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전투가 끝나고 전장을 둘러보던 방통은 장일의 시체 앞에서 이마를 움켜쥐었다.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던 인물이라 장일의 죽음이 안타깝게 느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향후 방통의 구상에도 큰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방통은 전후(戰後)에 그를 농민들을 감독하는 자리에 앉혀 체계화된 세력을 만들려 했는데, 그게 모두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창구를 잃은 농민병들은 저마다 중구난방 요구를 해 댈 테고, 방통으로서는 당연히 수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농민병들은 이상한 짓을 벌이려 할 것이 빤했다.
‘그러니 장각이 죽자마자 황건적이 무너졌지. 괜히 지도자와 체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물론 황건이 무너진 것은 단순하게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장각을 비롯한 수뇌부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었다.
장각 역시 출신은 비루하지만, 오랜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인간을 이끌 줄 알았다. 그저 자신의 말을 전달할 동생들과 달리 체계화된 조직과 명령의 중요성을 파악한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어 구성원의 이탈을 방지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종교로서의 모습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느 사이비가 그러하듯 창시자의 죽음 이후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피하지 못했다.
장각 사후에 그가 말한 신의(神意)를 이어 나갈 이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의 동생들 또한 정당한 후계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각지에서 장각의 진정한 후예라 칭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욕망을 분출하였고, 그 결과 서로 힘을 모으지 못한 채 관군에게 하나둘 격파되어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남은 황건의 잔당들은 도적이 되거나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되어 버렸다. 또는 살기 위해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현재 방통이 이끌고 있는 농민병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나마 그들을 통솔하던 장일이 죽었으니, 결국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중 가장 쉬운 방법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이용하여 그들을 현혹시키는 것이었다.
‘흠, 태평도는 도교의 오행에 기반하고 있고, 거기다 토덕(土德)을 숭상하니, 그와 관계된 무엇인가를 던져야 미끼를 물 것인데… 과연 무엇이 적당할까?’
숙고하던 방통은 이내 무엇인가 하나를 떠올렸다. 저들이 말하는 토덕으로 연을 묶을 인물이 하나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침 적당한 이가 하나 있군. 그에게 이들을 떠넘겨 버리면 알아서 처리할 테지.’
방통이 떠올린 것은 승태였다. 일전에 미축이 서주와 수춘 일대를 쉬이 다스릴 수 있도록 승태에게 방도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화덕성군의 선택을 받은 자신을 이어 토덕의 가호를 받은 승태가 자리를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승태와 미축이 맺은 거래의 결과로, 유비를 구해 주는 대신 아무 잡음 없이 지배권을 넘기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머리가 깨어 있는 이들은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민간에서는 오히려 살이 붙어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비록 승태가 전장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언제나 지지 않고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이겨 내니, 중재와 조화를 상징하는 토덕의 가호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뿐 아니라 승태가 조조에게 반대하며 사람을 살린 것, 농작을 위해 물길을 바꾸는 일, 습한 양주 땅을 얻는 일 등 별의별 일들마다 구실을 가져다 붙였다.
작금에는 그러한 헛소리가 서주와 양주뿐 아니라 천하로 퍼져 나가 마치 승태의 승리 뒤에는 토덕성군의 가호가 함께하였기 때문이며, 그걸 기리는 사당들마저 지어졌다.
그러니 황건이 뿌리인 이들 농민병들 또한 자신의 수작에 쉽게 현혹될 거라 방통은 자신했다. 과연 그 생각은 꽤 잘 먹혀들었다. 살아남은 황건의 노사(老師)들이 방통의 막사에서 크게 놀라 했다.
“아니, 그곳이 장 신사(神使)께서 꿈에 본, 성군께서 다스리는 낙원이라는 말입니까?”
‘응? 장일은 대체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하여간 이래서 광신도들과는 말이 안 통한다니까.’
방통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성군이니 낙원이니 하는 말들이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탓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려면 자신의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급히 고개를 내저어 정신을 차린 방통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늙은이를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그렇소. 장 신사는 나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대해 이야기하였소이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수춘후께 인도할 것을 부탁하였소이다.”
방통의 말에 노인들은 놀란 듯 웅성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장일이 굉장히 우울한 표정을 짓던 것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였기 때문이라 여긴 것이다.
“그래서 장 신사가 그리 어두워 보였군. 운명이 그리해서…….”
“그렇다면 어찌하겠는가, 장 신사의 유지에 따라야지. 우리가 따르지 않으면 천공장군(장각)께 벌을 받지 않겠는가.”
“그렇지. 그렇고말고.”
