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헌제 유협은 높은 계단 위에 서서 여기저기 불타 무너진 궁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었다. 차라리 동탁과 조조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탓이었다.
“그때는 많은 충신들이 모여들어 나만 정신을 차리고 정사에 임하면 되었다. 한데 지금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천하가 나를 버린 것인가.”
처연하기 짝이 없는 유협의 말에 그를 따르는 내관들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였다.
사실 유협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참상이 자신으로 인하여 일어났다는 것을.
과거, 동탁이 죽고 난 뒤, 이각과 곽사가 권력을 틀어쥐는 일을 겪은 유협은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자신을 압박하는 조조를 찍어 누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조조는 그들을 물리치고 도리어 그로 인해 황제의 권한은 더욱 축소되었다.
“어찌하여 하늘은 나에게만 이리도 가혹하단 말이냐. 아니면 황건의 말대로 진정 한조가 저물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란 말이더냐.”
“폐하, 아직 한조는 무너지지 않았사옵니다. 하늘 아래 수많은 충신이 있으니, 폐하께서 마음을 다잡고 기회를 노리신다면, 능히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옆에서 엎드려 우는 환관을 바라보며 유협은 비참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앞에는 전풍이 포박된 상태로 걸어 올라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제는 더더욱 슬픔에 젖었다.
“꼭 이래야만 하겠는가? 그대는 나를 위해 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달려온 유일한 인물이네. 심지어 황족 누구도 나를 지키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하지만 전풍은 그저 묵묵부답할 뿐이었다.
“황숙이라 칭하며 인의를 내세우던 인물까지 나를 버렸는데 자네만은 내게 와 주었지. 그런데 꼭 이렇게 해야겠는가? 순욱은 한조를 따르는 인물이니, 내가 청하면 그대의 목숨만큼은 살릴 수 있을 것이네. 그러니 내 곁에 남아 주면 아니 되겠는가?”
유협의 간절한 바람은 이제 숫제 애원이 되었다.
“부디 내 옆에 남아 조언을 해 주게. 아무것도 모르고 입만 산 이들을 물리고, 그대의 말만 믿겠네.”
유협은 전풍 앞에 쪼그려 앉아 포박을 풀고 차가워진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간 황제인 자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이 사방에 넘쳐 났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죽고 난 후, 슬슬 자신에게 채워진 족쇄가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에 유협은 그릇된 판단을 내리고 말았다. 권력을 얻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자신을 따를 거라 생각하여 거침없이 거사를 치른 것이다.
예전 원소가 낙양의 십상시를 처리하기 위해 난리를 친 것처럼 자신의 시도도 성공을 거둘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자신은 다시 굴욕적인 입장이 되었고, 자신을 위해 들고일어난 전풍은 죄인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네. 한조의 충신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 문제이지. 이런 상황에서 그대마저 내 곁을 떠난다면, 나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는가.”
허도는 황제에 대한 충심보다 순가에 대한 존경심이 더 강한 지역이라 유협의 이번 행동은 혼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영천의 호족들이 황제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순욱이 조조의 권위를 모두 잇지는 못했지만, 영천의 인재들은 순욱과 순가에 대한 경애심(敬愛心)을 가지고 그들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난세에는 멀리 있는 황제보다 가까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영천의 뭇 사족(士族)들에게 경애를 받는 순욱은 조조의 뒤를 이어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고, 원가와 손을 잡고 어리석은 일을 벌인 황제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무자비하게 몰아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비를 내세우며 다시금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순욱의 행동에 많은 사족들은 오히려 더욱 큰 지지를 보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번 낙양공략전이었다. 무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에서처럼 포위만 한 채 시간을 끈 것.
이를 바라보는 사족 중에는 순욱이 전략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황제에 대한 존앙과 군자에 대한 도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런다고 하였다.
물론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 그것은 순욱의 뜻이 아닌, 옆에 있는 순유와 같은 전술가들의 말을 따랐기 때문이다.
“폐하, 이미 보셨지 않습니까. 순욱이 만들어 내는, 그 끝도 없는 물자의 행렬을 말입니다. 지금껏 그러한 물량을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원 공이 유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한 역량이 순욱에게 쥐어졌으니,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낙수와 황하를 막고, 육로 또한 중요 지점을 모두 막아 버려 낙양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반면, 순욱은 압도적인 보급을 통해 도리어 주변 고을의 구휼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러한 실상을 깨달은 황제와 전풍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두 사람이 투지를 불사르며 결사항전을 외쳐 봐야 낙양 내의 성민과 병사들에게 괴로움만 가중시키는 꼴이었다.
