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74
274화
왕수의 요구는 굉장히 복잡했다. 죽일 듯이 위협을 가하되, 절대 죽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마들이 우글거리는 답돈의 주둔지에서 사신들이 무사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말을 들은 원담은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주둔지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하여도 답돈이 가만 지켜보고만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반드시 가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답돈과 조정이 손을 잡게 된다면, 저희가 일어설 기회는 더 이상 없을 테니 말입니다. 또한, 고 병주(고간)께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소서. 만약 그가 스스로 떨쳐 일어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주공을 살려 기회를 얻으려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인정에 호소한다면 소소하게나마 기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공께서는 동생들의 허물을 덮고 손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후일 원가의 온전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간에게 머리를 숙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친족인 고간은 원상과 원담, 그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하지만 동생들과 손을 잡으라는 말에 원담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고는 했지만,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동생들에 대한 분노는 아직도 크게 남아있었다.
한동안 원담의 입에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왕수는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그러자 오히려 압박을 느낀 듯 이윽고 원담이 입을 열었다.
“…알겠네. 그 방법밖에 없다면, 내 그대의 뜻을 따르겠네. 그리한다면…….”
“오래 걸릴 것입니다.”
이미 원담의 뜻을 알고 있다는 듯 왕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겠지. 각오는 하고 있네.”
왕수는 달라진 원담의 모습에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물론 모든 것이 아직 불투명하지만, 굳이 미래의 지금부터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일단은 눈앞에 주어진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 *
답돈이 내준 막사에 들어선 장료는 이리저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조운 또한 혹여 누가 엿듣는지는 않을까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무 과한 게 아니었나 걱정됩니다.”
장료는 우려의 기색이 묻어나는 조운을 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나는 오히려 아쉽던데, 조 장군은 다르게 느끼셨나 보오?”
“무엇이 말입니까?”
“나는 답돈이라는 자가 무도하고 과감하다고 하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칼을 꺼낼 것이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아 아쉬웠소. 일부러 빌미를 주어 일이 벌어졌다면, 그대와 내가 능히 쓸어버릴 수 있지 않았겠소?”
조운은 장료의 대책 없는 호언장담에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말대로 답돈 혼자서 자신과 장료를 막아 내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그것은 너무 무모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막사 내부를 장악한다 해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희야 어찌 몸을 뺀다 해도 수하들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적의 진영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료는 조운의 앓는 소리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수하들이 그대의 생각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설령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 정도 각오는 당연히 하고 온 게 아니겠소?”
장료의 말에 조운은 답을 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는 수하들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포의 밑에서 스스로 살아남아야만 했던 장료로서는 이 정도 상황쯤은 일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조 장군이 만약 대형과 같이 있었다면, 아마 속에서 열이 터져서 병을 얻었을 것이오.”
장료의 허풍 섞인 말에 조운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장료의 말이 은근히 긴장을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장료는 품에서 육포를 꺼내 조운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놈들이 주는 음식은 어떤 장난을 쳐 놓았을지 모르니, 일단 이것으로 끼니를 때웁시다.”
조운은 육포를 받아 들고는 장료에게 물었다.
“이제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어찌하긴 뭘 어찌하겠소. 어차피 깽판을 놓고 소란을 벌여야 밖에서 호응할 테니, 하던 대로 해야겠지.”
장료는 정갈하게 차려입은 조운의 갑주를 보고는 조금 우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척 보기에도 얼마나 관리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찰갑을 이어 주는 끈은 군데군데를 제외하고는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는 반면, 작은 갑찰들이 맨질맨질하게 해져 있었다.
평소 조운이 시종 따위를 데리고 다니지는 않았으니, 그 모든 걸 자신이 스스로 한 것이리라. 그것만 보더라도 조운의 성품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조 장군은 이런 지저분한 일을 해 본 적이 없을 테지만, 걱정할 것은 없소. 나야 워낙 이런 일이 전공이니.”
조운은 약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장료를 바라보았다.
“답돈이 우리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듯했습니다. 그 또한 안목이 대단한 인물이니, 우리가 단순한 사신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료는 전혀 대수로울 게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 보았자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그저 거친 오랑캐 놈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무인들을 보냈다고 여기고 말겠지. 게다가 놈이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할 테니, 염려 놓으시오.”
조운은 장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료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장료는 막사 주변을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렸다. 거만한 태도로 술과 여자를 찾으며 병사들을 폭행한 것이다. 병사들은 답돈의 말도 있고 해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으나, 그럴수록 장료의 난동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보다 못한 조운까지 나서서 말리려 했지만, 도리어 그것이 더 짜증을 부추긴 듯 장료는 더욱 큰 소리를 지르며 폭주했다.
