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16
216화
채모가 남군에서 굳건하게 버틸 뿐만 아니라 여론전까지 펼치자 유기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에 유기는 유비에게 양양에 들어올 것을 명하고 황조를 강하 태수와 형주군 도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황조는 나이가 많다는 점을 내세워 계속 고사하였고, 결국 유기가 직접 절절한 심경을 담은 서신을 보내 겨우 등청하게 만들었다.
유기가 직접 마중을 나아가 노쇠한 황조를 부축하여 들이니, 양양 사람들은 그걸 보고 형주의 진짜 실세는 황조라며 혀를 찰 정도였다.
하지만 사정이 급한 유기는 그런 시선 따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대와 나는 같은 배를 탄 사람이거늘, 어찌하여 내 안위가 위협받는데 그대는 나를 지키려 하지 않느냐는 말이오.”
난데없는 닦달에 황조는 눈을 껌벅이며 유기를 바라보았다.
“주공, 소인은 이제 몸도 성치 않으며 머리도 굳어 판단도 흐리멍덩하옵니다. 어찌 소인 같은 인물에게 형주의 안위를 맡기고자 하십니까?”
“장군!”
황조는 자신을 향하여 언성을 높이는 유기의 태도에 지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지금껏 흐리멍덩한 눈빛과 달리 기세가 드러나자 유기는 덜컥 두려움을 느꼈다.
“소인은 분명 유비를 끌어들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자를 형주의 주인 자리에 앉히고 강하를 지키는 데까지입니다.”
일변한 황조의 모습에 유기는 태도를 바꾸어 애걸하는 표정으로 매달렸다. 강압적으로 나서 보았자 황조가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을 것을 느낀 탓이었다.
“장군, 이 유 모(劉某)가 어찌 장군의 능력을 모르겠습니까? 부공을 도와 형주를 평정하고 손견을 죽였을 뿐 아니라 복수를 외치는 손가의 준동을 강하에서 훌륭하게 막아 내지 않았습니까? 그간 부공께 올라온 보고들을 장자인 제가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약한 말은 마십쇼.”
“그것도 다 예전의 이야기입니다. 소신은 이제 늙고 노쇠하여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렵습니다.”
황조가 계속 사양하며 뒤로 빠지려 들자, 유기는 다시 분기를 내보이며 말했다.
“그대와 내가 작당을 꾸며 형주를 쥐었다고 천하가 말하는데, 어찌 그대는 그저 제 몸만 사리려 하는가!”
하지만 황조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았다.
“유 공께서는 소인이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소인은 선주를 따라서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다. 제게 늘 따라다닌 것은 감시와 견제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야 올바른 일을 하고 나서 편히 고향에서 눈을 감으려 하는 것인데, 그것이 그리도 못마땅한 것입니까?”
“장군,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형주가 안정될 때까지만이라도…….”
황조는 유기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형주의 군 전권을 주소서.”
순간, 유기는 눈빛이 흔들렸다. 황조의 요구가 너무나 터무니없이 느껴진 탓이었다. 자신의 숙부인 유반에게도 군의 전권을 맡기지 않았는데 그것을 달라니. 절대 불가한 말이었다.
“그러지 말고, 내 형주군 도독 자리를…….”
하지만 이번에도 유기는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황조가 급히 허리 숙여 예를 표하며 돌아가려는 시늉을 보인 탓이었다.
유기가 급히 황조를 붙잡았다.
“황 장군, 대체 어디를 가려 하시오. 내 드리리다. 전권은 넘겨줄 테니 채모를 남군에서 물러나게 하고 나를 진짜 형주의 주인으로 만들어주시오.”
마치 상대의 발바닥을 핥는 듯 굉장히 굴욕적인 모습이지만, 유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황조의 다리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그런 유기를 내려다보는 황조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이윽고 황조가 유기의 어깨를 잡았다.
“좋습니다. 형주군을 모두 주신다면 소인이 직접 갑주를 입고 남군으로 달려가 유종과 채모, 그리고 역도들을 모조리 처리하겠습니다.”
“고맙소! 고맙소! 내 황 장군의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이 유 모는 황 장군의 은덕을 평생 뼈에 새겨 두겠소.”
언뜻 보기에는 고개를 숙여 극진히 예를 표하는 듯 보였으나, 유기의 얼굴에는 비열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놓는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은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황조가 형주의 군권을 모두 손에 쥔다 해도 유비의 군세는 건드릴 수 없을 테니, 어떻게든 유비를 끌어들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채모와 유종만 처리하고 나면, 자신이 형주목을 이어받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물론 황조와 유비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때는 둘을 잘 충돌시키면 알아서 해결될 거라 편하게 생각했다.
솔직히 오랜 시간 유표의 밑에서 보고 배운 일이니 말이다.
‘어차피 이제 한조의 상황은 난장판과 같으니, 형주를 쥐고 범과 같은 장수들을 거느리면 중원에서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조정에서 정식적으로 관직을 받으면 소문도 잠잠해지겠지.’
유기의 구상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다. 중앙이 흔들리면 이득을 챙기는 것은 각지의 유력자일 뿐이니.
그래서 유기는 굳이 중앙의 정치를 침범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지금, 고순이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고 하지만, 그들만으로 한수를 끼고 있는 양번을 공략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까닭에 고순이 신야를 넘기 전에 채모를 처리해야 했다.