급기야 사람 고기가 공공연히 거래되는 모습을 목격한 전풍은 몇몇 권신들을 베어 버리고 항복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황제 또한 낙양의 사정이 그 지경까지 악화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전풍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네가 나의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대가…….”
전풍은 말을 이으려는 유협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황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는 황제를 대하는 예에서 벗어나는 행동이지만, 이미 더는 생에 미련이 없는 전풍으로서는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순욱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순욱이라면 죽는 순간까지 예와 식을 지켰겠지. 일평생 규칙을 지키고 따르며 살아왔으니 말이야.’
고개를 내저어 상념을 털어낸 전풍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 무엇인가를 이루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소인이나 폐하 모두 말입니다. 저는 순욱이 그런 현실을 보여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전풍의 말에 유협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전풍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일어났다.
“신하가 감히 천자를 가르치려 한단 말인가! 너 역시도 결국은 충신이 아닌, 한낱 모리배에 불과했구나. 이딴 인물을 어찌하여 충신이라 부르는지, 다들 눈이 돌아갔구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화를 내는 유협의 모습에 전풍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치기 어린 행동을 보이는 유협을 보니, 진정 한조는 이어 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래서야 언제든 순욱을 없애기 위해 수를 부리려 하지 않겠는가. 순욱이 아무리 한조에 대해 충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정작 황제가 이 모양이어서는 답이 없었다.
황제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털어낸 전풍이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폐하, 부디 만수(萬壽)를 누리소서. 그리고 행여라도 순욱을 도모하려 하지 마소서. 폐하께서 천하에 아직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오롯이 순욱뿐입니다. 그만은 한조가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소신은 미력하여 도울 수 없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전풍은 그대로 돌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절을 하였고, 유협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마지막 인사를 마친 전풍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만 가세. 내 다른 이들과 달리 죽기 전에 폐하를 뵙는 큰 광영을 누리었으니, 실로 기쁘네.”
병사들의 도움으로 바닥에서 일어난 전풍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이윽고 전풍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즈음, 유협이 눈물을 흘리며 그가 떠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 * *
낙양의 성문이 열리며 병사들이 일단의 죄인들을 이끌고 나왔다. 마치 굴비 엮듯이 밧줄에 묶인 죄인들은 병사들의 거친 손길에 속수무책 딸려 가다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 뒤로 깡마른 유협이 내관들과 함께 비통한 얼굴을 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개방된 성문 앞에는 순욱이 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유협은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황제인 자신은 먹을 것이 없어 제대로 끼니도 챙기지 못하였는데, 순욱은 굉장히 깔끔해 보이는 의복을 걸친 채 여유가 넘쳐 보였다. 심지어 병사들조차 힘들어 하는 기색이 일절 없었다.
결국 유협이 무언가 말을 하려 하였으나, 이내 전풍의 조언이 떠올라 화를 짓눌렀다.
유협이 나타나자 순욱은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극진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소신, 순욱이 폐하를 뵈옵니다.”
“폐하를 뵈옵니다!”
순욱을 따라 모든 이들이 바닥에 엎드리자, 마치 만백성이 황제를 추앙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는 사실 당연한 일이겠으나, 정작 당사자인 유협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불쾌함이었다.
순욱의 본심이야 모르겠지만,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모든 병사들에게서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공경하여 허리를 숙인 것이 아니라 그저 순욱이 행동을 보이니 마지못해 따르는 것이었다.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유협은 새삼 슬픔이 차올랐다.
더욱이 몇몇 순욱의 호위 무장들은 오체투지를 한 상황에서도 고개를 들어 혹여나 유협이 무슨 짓을 벌이는 것은 아닌가 슬쩍슬쩍 살피고 있었다.
과거 같았으면 그 무례한 행동에 유협이 당장 칼을 뽑아 들고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봉변을 당하는 것은 자신만 될 뿐이었다.
이래서야 누가 황제인지 모를 지경이라며 유협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체념 어린 표정을 지으며 순욱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호위 무장들의 손이 조용히 품속으로 들어갔다. 행여나 유협이 이상한 기미라도 보이면 당장 칼을 꺼내 들어 휘두를 것이 분명하였다.
황제의 뒤에 있던 내관들도 그런 모습을 보았지만, 나서서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역시 황제는 이미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자신을 위해 나서 줄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낀 유협은 큰 서글픔을 느끼며 순욱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하였다.
“사공, 일어나시지요.”
하지만 워낙 기운이 빠진 유협은 무거운 갑주를 걸친 순욱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버둥거리다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실은 순욱이 유협의 의지에 반해 버틴 탓인데, 그야말로 황제로서의 위엄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