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63
263화
승태는 자신의 앞에서 엎드려 죄를 청하는 조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에 보급을 받아야 달포를 버틸 수 있다. 단순히 식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화살과 같은 소모품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당장 부대 전체가 휘청일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계획에 크게 차질이 빚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겠지만.
하지만 조금 전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관승이라는 해적이 북해에서 난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보급로가 끊어져 버린 것이 문제였다.
다행히 승태가 본청을 남쪽으로 옮겨 큰 피해는 면하였으나, 답돈과 원담이 움직이자마자 두 군데의 보급로가 불안전하게 된 것이다.
생각할수록 승태는 화가 솟구쳤다. 아직 휘하의 군세가 다 모이지 못한 상황에서 장합만이 빠르게 회군하여 승태의 곁을 지킬 뿐, 병주로 향한 이들은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나마 함진영과 상산병이 남아 있긴 하지만, 결국 수적으로도 밀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 승태를 비롯한 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동안 승태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결국 보다 못한 노숙이 나서서 조진을 대변하였다.
“주공, 이는 소신들이 답돈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잘못이 급니다. 그러니 지금은 벌을 내릴 때가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사실 조진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겨우 백여 명 남짓의 병사로 오환의 기병 수백을 상대하고 무사히 도착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잠시 딴생각을 좀 하느라… 자단(子丹)은 수고하였네. 내 자리를 내줄 터이니 휴식을 취하게.”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승태는 조진을 급히 회장에서 내보냈다. 그러고는 현재 상황을 다시금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이미 초촉과 장남, 한형이 탁군에서 군을 일으켜 유주의 반발 세력을 잠재웠다. 그래서인지 원담을 지지한다던 선우보가 나서지 못하고 그저 어물쩍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답돈이나 승태 모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서로서로 빈틈만 노리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자칫했다가는 일거에 전멸을 면치 못할 수도 있으니.
애당초 승태는 공성에 능하지 못한 답돈을 끌어들여 상대하려 하였다. 높은 방책 등을 세워 시간을 끌며 괴롭히다 빈틈을 찔러 무너트리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답돈을 야전으로 승부를 가려야 할 판이었다.
일이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지만, 승태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군을 이끄는 자신이 불안해하면 결국 모두에게 퍼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次惡) 정도는 되는 것 같군. 우선 승상께 서신을 보내고 지원을 받도록 하지.”
승태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금 입을 뗐다.
“우 장군과 위 공에게도 서신을 보내도록 하지요.”
침착하게 방책을 제시하는 승태의 말에 보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빠르게 붓을 쥐고 서신을 적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본 승태는 이내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장 장군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는가?”
그에 아무도 대답이 없자 승태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다 가후의 얼굴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태보의 말씀대로 된 듯싶습니다.”
가후는 자책이 담긴 승태의 한탄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이라도 물러나면 아마 무사히 수춘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승태는 가후의 제안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후퇴라… 적의 주력은 기병입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따라잡힐 텐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미끼를 던지면 될 일입니다.”
승태는 가후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빤히 알 수 있었다. 병력들을 뒤에 남겨 오환 기병을 막으면 시간을 끌 수 있을 뿐 아니라 승태의 도주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또한, 큰 손해를 입은 승태에게 순욱도 더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병사들을 버린다라…….”
승태가 낮게 읊조리자, 이번엔 노숙이 나섰다.
“제가 남아 병사들을 이끌 것이니, 후께서는 황하를 넘으시면 될 일입니다.”
노숙을 비롯해 다른 이들조차 강을 건너라 종용하자, 승태는 순간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온후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지아비로서도, 아비로서도, 군주로서도 얼굴을 들 수 없을 테니, 그럴 바에야 모두와 함께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패배가 결정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승태는 가후를 똑바로 직시하며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가후의 눈빛은 마치 시험관처럼 승태의 자질을 시험하는 것만 같았다. 과거, 진궁에게서 느낀 것처럼.
‘흠, 그러고 보니 진 노사는 유비를 잡는다고 갔는데 지금까지 뭘 하고 계신지 모르겠군. 차라리 내 옆에 남아 책안을 내주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무엇보다 태부께서 이곳을 벗어나지 않은 것은 승리할 방법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에 가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리 저라 해도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도는 없습니다.”
가후의 부정적인 전망에 승태는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애써 분위기를 살려 보려 애를 쓰는데, 거기다 대고 아예 재를 뿌려 버리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태부는 그만 승상께 가셔도 될 듯싶은데, 아니 그렇습니까?”
