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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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천자 만세
원룡이라 불린 자, 진규의 아들이 내 앞에 나섰다. 평범한 체구에 호남형의 인상이었다. 턱에만 짧게 수염을 기른 것이 인상적이었다. 패국은 물론 서주 일대에 명성을 떨치는 명족 진씨의 적장자답게 귀티가 흘렀다. 그는 나를 향해 장읍했다. 나도 앉아서 인사를 받을 수 없어 맞절했다.
“진등, 자는 원룡을 씁니다. 군의명성은 익히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갈찬, 자는 견조입니다. 제 명성이랄 게 뭡니까. 원소에게 크게 눌려 대장군께 의탁한 전력이 전부인 것을요.”
진등은 활달하게 웃었다. 제법 큰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군께서는 겸손하시군요. 본디 그 연치에 그만 한 명성을 쌓으면 쉬 우쭐거리기 마련인데요.”
“사실이 그러하니 우쭐거릴 마음도 솟질 않습니다.”
“전장에서 쌓은 숱한 군공을 이미 알고 있으니 괜한 겸양일랑 관두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시비를 불렀다.
“오늘 팔뚝만 한 농어가 들어왔으렷다!”
“예, 힘이 좋은 놈이 들어왔습니다.”
진등은 킬킬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 좋다. 통째로 회를 뜨고 미주를 내오너라! 귀인이 오셨으니 내 힘써 대접해야겠다.”
“예, 대인!”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농어가 대가리는 여전히 뻐끔거리는 채로, 몸통은 뽀얀 살이 두툼하게 포가 떠진 채로 등장했다. 그 옆에는 백자 항아리에 담긴 술이 은은한 과일의 향을 냈다. 짠지 몇 가지와 젓갈이 곁다리로 껴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호식(好食)에 나는 군침이 돌았다. 진등은 제 성격대로 시원시원하게 술을 따르고 내게 권했다. 잔을 부딪치고 술을 마시고 입가심으로 고소한 농어의 살결을 씹었다. 진등은 입가에 묻은 술을 닦으며 말했다.
“이곳 지류에는 이런 월척 농어가 곧잘 잡힌답니다. 맛이 썩 괜찮지요?”
나는 긍정했다.
“지금껏 먹어본 고기 중에 제일이올시다.”
“뭘 좀 아시네.”
한참 두툼한 회를 씹던 진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잔여물을 씹으며 말했다.
“진왕을 옹립한다는 것은 군의 계책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절묘한 계책입니다. 원본초가 비록 예주의 곽공을 귀속시켰으나 그의 영지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형세이니 사실 그의 영향이 세게 미치진 않지요. 그러나 원공로의 영지는 예주와 맞붙어있으니 진왕께서도 원본초보다는 원공로의 생각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문도 본디 원공로와 긴요한 인연을 맺어왔으니 진왕이 제위에 오르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근자에 천하의 대세를 논할 적에 남북양원(南北兩袁)이라고 곧잘 말하니까요. 패국 역시 남원이나 북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남북양원?”
“북방의 원승상과 남방의 원대장군. 전국제후 중 가장 앞선 두 원씨를 일컬어 남북양원이라고 하더이다.”
나는 십분 공감했다.
“하기야 아무리 다른 이들이 날고 기어봐야 사세오공의 명족인 원씨의 명성과 지닌 병마, 재물의 수효를 따라오지 못하지요. 남북양원이라, 재밌군요.”
“아버님께서 일찍이 원공로와 더불어 지내셨고 패국은 수춘과 인접하니 여러모로 남원과 결탁하는 것이 옳다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오늘에 이르러 군께서 쐐기를 박으시는군요.”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건 아닌지……”
진등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별 말씀을! 결코 아닙니다. 이미 정한 일을 군께서 조금 앞당기셨을 뿐.”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군요. 대장군께 패국의 일을 잘 아뢰어 모쪼록 불편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배려해주시니 감격스러울 지경입니다. 실은 저는 원공로보다도 군과 유대를 맺고 싶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와 진등의 대화에 개입하지 않던 진규가 슬그머니 참견했다.
