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34
234화
꿈쩍도 하지 않는 순욱의 태도에 유협은 당혹감을 느꼈다. 지금껏 순욱이 이런 식으로 거부 의사를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유협은 자신의 힘이 약해 그런 것이라 여겨 다시 한번 다가가 말했으나, 순욱은 여전히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을 도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보다 못한 내관이 달려가 유협을 자리에서 일으켜 주고는 순욱에게 질책하듯 말했다.
“사공, 장난이 너무 심하시오! 그만 일어나시오!”
내관의 외침에 순욱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내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데 그 눈빛 속에는 어떠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내관은 무심한 순욱의 모습에 두려움을 가지고 뒷걸음질을 하다가 그만 넘어질 뻔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순욱이 급히 손을 내밀어 내관이 넘어지는 것을 잡아 준 것이다. 유협과 달리 묘한 자세로 순욱의 손을 잡은 내관은 이내 그 손을 쳐 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찌 황실을 받드는 삼공 중 한 명께서 이런 행실을 보인단 말입니까? 사공으로서의 책임감이 없으시단 말입니까?”
순욱은 내관의 말에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알 수 없는 태도에 내관은 더욱 당황하였다. 이윽고 순욱이 말없이 몸을 돌려 유협을 바라보았다.
그간 자신을 대할 때 가지고 있던 존숭(尊崇)의 감정은 사라지고, 도리어 경멸의 감정만이 담겨 있는 눈빛.
유협은 순간 욱하는 기분에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순욱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말에 타시지요, 폐하. 어찌 폐하께서 걸음을 옮겨 허도까지 가시겠습니까.”
불손하기 짝이 없는 눈빛은 오직 그만이 볼 수 있었기에 유협은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는 더없이 공손한 모습이었기에 괜히 성질을 부렸다가는 황제에 대한 인식만 더 안 좋아질 뿐이었다.
‘동탁이나 조조보다 더욱 무섭구나. 동탁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었으며, 조조는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순욱에게서는 그저 나에 대한 실망만이 느껴지니…….’
순욱의 달라진 모습에 유협은 더는 말을 이어 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언제 순욱이 마음을 바꾸어 자신을 어찌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새삼 들었기 때문이다.
혹여 자신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자신을 따르는 내관과 측근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는 상황.
그간 순욱이 보여 온 모습으로는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져 버린 지금으로서는 뭐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결국 꼬리를 내린 유협이 힘없이 말했다.
“알겠네. 내 많이 피곤하니, 사공의 말대로 말을 타고 가겠네. 그런데 나를 호종하는 인원들에게도 말을 내줄 수 있겠는가? 그동안 다들 굶주려 걸을 힘도 모자랄 것이네.”
순욱은 유협의 뒤로 늘어선 내관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황제의 말마따나 내관들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듯하나, 딱히 걷지도 못할 정도는 아닌 듯했다.
“폐하, 말은 한정되어 있사옵니다. 만약 저들에게 말을 내준다면, 병사들이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병사들은 힘이 넘치지 않는가. 내관들이 지쳐 쓰러지게 되면 분명 행군이 느려질 것이니, 부디 고려해 주었으면 하네.”
나름 타당한 의견이라 순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뒤에 서 있던 순심과 순유, 우금, 정욱, 만총, 문직 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의 지엄한 명이 있었음에도 그 말이 장수들 간의 논의를 통해 가부가 내려지는 것을 지켜본 유협은 극렬한 수치심을 느꼈다.
‘어찌 한조의 황제의 뜻이 일개 장수들의 생각에 따라 결정된단 말인가. 아아, 이미 나는 황제라 부를 수조차 없는 신세가 되었구나.’
자신의 신세에 새삼 괴로워하던 유협은 순욱이 다가오는 모습에 침을 삼켰다. 혹여나 거절을 당하면 어떻게 되나 하는 걱정이 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순욱은 유협의 말에 동의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 말을 양보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또한 양초가 넉넉하니, 굶주린 내관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관뿐 아니라 신료들도 챙겨 주시게. 부탁하네.”
사실 순욱의 입장에서 황제를 보필하는 내관과 달리 신료들은 죄인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어느 정도 유협의 의중이 반영되기는 하였겠지만, 직접적인 반기를 들어 올린 배후에는 그들의 부추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조 같았으면 당장 그들의 목을 쳐 날렸겠지만, 태생이 문신인 순욱은 그렇게 하기에 너무도 합리적이었다.
“황제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유협은 순욱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 주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큰 착각에 빠져 버렸다. 그에 결국 선을 넘기 시작했다.
“사공, 양곡이 있으면 낙양의 민초들에게도 좀 나누어 주게. 그간의 봉쇄로 많은 이들이 배를 곪고 있네.”
순욱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인내를 갖고 배려해 주었는가.
