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173
유비는 분명한 영웅이다. 그를 따르는 이들 또한 영웅이라 불려도 충분한 인물들이었다.
‘아직 하북을 차지하지 못한 순욱이 유비를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러한 걱정을 시작으로 승태는 머리를 감싸며 한숨을 지었다. 이미 바뀌어 버린 미래를 예측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성향은 대충 알 수 있겠지만, 그게 정확히 맞을지도 모르겠군.’
상황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뀌기 마련이다. 지금의 순욱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순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조에 대한 충심이 많이 옅어진 것은 확실해 보였다.
전풍도 이전에는 엄청난 모사라 느껴졌으나,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넓은 판에만 집중하고 자신의 집은 관리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아니면 원담을 그저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큰 오산이지.’
원담이 업성을 수복한다는 명분으로 물러나자 하내는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 되었고, 우금은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분노한 전풍은 근황군을 천하에 요청했지만, 옥새가 찍혀있지 않은 표문이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유표나 유장, 그 누구도 군을 내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중원의 의사(義士)라 불릴 만한 이들은 도리어 순욱의 옆에 서서 낙양의 탈환을 외치고 있었다.
하북에서 역시 이를 상대할 군을 움직일 생각 따위는 없어 보였다. 아마도 그간의 알력 때문에 그런 듯싶었다.
‘뭐, 어차피 내가 신경을 쓸 일은 아니니까. 당장 중요한 일은 유비가 형주를 집어삼키는 것을 막는 것이니까.’
그러한 승태의 내심을 읽었는지, 진궁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유비는 지금 신야 일대만 직접 다스릴 뿐입니다. 만일 주공께서 원하신다면, 고순을 움직여 이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승태는 잠시 과거의 역사를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유비는 그 일로 인해 형주의 궁으로 들어가 많은 이들과 연을 맺고, 이후 적벽에서 훨훨 날아올랐다.
‘물론 이제 와 적벽대전이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그것보다 더 복잡해질 수도 있지.’
“그랬다가는 도리어 양양으로 들어가 유표의 뒤를 이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서주의 예가 있지 않습니까.”
진궁은 승태의 대답에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고 장군이 신야를 격파하고 양번까지 내려온다면, 위협을 느끼고 대신 나서 줄 사람을 찾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호적들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 사군(使君)이 될 것입니다. 당대에 가장 강한 이들을 상대하고 승리도 얻어 보았으니 말입니다.”
진궁은 불안해하는 승태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주공, 무엇이 문제입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나, 작금의 주공께서 유비를 이렇게 두려워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풍이나 저수, 손권과 같은 눈앞의 문제보다 멀리 있는 유비를 먼저 떠올리시니, 연유를 묻고자 합니다.”
“유비는 일신의 능력만으로 선대 패공(조조)과 온후(여포) 등의 제후들과 동등하게 맞서 왔습니다. 주변의 문인이라 해 봐야 미가의 인물과 손건뿐, 다들 모사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요. 그런데 그 유비가 만약 제대로 된 모사를 받아들이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무기가 여의주를 품을 것이라는 말입니까?”
승태는 진궁의 몸이 약간 떨리는 것을 느꼈다. 과거, 여포의 밑에서 유비를 베어 버리라 간언한 만큼 유비가 인재를 얻으면 어떠한 여파가 미칠지 한 번에 깨달은 듯했다. 동시에 지금까지 유비를 무시한 것에 대하여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조조와 원소가 죽은 후, 천하는 다시 정족지세에 빠져들었다. 물론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노리는 형국은 아니지만, 하북의 원가나 중원의 순가 모두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고 세를 키운다면 누가 그를 막겠는가.
순욱? 하후돈? 손권? 전풍?
그들은 저마다 따로 원하는 바가 있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중요한 게 아니다. 진궁 역시 패도(霸道)로 천하를 굴복시켜 질서를 만들자는 조조의 대의에 찬동하고 따랐으니, 어찌 각자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할까.
그러나 유비는 달랐다. 천하 제후들이 일주를 다스리며 천자와 같은 행세를 하거나 패권을 추구하려는 것과 달리 유비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있다.
한조의 복원, 그리고 그로 인한 광무제가 되려는 것이 유비의 뜻이었다. 만약 한조의 기틀이 잡히고 황권이 우뚝 서게 된다면, 자연스레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유비는 잘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진궁은 자신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찾은 듯 웃음 지었다. 천하에 가장 가깝던 조조와 원소가 죽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당대의 영웅들 역시 모조리 죽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주공, 소신이 이제야 주공의 깊은 뜻을 이해했습니다.”
“진 노사?”