“저는 공로를 잘 압니다. 분명 세력과 강단이 있는 인물이지만 아량이 부족하고 아집이 넘치기도 하지요. 지금껏 제가 알던 공로라면 손책의 독립과 유요의 예장 침공, 황조의 여강 침공에 허우적거려야 마땅합니다. 또 제위를 참칭하는 최악의 수를 놓기도 하고요.”
원술이 제위를 꿈꾸는 일을 진규도 알고 있었구나.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헌데 어느 시점에선가 공로의 실책이 잦아들었습니다. 손책의 독립에 대해 다만 객장 장패를 단양태수로 임명해 관계를 보류하고, 군을 보내어 예장으로 밀고 들어온 유요를 떨쳐 냈으며, 또 다시 여강으로 군을 보내 황조의 병력을 격퇴시켰지요. 더불어 참람히 천자를 칭하는 일 대신 진왕 유총을 초빙하여 천자로 옹립하려고 하다니, 이는 제가 아는 공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진규의 눈이 빛났다.
“이것은 공로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의 주름진 손가락이 나를 정면으로 가리켰다.
“군의 선택이올시다.”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
“무릇 재사는 능력이 출중하여도 군자의 인망을 갖추지 아니하면 제 주군에게 쓰이지 못하는 법, 군께서는 재사의 역량을 군자의 인망으로 공로에게 관철하였으니 재사와 군자를 아우르는 재군겸재(才君兼材)이올시다.”
“낯 간지러울 정도로 과한 칭찬이십니다.”
진규는 간단히 부정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등은 넉살좋게 웃으며 아비를 거들었다.
“뭐, 그 고약한 성품의 원공로에게서 단기간에 신임을 얻으시고 이제 사위까지 되신 것만 봐도 아주 출중한 인물이시란 걸 잘 알겠거든요.”
나는 애먼 웃음으로 무마했다.
“먼 길 떠나시는 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다 가십시오.”
진등은 일어나 읍하며 물러나려는데 진규가 그를 막았다.
“원룡아, 잠시.”
진등은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섰다. 그와 나의 시선이 진규에게 향했다. 진규는 내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내 아들 녀석이 진왕의 복심인 진국상 낙준(駱俊)과 교분이 깊으니 이놈을 데리고 가시지요.”
“아?”
내가 진등을 바라보니 그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제가 낙 선생님하고는 제법 인연이 깊습니다. 제가 나서서 청하면 대세를 바꾸지는 못해도 다소간의 도움은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여 진등에게 부탁했다.
“군께서 나서주시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부디 동행해주십시오.”
진등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하하 웃었다.
“합비후께서는 지나치게 겸양하신 것이 탈입니다. 이렇듯 정중하시면 뭣도 아닌 제가 대단한 업적이라도 이뤄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진국으로 향하는 일행은 진등이 더해 도합 네 명이 되었다. 진등의 성격이 워낙 쾌활하기도 하여 여로는 떠들썩해졌다. 감녕도 넉살좋은 진등을 꺼리지 않았다. 더불어 그는 출중한 낚시 실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좋은 요리 칼을 항시 지참하면서 즉석에서 생선의 회를 떴다. 나는 민물에서 나는 고기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는데, 내가 먹기를 주저하면 항상 그는 기름진 뱃살 부위를 먼저 선점해 음미하면서 나에게 권했다.
“이 맛있는 것을 지나친 조심성으로 거부하시다니, 군께서도 한 가지 아쉬운 면모가 있으시군요. 아쉽습니다, 아쉬워!”
그쯤 되면 나도 마침내 젓가락을 들고 크게 썰어진 회를 한 점 입에 넣고 우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가리는 소금을 뿌리고 모닥불에 노릇하게 구워 밥에다 먹었다. 진국으로 가는 길은 포식의 연속이었다. 나는 패국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나서 진국의 경계에 도착했다. 내가 원술의 사자라고 밝히니 순순히 출입이 가능했다.