낙양을 포위한 상태에서도 순순히 문을 열면 언제든 식량을 내주겠다며 변변한 공격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끝내 문을 걸어 잠근 주제에 이제 와서 챙겨 달라고 부탁을 하니, 그 뻔뻔함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순욱이 분노하여 얼굴을 붉히는 가운데, 순심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
“받아들이십시오, 사공. 비록 저들이 사공께 반기를 들기는 하였으나, 나름 황제에 대한 충성을 보였다는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넓은 아량을 보여 주는 것이 옳습니다. 대신 식량을 베푸는 것이 사공임을 분명히 밝히시면 될 것입니다.”
순욱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순욱은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이전과 달리 순욱의 눈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예측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그에 순심은 저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정 원치 않으시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저들도 자신들의 죄를 잘 알 테니 말입니다. 아마 포위를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순욱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순심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세요. 나의 이름으로 하되, 폐하께서 요구한 것도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입니다.”
“사공, 그리하면 칭송의 대상이 흐려지게 됩니다. 사공의 넓은 아량을 내보이기 위해서는…….”
“일은 올바르게 하여야 하는 법입니다. 굳이 좋은 일에 흙탕물을 묻힐 이유는 없지요.”
순욱의 확고한 모습에 순심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유협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것을 본 순욱은 몸을 돌려 포박된 이들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의 손에 끌려오는 그들 사이로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비록 잡힌 몸임에도 꼿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는 여전히 당당한 태도로 주위의 병사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내 비록 패전지신(敗戰之臣)이기는 하지만, 내 죄는 너희가 아닌 사공께 받아야 할 것이다. 한데 이리도 나를 대하다니, 이러한 폭압에 대하여 사공께서는 알고 있느냐?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단단히 따질 것이다. 한조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이가 지금 여기 있다고 말이다.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병사는 순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 전풍은 지체 높은 신분이 맞다. 이번 반란 사건이 아니었다면, 병사로서는 함부로 말을 붙일 수도 없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분명한 죄인 신세. 그런 주제에 꼿꼿이 목을 치켜들고 카랑카랑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앞서서 죄인들을 끌고 가던 부장 한 명이 다가와 전풍의 앞에서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역난이나 일으키려 한 놈 주제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느냐!”
서슬 푸른 위세에 전풍이 움찔하는 가운데, 부장은 고개를 돌려 병사에게도 호통을 쳤다.
“네놈은 죄인의 말에 휘둘려 무얼 하는 것이냐! 말을 듣지 않으면 두들겨 패면 될 일이다! 알았으면 어서 이 죄인을 끌고 가라! 알겠느냐!”
“네!”
한바탕 정리를 끝낸 부장이 돌아가자, 병사는 전풍을 노려보며 말을 꺼냈다.
“그래, 하마터면 역난의 주역인 네놈의 말에 속을 뻔하였구나. 감히 네놈이 나를 놀려?”
분노한 병사가 창대로 전풍을 때리려는 순간, 순욱이 다가가 제지했다. 갑작스런 순욱의 등장에 병사가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 순욱은 팔을 저어 병사를 물러나게 했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전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갑주를 걸친 순욱의 모습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군. 모사가 주군을 넘어섰으니, 이것이야말로 대단할 노릇 아니겠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혈기 넘치는 젊은 인재라고만 여겼는데, 이제는 내가 감히 바라보기도 어려운 자리에 올랐군. 그래, 왕이 될 재목이 된 것인가?”
사정없이 비꼬는 말에 순욱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전풍을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꾸미셨습니까? 그저 원가가 무너진 이후에 항장이 되셨다면 소인이 선생을 모셨을 텐데요.”
그 말에 전풍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주군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떠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주군이 졸하였을 때는 또 어떤가?”
순욱은 전풍의 말에 답하지 못하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전풍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신이야말로 주군의 뜻을 이어 나갈 재목이라 생각했겠지. 아닌가? 이런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이루어지 않을 것이라 말이네.”
여전히 순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전풍은 그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왜 말이 없는가?”
“굳이 말을 해야 합니까?”
“뭐, 그렇다면 내 마음대로 생각하지. 어쨌든 나는 지금 몹시도 편하네.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으니 말이야.”
“좋으십니까?”
“좋지, 좋아.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모두 사라졌으니 말이야. 군주는 무치(無恥)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이 아니 되더군. 주군을 비판하던 내 입으로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순욱은 순간 자신이 패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생의 능력이 더 좋은 곳에 쓰일 수 있는데, 어떠하십니까?”
“나를 쓰려고 하는가? 아니, 쓰고도 믿을 수 있겠는가?”
“커다란 권력 앞에서도 맞서 싸울 수 있는 분이 선생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윗사람에게 거스르는 인간이란 소리인가?”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기야 자네가 나를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긴 하군. 그런데 말일세, 나는 그리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이제 와 돌이켜보니, 내가 할 바는 모두 다 한 것 같네.”
순욱은 가만히 서서 전풍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전풍은 웃음을 흘리며 순욱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조용히 말을 꺼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