승태는 갑자기 열기를 뿜어내는 진궁을 바라보며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간의 진궁이 해탈한 고승 같은 태도였다면, 지금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소신, 천하를 위하여 이 한 몸 기꺼이 불살라 보겠나이다. 그런 연유로 주공의 사람들을 쓰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진궁의 달라진 모습에 승태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그 말씀은··· 손에 피를 묻히겠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승태의 우려 섞인 물음에도 진궁은 말이 없었다. 아니, 그것이 답이었다. 모략을 펼치는 일은 칼 위에 서서 능력을 겨루는 것과 같아 실패는 곧 죽음이었다.
그런 현실을 잘 알기에 승태는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몇 걸음이 남지 않았습니다, 노사. 그런데 굳이 노사께서 나서셔야겠습니까?”
“그 몇 걸음을 방해하는 이들이 문제이지요. 이대로라면 영원히 주공의 뜻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이 노구(老軀)의 마지막 의지이옵니다. 그때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주공께서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분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것은 괜히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주공의 말씀을 듣는 순간, 배움을 처음 마주한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책을 백 번 읽고 깨달음을 얻을 때와 같이 말입니다. 저는 그 기쁨을 후세에도 남기고자 할 뿐입니다.”
“···노사.”
“그리고 저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을 모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실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니까요. 소신, 이제 더욱 바빠질 것 같사오니, 내정은 자어(화흠)와 백업(원유)에게, 외정은 노숙과 진등에게 맡기면 알아서 잘할 것입니다.”
“설마 서주의 진 대리도······.”
승태는 진규의 이름이 빠진 것에 눈을 번뜩였다.
“새 술은 새로운 독에 채우소서. 당장 지금은 경험이 많은 노신을 쓰시는 것이 맞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이들로 중심을 잡으셔야 할 것입니다. 마침 제갈 씨들이 능력이 좋으니, 충분할 것입니다.”
“···중달에게 전할 말씀은 없습니까?”
“조가의 정통을 가져오겠답시고 뛰쳐나간 놈에게 무슨 말을 남기겠습니까. 그놈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것입니다. 도리어 그놈에 대해 주공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중달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잘 아는 인물입니다. 하니 자신의 가치도 잘 알고 있지요. 그렇기에 그는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어떻게든 바꾸려 할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놈입니다.”
“조심히 써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에 대한 대우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칼을 거꾸로 돌릴 수도 있음입니다. 지위든 재화든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 가문의 형제들은 서로 간에 굉장히 친밀하니, 쉬이 말을 꺼내면 아니 됩니다.”
승태는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마의를 떠올리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 사마 씨의 인물들이 어떠한 일을 벌이게 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승태가 고심에 빠진 듯하자, 진궁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양수의 허영심을 누르고 사마의가 스스로 남의 가랑이를 기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그러니 주공께서는 너무 걱정 말고 그저 지금껏 해 온 대로 하시면 됩니다.”
진궁의 덧붙인 말에 승태는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야 다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지요. 오히려 걱정입니다. 저의 운이 더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승태의 엄살 섞인 말에 진궁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그 운은 커다란 산을 만들었습니다. 나무가 자라고 꽃과 동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제 주공이 말씀하시는 운은 쉽게 꺾일 만한 것이 아닙니다. 주공의 기반이 되고, 생활이 되었으며, 사상이 되었습니다.”
진궁은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주공, 수춘은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주종께서 뿌린 씨가 자라 거대한 나무가 되고, 온갖 과실을 맺게 되었으니까요.”
승태는 진궁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을 느꼈다.
“소신의 열망은 주공이 세운 거목이 가능한 한 더 많은 이들에게 열매를 주고, 전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주공께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궁의 지적에 승태는 과거 그와 나눈 말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주공의 권세와 부가 커진다면, 주공의 발아래 들고자 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되면 방패 또한 더욱 단단해질 것이고, 주공의 세상은 굳건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굳건한 울타리와 세상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라[國]라고 말입니다.”
진궁은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부복하며 말했다.
“주공, 그 길에 방해가 될 이들을 제거하는 것이 이제 소신의 목표요, 이유가 되었습니다. 조조가 죽고 더는 자신을 불태울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마지막 운까지 얻어 죽을 자리를 찾은 것 같사옵니다.”
승태는 뜨거운 열망이 담긴 진궁의 말에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몸을 일으킨 진궁은 아무 말 없이 노구를 이끌고 나갔고, 승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궁의 마음을 더는 바꿀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그시 눈을 감은 승태는 옆의 종을 쳤다. 그러자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내관이 달려왔다. 승태는 내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 노사가 다른 일을 하게 되었으니, 진등을 불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