만약 두 사람이 합류하게 된다면, 수중에서는 채모가, 육지에서는 고순이 양번을 압박할 테니 말이다.
그럴 경우, 양번을 버리고 익주로 도망을 가야 할 수도 있음이었다.
‘어찌 되었든 황조가 나서기로 했으니, 기현과 여구에서의 지지부진한 싸움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남군의 사족들과 함께 나에게 반기를 든 이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살려 달라 비는 놈들에게는 단단한 목줄을 채워 버릴 테다.’
이렇게 유기가 행복회로를 빠르게 돌리고 있는 그때, 황조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내심 유기를 비웃고 있었다.
아직 유기는 모르는 일이지만, 황조는 이미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주기로 거래를 하였다.
‘공자, 공자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이 유비가 형주를 얻게 만드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가 유 형주와 같은 급이라 생각하실 테지만, 공자는 한참 모자랍니다. 어찌하여 유 형주가 후계로 삼지 않으려 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니, 공자의 운도 여기까지입니다.’
짧게 생각을 마친 황조는 유기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주었다. 유기는 마치 고마워 어찌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황조 또한 노쇠한 장군이 전장에 나가는 당당한 표정이었다.
한바탕 촌극 같은 순간이 지나고, 황조가 아들들의 부축을 받으며 말했다.
“이제 되었다. 너희는 급히 달려가 한승에게 전하여라, 모든 것을 갖추어졌다고 말이다.”
“예, 아버지.”
명을 받은 둘째가 빠르게 달려가 사라지자, 황조는 큰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채모를 잡으러 가자꾸나. 손권이 부디 미친 짓을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하하, 설마 강동의 반을 차지한 자가 무슨 짓을 벌이려 하겠습니까. 분명 수춘후와 적당히 거래하고 풀려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서로를 죽일 듯이 대치하겠지요.”
“그러면 좋겠는데, 내 손가 사람 중 제정신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기실 영웅이 되는 데는 제정신이 아니어야 한다 던데 내 보기에는 그냥 단명하는 놈들의 말 같구나. 하여튼 그러니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월족에서 사람이 왔는데, 어찌해야 할까요?”
“전장에 투입할 인원이 필요하니, 두둑이 챙겨 주고 병사들 좀 받아 오거라. 채모, 이 인간 또한 보통내기는 아니니, 쉬이여기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황조가 마차에 오르려 하자 노복이 뛰어와 몸을 숙여 발판을 만들었다. 황조는 그의 등을 밟고 올라 마차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런 후, 큰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형주독의 자리를 인수받고 유표의 부곡 일백을 이끌고 오너라.”
“어차피 합도 맞추지 않아 같이 운용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굳이 데려올 필요가 있겠습니까? 거기다 고작 일백 정도라면 차라리 일대에서 징발을 하는 것이…….”
황조는 그 말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큰아들이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황조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모자란 놈아, 그렇게 생각이 짧으니 어찌 내가 눈을 감겠느냐. 설마 내가 그들을 전투에 참여시키려 부르겠느냐. 그들에게 보여주고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 형주는 이 황조의 손에 들어왔단 것을 말이다. 둘째도 그렇고, 모두가 그 모양이니… 쯧쯧, 방계만 아니었어도 한승에게 가문을 이어 가게 하는 것인데…….”
자신을 사정없이 깔아뭉개는 어조에 큰아들은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황조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으로 마차를 출발시켰다.
* * *
협력을 바라는 채모의 서신에 형주 사군은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형주 자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처지가 바뀌기 때문에 형주의 패권을 걸고 겨루는 전투는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거기다 양주에서 손권이 사로잡히고, 주유 또한 어떠한 이득도 보지 못한 채 오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니, 예장의 손가를 막기 위한다는 변명도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유기와 채모가 싸운다는 이야기가 형남 사군에 퍼지자 내부의 호족들도 은근히 채모에게 힘을 보탤 것을 종용하였다.
그에 김선이 예전 동탁 토벌의 사례를 언급하며 사군 태수들에게 뜻을 모으자 주장하니, 각 태수들은 그에 호응하였다.
사실 한 지역이라도 다른 견해를 가진다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이곳의 사정이니, 차라리 뜻을 합쳐 움직인다면 형주에서 더 큰 권한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렸었다.
무릉 태수 김선, 장사 태수 환계, 계양 태수 조범, 영릉 태수 유도가 형남 사군의 뜻을 한데 모으기 위해 각자 기천의 병력을 일으켰다.
그중 정예 부곡만 기천이고, 그들을 수행하는 이들까지 모두 합치면 무려 3만에 이르는 많은 인원이 무릉에 모이게 된 것이었다.
김선은 태수들을 대접하기 위해 큰 연회를 열었다. 태수들은 처음에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술을 마시는 것에 거부감을 드러내었지만, 아리따운 여인들이 흥취를 보태자 김선을 칭찬하며 연회에 취해 갔다.
그들을 한껏 취하게 만든 김선은 몰래 연회장을 빠져나와 황충과 만났다. 황충은 김선의 부곡들과 함께 칼과 활을 들고 서 있었다.
“내 황 장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유 사군이 형주를 차지하고 황실(皇室)이 바로 세우는 길에 유 사군이 앞장서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일을 치르는 것이네. 부디 조금이라도 피를 적게 흘릴 수 있게 해 주게.”
황충은 그런 김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걱정하지 마소서. 반대하는 자들만 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