기분이 상한 승태가 퉁명스레 말하자, 가후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승리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네? 그게 무엇입니까?”
“적의 다음 수를 쓰기 전에 움직여야 합니다.”
“뭘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 당장 군을 모두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도 전군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세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승태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이내 내려갔다. 그야말로 도박이나 다름없는 수였다. 그러자 유엽이 나서며 말했다.
“가 태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럼 끝장이 나는 것이지요.”
“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금 당장은 전장에서 병사를 이끌 장수들도 변변치 않은데 어찌…….”
고개를 내저은 가후는 유엽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그것은 기주갑병을 이끄는 장 장군(장합)과 태산군을 이끄는 장 장군을 무시하는 말씀이시오.”
그제야 자신이 실언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엽이 엉거주춤 고개를 돌리자, 장패와 장합, 창희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장합과 창희는 큰 공을 세운 적이 없으니 대놓고 따져 묻지 못하겠지만, 장패는 저수가 청주를 나오지 못하게 한,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승태는 왠지 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정리하듯 말을 꺼냈다.
“이 자리에 있는 장수들도 능히 일세를 풍미할 만한 이들이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그에 장수들은 감읍하다는 듯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태는 이름이 적힌 목패를 그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로서 확답을 줄 수는 없네.”
나지막한 승태의 음성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네. 그대들이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말이야. 또한 그대들의 용맹과 업적을 남겨 후세에 길이 남도록 전할 것이네.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설령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다 하여도 그대들의 가족은 나의 이름 아래 부족함 없이 돌볼 것을 맹세하지. 이는 비단 장수뿐 아니라 모든 병졸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세.”
마치 맹세와도 같은 선언을 늘어놓은 승태는 보즐을 보며 말했다.
“내가 지금 말한 적으시게. 그런 뒤, 인수를 찍어 수춘으로 보낼 것이야. 이는 내가 죽더라도 이루어질 것이며, 만약 내 자손 중에 이를 어긴다면, 그자는 마땅히 쫓겨나야 할 것일세.”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말에 감동한 장수들이 머리를 조아렸으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나 또한 창을 잡을 것이야.”
가히 충격적인 선언에 고개 숙인 장수들뿐만 아니라 모사들조차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승태가 직접 전장에 나선다면,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그럼 다들 준비하게. 곧 움직일 터이니.”
말을 마친 승태가 앞으로 나아가자, 백관들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예를 표하였다.
* * *
승태가 전면에 나서 군을 이끌고 회전을 벌이자, 답돈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못하다 해도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 않은 탓이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겁쟁이라 여겨 온 승태가 직접 전장에서 창을 휘두르는 모습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때,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곽원이 우차에 실린 옥(獄) 안에서 낄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그거 아나? 수춘후를 돕는 이 중에 마등과 호주천을 무릎 꿇린 모사가 있다는 것 말이야.”
답돈은 곽원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모사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전장 밖에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용맹한 무장이 전황을 바꾸는 법이지.”
곽원은 그의 말에 비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한 마씨 가문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나 보군. 흐하하하!”
답돈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는 곽원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차피 자신의 손바닥에서 놀다가 사로잡힌 인물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은 그저 달려드는 적을 처단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답돈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거침없이 다가오는 승태의 군세를 보며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다 이윽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함정이구나.”
대저 무리한 공격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일단 저들은 중갑병이니 잠시 뒤로 물러나 상황을 살핀다 하여도 문제는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뒤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자.”
전장에 나팔 소리가 울리자, 답돈의 병사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승태의 병사들 사이에서 기병들이 빠르게 튀어 나와 돌격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바로 선봉 위월이다!”
호기롭게 외친 위월은 자신을 따라오는 기병들을 한 번 쓰윽 훑으며 웃음을 지었다.
“하하, 형님이 이런 맛에 선봉에 섰구먼.”
한편, 가후는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띤 채 벌어지는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에 반해 감군인 저수는 군이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결국 가후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공자께서는 군자욕(君子欲) 눌어언(訥於言) 이민행(而敏行)이라 하셨지. 군자는 말은 더듬는 것처럼 둔하더라도 실천은 민첩해야 한다고 말이야. 손자께서 이르길, 고병문졸속(故兵聞拙速)이니, 부족함이 있더라도 일단 서두르라는 말이네. 둘은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통하는 것이 있지. 그러니 공자나 손자께서 어설프더라도 행하라 한 것이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