방통은 서로 웅성거리며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에 내심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그들의 의견이 거의 찬성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통은 그들을 쭉 훑어보고는 이내 막사를 나섰다. 어차피 더 있어 봐야 자신에게 뭔가를 더 얻어 내려고 수작이나 부리려 들 테니, 괜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막사에서 나온 방통은 멀리서 나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턱을 괴었다.
‘이미 물러난 유비가 다시 돌아올 리는 없으니 필시 지원군일 터인데… 과연 고 도독의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될는지 궁금하군.’
방통의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달려오는 기마 사이로 고순과 장료, 하후연의 깃발이 보인 것이었다.
* * *
막사 가까이 다다른 하후연은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그런 후, 전장을 둘러보았다. 그와 동시에 불탄 시체들이 즐비한 참상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빌어먹을, 몹쓸 기억이 떠오르는군.”
고순이나 장료와 달리 하후연은 직접 황건적을 상대한 경험이 많았다. 당시에도 황건적들은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동귀어진하듯 달려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웃으며 제 몸에 불을 붙이고는 했다.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장료의 시선에 하후연은 허탈한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듯하니, 자네들은 운이 좋은 셈이군.”
얼핏 무시당한 것 같은 발언에 장료는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북방의 이민족들을 상대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그런 고된 삶을 인정하지 않는 기색이 느껴진 탓이었다.
“장군께서는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북방은 이민족들에게 시달려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습니다.”
하후연은 장료의 말에 약간 당황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사실 누가 더 어려운 전장을 겪었는지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의 상황과 과거의 상황을 연결하여 느낀 점을 말했을 뿐이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네. 황건적들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달려들기에 사람 타는 냄새를 맡아 보지 못한 것에 관한 이야기였네.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패공께서도 황건적들의 시체를 모조리 모아 불태워 버리셨지. 물론 그들을 가여이 여겨 추모하거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분은 전염병을 염려하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왠지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묘하다는 것이지. 절대 자네들을 무시하려 한 것이 아니란 말일세.”
급히 말을 맺은 하후연은 고개를 내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빌어먹을,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드는군. 두 번 다시 그런 참상을 볼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그런데 불타 죽은 이들 대다수가 변변한 무기조차 안 보이는군요. 혹시 함정으로 우리를 유인하는 것 아닙니까?”
하후연은 수염을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렸다.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순은 장료의 말에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닐 것 같군.”
고순은 의외로 잘 마련된 문빙의 군영과 나팔을 불어 대며 전투 준비에 나서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유비가 우리를 속이려 했다면, 저렇게 경계하는 모습이 아니라 반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겠는가.”
고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군영에서 인마 몇이 달려 나왔다. 하후연은 조심스레 창을 움켜쥐었지만, 상대는 전혀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 급히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였다.
“소인, 양양 방가의 사원이라 하옵니다.”
* * *
유비는 퇴각을 결정했지만, 그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양양으로 돌아가는 것은 패퇴가 아닌, 적의 공세를 물리치고 금의환향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탓이었다.
형주의 사족들에게도 양번을 지켜 냈다고 당당히 주장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패륜을 저지른 유기를 끌어내리고 유비를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은밀하게 나돌 정도였다.
그 소문을 들은 유기는 유비를 양양에 들이지 않고 번성에 주둔시켜 북방을 경계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럼에도 유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갈량은 형주의 사족들을 계속 설득해 나갔으며, 등지, 반준, 마량, 마속과 같은 형주의 신진 사인들이 대거 유비를 따르며 점점 세를 키워 갔다.
황조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마치 중립을 지키는 듯 형남 사군과 남군을 점령하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이 더욱 어렵게 흘러가자, 유기로서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어찌하여 형주의 호족들이 부공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비렁뱅이의 뒤를 쫓는단 말이냐!”
이미 유기의 옆에는 조언을 건넬 책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내관들만 고개를 숙이며 유기의 이야기에 동조하였다. 분툥을 터트리던 유기는 결국 황조를 찾았다.
“그래, 황조! 황조를 불러와라!”
“황조는 거동이 불편하여 남군에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뭐라?!”
내관의 말에 유기는 더욱 분기를 내뿜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내관은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숙였는데, 유기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관의 등에 칼을 꽂고는 말했다.
“네놈도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다시 서신을 보내 부르면 될 것 아니냐! 황조가 올 때까지 계속 서신을 보내라고!”
마치 미친 듯한 유기의 난동에 내관들은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더욱 충격을 받은 유기는 현기증이 나는 듯 뒷걸음질했다.
땅따다당!
유기의 손에 들린 칼이 힘없이 미끄러지며 바닥을 굴렀다.
“쿨럭쿨럭!”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온 기침에 유기는 황급히 손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러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유기는 이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내 패륜(悖倫)을 저지르고 이 자리에 올랐는데, 하늘은 정말 무심하기도 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