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허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음에도 웃음을 흘리고 있는 전풍을 보며 순욱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전풍이 건넨 말이 머릿속에 계속 머물렀다.
* * *
“나는 사서에 쓰일 글들이 보이는 듯하군. 한데 자네는 어떠한가?”
순욱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전풍이 무얼 말하려는지 그 스스로도 깨닫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풍은 마치 자신이 승자라도 된 것마냥 말을 이어 나가고, 그에 비례해 순욱의 얼굴은 더욱 굳어 갔다.
“내 눈에는 한조의 붕괴가 보이네. 황건의 난 이후로 천하가 혼란에 휩싸이고, 동탁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황조는 정통성은 바닥을 쳤지. 거기에 이각과 곽사가 폭압하여 마지막 남은 싹을 잘라 버렸네.”
잠시 말을 끊은 전풍은 숨을 고르고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이윽고 조조가 황제를 봉대하였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는가? 천자를 쥐고 흔들며 사방을 역적으로 만들었고 결국에는 천자의 가족들마저 참하였지. 그 모든 과정을 바라보기만 한 그대는 어떻게 쓰일지 궁금하군. 아, 서주의 학살을 빼먹었군.”
수치심에 휩싸인 순욱이 얼굴을 붉게 물들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전풍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호위들이 나서려 했으나, 순욱이 손을 들어 막았다.
“비록 나는 주군과 같이 죽지 못한 비굴한 선비이긴 하나, 주군의 명맥을 잇기 위해 세력을 다잡았고, 선비로서 천자의 부름에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왔네. 그리고 죽을 자리임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알고 천자를 보위하였으니, 모자라다 평을 들을지언정 청사에 내 이름은 충의로 대변될 것이네. 그리하면 나의 주군께서도 청사에 영예롭게 적힐 것이네. 이 전 모의 행동으로 주군 또한 충신으로 남게 되겠지.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 아닌가.”
전풍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었다. 원소가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자 한 일들을 모조리 지워 버리고 자신의 행동으로 원소를 미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자네가 나를 죽이고 나서 무슨 길을 걸어갈지 궁금하네. 내 감히 한번 말해 보지. 자네는 언제나 충의를 가슴에 품고 있겠지만, 지금은 이미 선을 넘어 버렸지. 과거와 달리 두 개의 하늘에 충심을 바칠 필요는 없겠지만, 자네의 눈에 과연 폐하가 보이기는 하는가?”
전풍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순욱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마치 짊어진 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무겁겠지, 무거울 것이야. 이제는 자네 홀로 한조를 일으켜야 한다는 중압감을 짊어졌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한 손에 권력을 쥐고 흔들며 천하를 뒤집어야 할 것이야. 그리한다면 권신(權臣)이 되어 법과 군, 정치… 모든 게 자네의 손에 의해 결정되겠지. 그러한 권력은 천자를 계속 위협할 것이고, 종내에는 천자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네. 하늘의 천자가 권력을 잃고 땅을 걷는 서인(庶人)이 될 것이네. 아니, 서인보다 못한, 황궁이라는 우리에 갇혀 있는 관상용 동물이 되어 있겠지.”
전풍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하였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순욱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틀어박혔다.
그런데도 전풍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가슴속에 쌓아 둔 모든 것을 쏟아 내려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소에게 차마 하지 못한 여한을 풀어내듯.
“자네의 주변에서 다른 길을 요구하는 이들이 넘쳐 날 것이네. 아니, 벌써 그런 이들이 넘쳐 나지 않는가. ‘주변을 경계해라’, ‘권력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쳐내라’ 하며 말이야. 자네야 현명한 사람이니 그들의 유혹을 이겨 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한조의 권위는 바닥일 것이고, 자네의 가문은 천하를 경영하기 시작할 테지. 그렇게 자네가 죽은 뒤에는 과연 어찌 되겠는가? 그대의 집안이 한조를 무너트릴 것이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마치 저주와도 같은 예언에 순욱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리되면 비록 순가는 천하를 차지하겠지만, 순욱 자네는 권력을 위해 주군인 조조를 죽이고, 나라를 무너트린 이라고 기록될 것이네. 예전 한을 멸한 신나라의 왕망과 한조의 권위 바닥에 떨어트린 동탁, 폐하의 가족에 손을 대었을 뿐 아니라 황실의 핏줄마저 끊어 버린 조조… 그들의 이름 다음으로 한조를 멸한 역신으로 자네의 이름이 오를 것이네. 망탁조욱의 이름이 천하에 울리며, 예(禮)를 사라지게 하고, 충(忠)을 떨어트렸으며, 의(義)를 버린 인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네.”
전풍은 속에 담긴 응어리를 모두 털어 버렸다는 듯 순욱의 손을 놓고 껄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더는 미련 없이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전풍은 죽는 순간에 이르러 원담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절을 했으며, 그런 후에 다시 유협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예를 표하였다.
그 모습을 황제의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순욱은 병사에게 이르러 형의 집행을 선언하였다.
이 와중에도 철저히 소외된 황제는 동귀인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황제와 같이 순욱에게 반기를 들어 올린 대소 신료 또한 모두 모여 난을 일으킨 이들의 처형을 지켜보았다.
다들 조조 때를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운데, 국구인 복완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복완이 난의 주역 중 하나임에도 복황후는 그저 유폐에 그쳤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가 더 공포스러운지, 국구인 복완의 목이 잘려 나가게 생기자, 급기야 유협은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고는 순욱에게 조심스레 옥새를 쥐여 주었다.
