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54
254화
선우보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그저 서신 한 장만 달랑 있을 뿐 승태는 그 어떤 보물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예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 하니,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하북 토박이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인물이 우리에 대하여 무엇을 알겠는가. 대체 우리에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냔 말일세.”
전예는 태연하게 서신을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기에 더욱 수춘후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말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이 독선적이면 문제이겠지만, 뛰어난 이들을 중용한다면 오히려 기회가 생기는 셈 아니겠습니까.”
“수춘후가 그러할지 어떻게 아는가?”
“이미 저수가 그자의 휘하에 들어갔다고 하니, 이리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선우보는 전예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솔직히 그 역시도 저수가 승태에게 머리를 숙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수라……. 분명 그자는 공손찬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 만큼 뛰어난 인물이긴 하지.”
선우보는 전예가 과거 공손찬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순간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보여 준다 한들 수하의 눈치를 살피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 아니던가. 선우보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기야 요즘엔 계속 죽만 쒀 댔으니,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으려나?”
선우보의 가차 없는 평가에 전예는 슬며시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선우보는 마치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전예의 지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요 근래 이어진 패전은 결코 저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지며 선우보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에 마침내 전예가 약간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아무리 전쟁에서 패하여 사로잡힌 몸이라 하나 몸을 의탁하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을 거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수가 그리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수춘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자네의 마음은 이미 정해진 듯하군.”
“그게 아니라면 혹시 따로 생각해 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설마 그 대상이 원담은 아니시겠지요?”
정곡을 찔린 선우보는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자 전예가 다시 쓴 소리를 쏟아 냈다.
“비록 근래에 원담이 대승을 거두고 전 공의 복수를 천명하였다지만, 그것은 결국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꽃을 태우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북의 농지는 황폐해진 지 오래이며, 도시라 할 만한 곳에도 사람들이 떠나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이 타는 듯 잠시 호흡을 고른 전예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형주는 또 어떠합니까? 유비로 인해 정세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서북의 패권을 잡은 마씨들은 조정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강동의 손씨? 그들 역시 순욱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중원은 그야말로 탄탄한 반석을 이룬 셈입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소서.”
할 말을 마친 전예가 생각에 잠긴 선우보를 두고 물러 나오자, 선우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은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원가도 싫고, 공손씨도 싫다. 네놈도 알고 있겠지?”
전예는 급히 고개를 숙이려 하자, 선우은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쓸데없는 예 따위는 집어 치워라. 어차피 네놈이나 나나 격의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 말에 전예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선우은은 이마에 두른 건(巾)을 살짝 젖히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고는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 말을 꺼내었다.
“나는 종형이 선주(유우)의 망령에 매달려 끌려 다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시세를 바라보며 기다리라 하였다. 네가 보기에는 어떻더냐? 형님은 누구를 따르고자 하는 것 같으냐?”
“원담입니다.”
전예의 말에 선우은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빌어먹을, 선주의 망령이 대단하기는 하구나. 유주의 미친놈들이 죄다 그 망령에 매달려 있으니 말이야.”
“그 미친 자 중에는 태수도 포함되는 것입니까?”
전예의 말에 선우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되지, 아니 될 말이야. 내가 형님과 드잡이를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큼은 절대 말릴 것이다. 이미 원가와는 관도에서 완전히 척을 지었는데도 어찌 이리 매달리는지 모르겠군. 전풍도 자신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낙양을 점했는데도 버림받지 않았는가.”
그러나 전예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선우은은 그런 전예를 답답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이내 흥미가 식었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게 딱히 이야기해 줄 것은 없는가?”
“이미 장군께서도 결정하신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더 드리겠습니까.”
전예의 말에 선우은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 말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었다.
“가 보게. 형님이 부르면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
전예가 예를 표하고 사라지자, 선우은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침을 뱉었다.
“퉤, 재수없는 새끼.”
* * *
조운은 전예에게 온 서신을 살펴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꽤나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지운 채 서신을 전해 온 병사를 바라보았다.
“그래, 국양(國讓 전예의 자)은 요즘 어떠한가? 그의 능력이라면 일군을 맡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야.”
