교유를 자신의 방으로 인도했다. 그들은 순순히 량의 인도에 따랐다.
“차, 드시겠습니까?”
량의 물음에 장훈은 고개를 저었다.
“차라면 이미 합비후의 앞에서 실컷 먹고 나왔네! 말씀은 아니 하시고 차만 몇 잔을 따라주시던지……”
교유도 덩달아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량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잔에만 차를 따랐다. 그는 찻잔을 손으로 감싸 온기를 느끼며 그들에게 넌지시 말했다.
“혹 제 사소한 지혜라도 받으실 요량이 있으십니까.”
“차 마시라는 소리만 아니면 무슨 말이든 들을 용의가 있네.”
량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진왕 유총.”
생각하지 못했던 이름에 장훈은 미간을 좁혔다.
“유총?”
“그렇습니다.”
“보한대장군을 자처하는 지고하신 황족 양반 말씀이시군. 갑자기 그의 이름은 왜 꺼내는 겐가.”
“지금 승상 노릇을 하는 원소는 일전에 유주자사 유우를 천자로 옹립하려다 그가 고사하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교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대장군께서 진왕을 유우처럼 대우하면 어떨까요.”
“뭐라, 진왕을 천자로 옹립하라는 말인가.”
량은 대답 대신 웃으며 차를 마셨다. 잠시 고심하던 장훈이 미온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너무나도 부담이 큰데……”
“대장군의 욕망은 이제 걷잡을 수 없습니다. 시기의 문제일 뿐, 대장군은 반드시 등극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은 많지 않습니다. 원소가 천자를 등에 업고 호가호위할수록 대장군은 보좌를 더욱 갈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 장군의 영지인 양주를 향해 전국제후들이 승냥이처럼 달려들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대장군의 등극만은 막지 않아야겠습니까?”
교유는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말은 옳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장군의 욕망은 커지고 있습니다. 미봉책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확실한 방책을 강구해야지.”
“그 방책이란 것이 진왕의 옹립인가.”
“그렇습니다. 새로운 천자를 옹립하면 대장군의 권위가 원소와 나란해집니다. 이로써 원소를 향한 대장군의 시기심을 억누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진왕은 유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통성이 굳건한 인물이니 전국제후의 반발도 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장군의 욕망을 제어하면서 전국제후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 패입니다.”
“……”
장훈과 교유는 망설였다. 그들의 협소한 식견으로는 이 이상의 안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원술은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분노하는 인물, 후폭풍이 어떠할지 감을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선뜻 량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량은 짧게 말했다.
“아무렴, 합비후께서 손 놓고 계시려고요.”
량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것보다 할 말을 마치고 곧장 물러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설득책임을 량도 알고 있던 것. 장훈과 교유는 량의 빈 찻잔을 침묵 속에 한참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 변설의 결과가 지금 원술의 분노와 바들바들 떠는 두 아저씨였다. 교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뢰었다.
“유, 유총을 옹립하면 대장군께서 워, 원본초와 나란히 서는 것이옵고… 유총은 정통성이 굳건하니 제후들의 바, 반발이 심하지 않을 것이므로……”
원술은 목까지 시뻘개져서 그를 심하게 다그쳤다.
“닥쳐라! 내가 원소 따위와 대등하게 서려고 등극을 예비하는 줄 아느냐! 또한 내가 제후의 으뜸이거늘 제후의 눈치나 설설 살펴 유총을 목말 태우고 재롱이나 떨라는 말이냐!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게냐!”
교유는 몸을 떨 뿐 감히 반론하지 못했다. 그들이 량으로부터 진왕 옹립의 근거로 들은 것이 원소와 나란히 서면서 제후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말뿐이었으니 그들은 더 말하고 싶어도 이제는 떠벌릴 말이 없었다.
원술이 진노하자 남양파는 이때다 싶어 그들을 마구 힐난하고 나섰다. 중부교위 기령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을 토했다.
“주군! 유씨 천하는 이제 끝입니다! 마땅히 이제 원씨의 천하가 열리려는데 두 장군은 한낮에 보름달을 찾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좨주 양홍도 나섰다.
“주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제안입니다.”
구강도독 악취.
“등극만이 방책입니다. 그 이외의 변론은 듣지 마십시오.”
중랑장 이풍.
“이미 한실의 권위는 소멸되었는데 어찌 이토록 물정모르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습니까.”
여기에 응당 맞대응해야 할 양주원류의 가신들은 주저하면서 나서지 않았다. 원술의 진노를 바로 목격한 탓으로 괜히 발을 담갔다가 변을 당할까 두려운 탓이었다. 장훈은 엎드린 채 나를 슬쩍 돌아봐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나는 조금 더 참아줄까 하다가 씩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나는 원술에게 장읍했다.
“대장군, 양주자사 제갈찬 아룁니다.”
원술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나에게 발언을 허했다.
“말하라!”
“전장군 장훈과 남부교위 교유의 말은 이치에 크게 어긋납니다. 대장군의 진노를 미천한 소인마저 십분 이해할 수 있나이다.”
내 말에 장훈과 교유는 당혹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식은땀 한줄기가 등을 서늘하게 쓸고 지나갔겠지. 원술도 내가 옳은 말을 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어찌 진왕 따위를 내가 섬기겠는가!”