“사, 사공, 제발 아량을 베풀어 주시오. 어찌 내 손으로 국구(國舅)를 처벌하라는 말이오? 이는 인륜을 저버리는 짓이 아니오.”
유협의 말에 순욱은 기가 찰 지경이었다. 그간 자신에 대하여서는 온갖 음흉한 일들을 벌여 놓고 인제 와서 두려움을 떨다니, 그야말로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런 인간이 황제라는 사실에 순욱은 굉장히 분노가 차올랐다.
“폐하, 폐하가 역경을 겪도록 만든 원흉인데, 어찌 저런 이들을 봐주실 요량이십니까? 난의 원흉들입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은 제국의 주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 나는 이런 일을 해 본 적이 없네. 어찌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일 같은 짓을 하라고 강요하는가!”
마치 고집스러운 아이처럼 유협은 옥새를 그대로 순욱에게 내주고 말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 자네가 알아서 하게. 나는 이만 일어나겠네.”
유협이 그 자리를 떠나가자, 순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나 사서에 적힐 말에 대한 책임과 저들의 입에서 괜히 자신의 이름이라도 나올까 두려움을 가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순욱은 황제로서 당당함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과거, 조조에게 당당히 요구하던 유협이 새삼 그리웠다.
당시에도 조조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수많은 궁인을 죽이거나 벌하였다. 그런 까닭에 궁내에 조조의 입김이 닿지 않은 이가 없으며, 칼을 든 이들이 모두 조조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유협은 조조에게 직접 자신의 진퇴를 확정해 달라며 압박하던 때가 있었다. 조조는 유협이 독하게 마음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순욱으로 대신 대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패기는 동귀인의 죽음으로 크게 위축되었고, 이번 순욱과의 일을 통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유약해진 유협의 뒷모습을 본 순욱은 머리를 한번 다듬고 옷 맵시를 바로잡은 후, 황상의 의자 앞에 섰다.
그러고는 유협을 대신하여 각각의 인물에게 죄상을 알렸다. 몇몇은 순욱을 욕하며 침을 뱉었으나, 이미 사지가 묶여 처형만 기다리는 이들의 아우성이 닿을 리는 없었다.
오로지 전풍만이 대전을 울려 퍼지도록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그런 기괴한 분위기 속에서 처형이 이루어지며, 이윽고 전풍의 차례가 되었다.
순욱은 전풍의 앞에 섰다. 어떻게든 그의 생각을 바꾸고 싶었다. 아니,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을 받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오는 전풍의 가족들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전풍의 노모는 이미 영면에 들어 아들의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었기에 최소한 효는 지킨 셈이었다.
“아버지!”
전풍의 아들인 전흥이 그 자리에 무릎 꿇고는 눈물을 흘렸다. 순욱은 전풍의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대저 가족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 것은 소인이라고 하였는데, 자네는 어떠한가?”
전풍의 물음에 순욱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인으로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행이군. 내 가족들은 안전하겠어. 너도 내가 죽어도 순 공을 원망치 말아라.”
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 나를 모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충이라는 소리는 하지도 마십시오. 이미 한복을 버리고 원가를 모신 적이 있으니 말입니다.”
순간, 전풍의 말을 반박했다는 희열이 순욱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말에는 전풍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었다.
“맞네. 나는 원 공이 천하난세를 가장 빨리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둥지를 새로 틀었네. 나에게 윗사람이란 그저 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길일 뿐이었네.”
“그 마음을 제게 펼치시라는 것입니다.”
“나의 길은 끝이 났네. 그대를 따르면 내가 해 온 그간의 행동은 모두 부정될 것이네.”
잠시 말을 끊은 전풍은 처연한 표정으로 순욱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네.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자 굽히지 않으니, 이 얼마나 비겁하고 부질없는가. 나는 그저 충신으로 남고자 할 뿐이니, 그대가 조금의 자비라도 남아 있다면 나를 그냥 보내 주게.”
전풍은 웃음을 보이며 순욱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순욱은 더욱 싫은 기분이 들었다. 저자도 자신과 같이 더럽히고 싶었다.
이미 자신은 주인이 흘린 피까지 손에 묻혔는데, 전풍은 마치 제 주인의 죄악까지 씻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진정 이기적이십니다, 전 선생께서는”
전풍은 순욱의 말에 웃음을 지었고,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꺼내었다.
“이제는 자네가 천하를 경영할 것이네. 순가는 오랜 명가이니, 부디 선주(先主)들의 실책을 답습하지 말고 다른 길을 가시게. 명경(明鏡)을 바라보며 부끄럽지 않게 말이네. 원 공께서는 명경을 보시지 못하였네. 나는 그런 주군을 이끌지 못하였고 말이야.”
이윽고 모든 여한을 다했다는 듯 전풍은 노래를 불렀다.
바람은 일어나고 수레는 달리는데,
낙양으로 가는 길 돌아보니, 이내 마음이 애달프도다.
회오리바람 몰아치고 수레가 흔들리는데,
낙양으로 가는 길 돌아보니, 이내 마음 서글프도다.
누가 물고기 삶는다면 가마솥에 부을까.
누가 북망산 서녘 돌아가서 좋은 소식 전해 주려나.
시경의 비풍이라는 노래를 각색해 부른 전풍의 노래에 이를 바라보는 신료들은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순욱이 손을 내저었고, 칼이 전풍의 목으로 떨어졌다.
“아버지!”
순욱은 돌아서 눈물을 흘렸다.
‘이제 세상에 나를 이해할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