본디 일국의 봉왕은 허수아비일 뿐 실질적인 권력자는 상이었다. 헌데 유총의 경우는 달랐다. 임지인 진국에 버티면서 보한대장군을 자처하여 일대의 황건란을 평정하여 민심을 장악하고 충분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휘하에 둔 병력은 대략 1만을 헤아렸고 진국상 낙준 역시 명망이 높은 선비이니 큰 세력은 아닐지언정 예주의 일각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양적후의 사자로 왔다고 했는가.”
내가 진왕의 앞에 엎드려 예를 표하자 그는 평신하라 명하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허리를 꺾어 정중히 응대했다.
“그렇습니다. 양주자사 제갈찬입니다.”
“양주자사는 내가 알기로 일족인 유요인데? 그대가 양주자사인가?”
유총은 눈이 처진 순진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뼈 있는 질문을 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여기서 표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든지 그저 그런 겁박이나 꾐에 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면 샅바싸움에서 지고 마는 것.
“유요는 비록 천자의 명으로 양주자사가 되었으나 민심을 얻지 못하고 세력을 양성하지 못했으니 대장군께서 그를 공파하고 저를 양주자사로 삼으셨습니다.”
“역적죄로 다스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불손한 언사다. 또 대장군은 누가 대장군이란 말인가. 원술은 다만 양적후 좌장군일 뿐이다.”
“지금 한실은 원본초의 마수에 찌들어 있으니 충신과 역신을 가려낼 눈이 없고 선언할 입이 없습니다.”
“괘씸하다.”
유총은 그렇게 말했으나 노기가 깃든 목소리는 아니었다.
“유요가 비록 천자의 칙명을 구실 삼았으나 그것이 본디 원본초의 사사로운 포석임을 모르는 자가 천하만민 중에 있습니까? 양주의 속민들은 삿되고 무력한 유요 대신 유력한 대장군을 택하였고 대장군은 또 저를 택하였으니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이미 없는 듯한 한실 대신 백성들이 대신하여 제게 양주자사의 자리를 준 것입니다.”
유총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허황된 명분론이라니.”
“허황되지 않습니다. 일전에 이각과 곽사는 장안에 천자를 억류하면서 대사마와 대장군을 제수 받았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진왕 전하께서는 그들을 정녕 대사마와 대장군으로 인정하십니까.”
내 물음에 유총은 수염을 잡아당겼다.
“결코 아닐세.”
“원본초가 승상에 오르고 유요가 양주자사에 임명된 것 또한 이각, 곽사의 예와 다르지 않습니다.”
유총이 침묵한 채 웃음만 흘리자 그의 좌측에 앉아 있던 사내가 일어나 내게 물었다.
“진국상 낙준이오. 원공로는 어찌하여 군을 보내었소?”
저 자가 낙준이로군. 왜소한 체구의 중늙은이였다. 생김생김은 범상했으나 눈빛만큼은 골짜기의 검은 못처럼 깊었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눈짓하다가 이내 거두고 유총을 바라봤다. 나는 그의 앞에 엎드려 본의를 숨기지 않고 밝혔다.
“대장군께서는 진왕 전하를 새로운 천자로 옹립하여 기울어진 한실을 바로세우고 공의를 밝혀 백성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결속 안에 두려고 하니 부디 뿌리치지 마시고 제위에 오르십시오!”
내가 말하자 내 뒤의 감녕과 진등도 엎드려 크게 외쳤다.
“제위에 오르십시오!”
“허어……”
유총은 눈을 크게 뜨며 수염만 잡아당겼다. 무거운 긴장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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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깃거리
진등은 알려진 것보다 대단한 군공을 이룬 인물이다. 여포를 속여 그를 사로잡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손책의 침입을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물리쳤으며, 그의 뒤를 이은 손권의 침공도 저지한다. 서주의 명사로서 인망 또한 두터웠다고. 그런 그는 민물고기의 회를 즐겨 먹었는데, 기생충으로 인해 큰 병이 생겨 화타의 진찰을 받았다. 화타가 우선 조치하여 그의 병을 다스렸는데, 그가 말하기를 3년 후에 같은 증상이 재발할 것인데 뛰어난 의사가 있다면 목숨을 건질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3년 후에 진등에게 같은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미 화타는 숨을 거둔 후라 알맞은 처방을 받지 못한 진등은 기생충으로 인한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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