장훈과 교유는 엎드린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얕은 숨만 토했다. 나는 숨을 짧게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썩은 조개에서도 간혹 진주가 발견되듯이 두 장군의 말에도 아주 이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원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원술의 역성을 한번 들고 이어 장훈과 교유를 두둔하니 원술도 크게 화를 내지는 못하고 우선 나에게 귀를 열었다.
“무엇인가.”
“첫째, 진왕 유총을 옹립하면 대장군께서는 북방의 원소와 대적하여 남방의 맹주가 되실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교유가 운운하였다. 나는 원소 따위와 대적하기 위해 등극하겠다는 것이 아니야!”
“물론 그렇습니다. 허나 유총을 옹립하고 유표와 손책에게 큰 벼슬을 내리고 원소와 대적하신다면, 대장군께서는 소진(蘇奏)이 합종책으로 육국재상이 되어 군림하던 이상으로 위엄을 떨칠 것이니 천하가 자연히 순응하고 대장군께서 제위를 자처하시기 전에 천하만민이 등극을 애걸할 것인즉, 이 어찌 아름답지 않습니까?”
전국시대의 변설가인 소진은 서쪽의 초강대국이었던 진나라에 대항하여 연, 제, 초, 한, 위, 조 여섯 개 나라를 설득, 연합군을 편성하고 여섯 개 나라의 재상이 되어 진의 패도를 저지한다. 그럴 듯한 말로 띄워주고 마지막에는 천하가 등극을 원할 것이라는 말로 맺자 원술은 대답하지 않으면서도 그 장면을 상상했는지 노기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나는 이어 진술했다.
“둘째, 진왕 유총의 봉국인 진국은 수춘의 북쪽으로 예주의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예주자사 곽공이 원소에 붙어 참람히 예주를 다스린다고 하나 진왕을 초빙하여 옹립한다면 대장군의 위세가 그곳까지 미칠 것인즉, 어찌 곽공 따위가 예주를 주름잡으려 하겠습니까? 대장군께서는 마침내 예주까지 세력을 뻗고 원소의 턱 밑에 비수를 꽂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절묘하지 않습니까?”
원술은 남양에 기반을 가졌을 적에 대규모 연합군을 조직해 예주를 경유, 연주의 조조를 습격했으나 대패하고 양주로 패퇴한 전력이 있다. 그런 아픈 기억이 있기에 진왕의 초빙으로 예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그에게 달콤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원술이 입술을 우물거릴 뿐 답하지 않자 나는 다시 진술했다.
“셋째, 고래로 요(堯)는 순(舜)에게, 순은 우(禹)에게 지극히 높은 자리를 양보하는 선양(禪讓)의 예를 만들었습니다. 칼로 찬탈하여 보좌에 피를 묻히는 일보다 덕 높은 자가 더 덕 높은 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선양의 예가 지극히 고매하지 않습니까? 진왕 유총은 덕이 높으므로 그를 내세워 천하의 인심을 얻고 대장군이 가진 덕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발하면 진왕은 스스로 대장군께 선양하고 천하는 요순의 예처럼 칭송하리니 이 어찌 훌륭하지 않습니까?”
“으음……”
원술이 망설이자 이에 불안을 느낀 원윤이 나를 반박했다.
“유총은 성품이 맹용하여 남의 말을 쉬이 듣지 않네. 그를 천자로 옹립하면 도리어 그가 우리를 다스리려 들 것인즉 어찌 위험하지 않은가!”
“그가 맹용하다 하나 대장군의 강단은 산을 쪼개고 위엄은 강을 얼게 하는데 유총 따위가 감히 대장군을 범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고는 못하겠지. 원윤은 우물거리다가 다시 반론을 제기했다.
“유총은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지 않으려고 할 것인데 대체 어찌 그를 설득하겠는가!”
나는 원술에게 엎드렸다.
“저를 진국으로 보내주십시오. 유총을 초빙하겠습니다. 더불어 교위 감녕과 동행하게 해주십시오. 그가 감히 듣지 않으면, 죽이겠습니다.”
내 말에 원술은 껄껄 웃었다. 그의 노기는 봄날의 잔설이 녹듯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좋다! 나는 합비후를 진국으로 보내 유총을 부르도록 하겠다! 이의 있는 자 있는가!”
가신단은 전원 침묵했다. 원술은 흡족하게 웃으며 장훈과 교유에게 말했다.
“너희는 허황된 말을 지껄였으나 합비후가 변설하여 너희를 구하였으므로 너희는 마땅히 합비후를 은인으로 대우하여야 할 것이다.”
장훈과 교유는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너희는 본디 죽은 목숨이나 합비후의 말을 들어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전장군 장훈은 강등하여 파로장군으로 삼고 남부교위 교유는 봉급을 2할 감봉하겠다. 보기 싫으니 물러가라!”
“예, 예.”
원술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진국으로 떠나면 혹 손에 피를 묻힐 수 있으니 그 전에 혼례를 치르고 떠나도록 하라.”
나는 그의 앞에 엎드렸다.
“마땅한 분부, 따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