“어찌 사신을 이리 대한단 말이냐! 이런 무지렁이 같은 오랑캐들아, 본시 대국의 사신이 오면 술과 여인은 당연히 바쳐야 할 것 아니더라!”
장료의 언행을 더 이상 참아 줄 수 없었는지, 병사를 이끄는 장수 중 몇몇이 달려들었으나, 당연히 박투로 장료를 당해 낼 리 만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료의 기세는 더욱 크게 올라 종내에는 감히 달려드는 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하하하! 역시 비천한 오랑캐답게 오환에는 싸움을 할 줄 아는 이가 없구나!”
대놓고 무시하며 깔아뭉개는 장료의 발언에도 오환의 장수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였다. 병사들 또한 억울한 마음을 애써 삼키고 있는데,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나섰다.
“죽어라, 이 한족 놈아! 감히 오환을 욕보이느냐!”
장료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의기와 다르게 그 병사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칼을 뽑아 들고는 있으나, 전장에서 마주쳤다만 일 합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엉성한 자세. 장료는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딱 보아도 누군가 자신을 돕기 위해 연극을 꾸민 것이리라. 호기롭게 나선 것과 달리 사정없이 흔들리는 병사의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했다.
만약 조정의 사신이 오환의 진영에서 변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답돈은 더는 기댈 곳이 없어지는 셈. 누군가는 바로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흠, 모처럼 무대가 꾸며졌으니, 한바탕 어울려 줘야겠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시기를 잘 택하였군.’
장료는 달려드는 병사의 어설픈 칼질에 살짝 팔을 내밀었다. 물론 치명상이 될 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그래도 치밀한 계산으로 피가 튈 정도는 되었다.
갑자기 붉은 피가 뿌려지자, 주변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일을 더욱 부추기듯 누군가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습격이다! 오환 놈들이 사신을 죽이려 한다!”
사태가 일파만파 심각해지자, 조운이 급히 달려와 장료를 호위하며 병사들을 견제했다.
“모두 물러나라!”
삐이이익!
그런 후, 조운이 휘파람을 불자, 기주병과 중갑기병들이 마치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오환의 병사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는 있는데,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것이었다.
“사신을 죽이려 한 이들이다! 모두 처리해라!”
이윽고 조운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주병과 중갑기병들은 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난데없는 기습에 오환병들은 순식간에 우르르 쓰러져 갔다. 그와 동시에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펴지기 시작했다.
이상을 알아차린 답돈이 무기를 들고 막사를 나서려는 순간, 한 병사가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혹 사신들이 문제를 일으켰느냐?”
아무 말도 못 하는 병사의 모습에 울화가 치민 답돈은 재차 대답을 종용하였다.
“무슨 일이냐니까! 얼른 답하지 못하겠느냐!”
“그것이… 원가의 병사들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그들 중 일부가 자신의 몫을 내놓으라며 창고를 습격하였습니다.”
답돈은 어이가 없어 병사를 바라보았다.
“사신 놈들은?”
“모르겠습니다. 보급창에 불이 피어오르고, 도저히 그들을 막을 수 없어 이렇게 달려온 것이옵니다.”
“원담, 이 버러지가 결국 독이 되었구나.”
그때, 또 다른 병사가 급히 달려오자, 이번에는 사신단의 문제일 것이라 확신한 답돈은 빠르게 말 위에 올라탔다.
“사신단에서 문제가 생겼느냐?”
“네, 그렇습니다. 아군 병사가 사신단의 수장을 죽이려 했고, 결국 피를 보고야 말았습니다. 분노한 그들은 지금 병사들을 상대로 살육을 벌이며 선우께 죄를 묻겠다고 합니다.”
“죄? 방금 내게 죄라 하였느냐?”
살기가 넘실거리는 답돈의 모습에 병사는 오금이 저리는 듯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그것이…….”
“크크, 그래… 다 때려치우자. 원가 놈이든 사신 놈이든 모조리 죽여 버리고 이 지긋지긋한 한족의 땅을 떠나야겠다. 병사들을 모아라 내. 내 직접 나서 놈들 모두를 벨 것이다!”
명을 내린 답돈은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호위병들이 깃발을 들어 올리며 답돈의 출정 사실을 알렸다.
뿌우우우우!
바로 그때, 답돈은 뜬금없는 나팔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나팔 소리의 주인을 알리는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흉노다! 흉노가 나타났다!”
답돈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온갖 난리가 벌어지는 통에 이제는 흉노까지 나타나다니 말이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아주 오늘 결판을 내자.”
결심을 굳힌 답돈은 빠르게 말을 몰아 나아갔다. 막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불의 연기가 저물어 가는 해를 가리고, 주변은 점점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