그의 말에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장군께서는 아직 중용받지 못하고, 일군의 대장은 아직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그저 병사들을 조련하며, 예전 공손 장군을 따르던 이들을 담당할 뿐입니다. 태수께서 곁에 두고 조언을 구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신뢰를 얻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조운은 병사의 말에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 어찌하여… 하아, 안타깝구나.”
조운의 탄식에 병사는 아무 말을 못하였다. 비록 일신의 무예로 전장을 휘젓는 조운만큼은 아니지만, 전예 또한 신기막측한 수를 써 적을 무너트리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뒷방 늙은이가 되어 병사들을 조련이나 하고 있다니, 조운으로서는 그의 재능이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혹여 이쪽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다던가?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주군께서도 중히 여겨 마땅한 자리를 내려주실 것일세.”
“말씀은 전해 올리겠사옵니다. 장군의 노모께서 돌아가신 지도 꽤 되었으니, 어쩌면 좋은 소식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병사가 물러난 후, 조운은 서신을 들고 그대로 곧장 승태에게 향하였다.
* * *
갑작스런 조운은 방문에 승태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선우보를 설득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승태의 표정을 살핀 유엽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나쁘지 않다?”
“선우보가 지금부터 우리 손을 들어 준다면 삼군오환을 이끄는 답돈이 어찌 나올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만약 원상의 세력에서 답돈이 떠나 적대를 한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승태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따지고 보면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은 북방이었다. 양주에서는 그저 손가와 그를 따르는 호족들만 상대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가 모호할 지경이었다.
자신이 뭘 하려 할 때마다 오환과 흉노 같은 유목민 세력들이 이해득실에 따라 움직이니, 고려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
원래 대충 방향만 잡아 주고 신료들의 일을 대충 살피며 책이나 쓰던 승태로서는 직접 일을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때, 노숙이 죽간을 올리며 말을 전하였다.
“조비의 군세를 도우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승태는 노숙이 내민 서신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 원담은 이미 창정에서 승리하여 원상을 쫓으러 가지 않았습니까? 굳이 우리가 그들을 맞이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요. 승상께서 하라고 하면 마땅히 따라야겠지요. 그다음에 대해서는 따로 명이 없으십니까?”
마지막 순간에는 자조적이 되어 버린 승태의 푸념에 노숙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승태가 어째서 조비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승상께서 업을 노릴 것이라 명했습니다. 그에 준비해야겠지요.”
그때, 우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한 후 주변을 훑었다.
사실 이 자리에 우금이 등장한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그렇지 않다면 여양을 점한 뒤에 승상과 합류해야 할 그가 뜬금없이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금은 가후와 저수, 그리고 몇몇 인물들을 확인하고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승태가 다짜고짜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그간 오랫동안 격조하였습니다.”
“네, 격조하였지요. 후께서 하남 근처로는 오려고도 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왠지 뼈가 담긴 듯한 우금의 말에 승태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가후가 눈치를 살피고는 얼른 나섰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두 분이서 나눠야 할 말씀들이 있어 보이니 말입니다.”
요령 좋게 자리를 비켜 주려는 가후의 말에 승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가후를 위시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우금이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승상께서 삼사(三師, 황제의 스승) 중 한 명을 이곳으로 보낼 정도이니, 꽤나 자네를 아끼는가 보군.”
“과찬이십니다. 북방을 겪어 보기도 하신데다 병주의 장 장군과도 긴밀히 대응이 가능하니 그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금은 애써 겸양의 태도를 보이는 승태의 모습에 웃음을 지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제후의 모습을 보이는군.”
“별말씀을요. 그보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도 장군께서는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승태의 입에 발린 칭찬에 우금은 그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아직 조심성이 없는 것은 여전하군.”
승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승상께서 다른 명은 없었습니까?”
“없었네. 그런데 승상의 명을 전하는 신하가 굉장히 묘한 말을 하기는 했네.”
“무슨 말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우금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닌 듯했다.
“내가 조씨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승상께서 걱정한단 말을 꺼내었네. 물론 내 교분은 알아서 할 테니 걱정치 말라 하였으나, 상황에 굉장히 묘하여 이리 전하는 것이네. 이번에 하북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야.”
우금은 조비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신하의 말은 아마도 승태와의 친분에 관련된 지적이었으리라.
순간, 승태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