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북방에서 답돈의 명성은 드높았다. 비록 장성 이남에서 몇 번 패배를 겪으며 다소 금이 가긴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견고하다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단단한 둑이라 할지라도 작은 틈새로부터 붕괴가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오환의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내부에서 야망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답돈의 패배는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누반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다. 그걸 구실 삼아 칼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결국 반기를 들어 올리며 답돈의 본거지인 유성을 위협했다.
물론 답돈을 돕기 위해 깃발을 들어 올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다수의 오환 대인(大人, 부족장)들은 중립을 지키며 관망하였다.
혹시라도 누군가의 손에 답돈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이후 오환의 정국은 그야말로 요동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설사 지지하지 않더라도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답돈이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마저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괜한 것에 불과했다. 답돈은 총기가 흐려진 것도, 힘이 빠진 것도 아니고, 그저 적을 잘못 만난 것뿐이었으니.
장료나 조운은 어디에 내놔도 절대 빠지지 않는 특급 무장이며, 그 외에도 많은 인재가 승태의 휘하에 모여 힘을 보태 주니, 아무리 답돈이라 한들 당해 낼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장성 이남은 답돈에게 있어 그리 익숙한 지형도 아닌 데다 외부 세력에게 보급을 의존하다 보니, 병사들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도 과감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런 요인들이 하나둘 쌓이다 보니, 괜한 위험을 무릅쓰며 자웅을 결하기보다는 뒤로 빠져 후일을 모색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이들은 답돈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여기며 승부를 걸었으니, 그 결과야 보지 않아도 빤했다.
원래 답돈은 조조 역시도 쉬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다. 그랬기에 원래 역사에서는 아직 대오조차 정돈되지 않은 답돈의 군세를 장료가 이끄는 선봉군이 백랑산에서 기습을 가해 격파할 수 있었다.
한편, 답돈은 자신의 반기를 들어 올린 이들을 야전에서 모조리 박살을 내 버리며 자신의 건재함을 오환에 널리 알렸다.
그에 눈치를 살피며 상황을 재던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짝 엎드리며 답돈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반역을 일으킨 부족을 약탈하여 자신들의 공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물론 답돈은 그런 대인들을 믿지는 않았으나, 오환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형식상 받아들여 주었다.
대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반기를 들어 올린 부족에게는 철저하게 보복을 가했다. 아예 재기 따위는 꿈꿀 수도 없도록 부족 자체를 완벽하게 지워 버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처사는 오환의 역사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서로 믿지 못하고 오환 전체가 사분오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에 강한 답돈의 존재감은 오히려 공포로서 모든 걸 지배하듯 오환 일족의 통일을 가져왔다.
겁에 질린 각 부족의 대인이나 장로들은 감히 답돈의 서슬 퍼런 위압에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으며, 그저 답돈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오환의 힘을 한데 모은 답돈은 장성 이북의 흉노를 모조리 지워 버리기 위해 토벌을 명하였다.
* * *
현재 답돈의 막사는 굉장히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그동안 풀지 못한 욕망을 모조리 해소하겠다는 듯 답돈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병사의 전갈에 답돈은 지분거리던 여인의 엉덩이를 가볍게 쳐서 내보냈다.
잠시 후, 한 병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으나, 답돈은 여전히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맞이했다.
만약 중원 같았으면 질겁을 하며 답돈의 행태를 질타하였겠으나, 이곳은 엄연한 오환의 세력권. 감히 답돈에게 따질 만한 담량을 가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병사 역시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돈을 향해 간단히 예를 취해 보였다.
“그래, 수춘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던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오환을 정리한 답돈에게 남은 골칫거리는 끈질기게 자신을 쫓는 수춘후, 승태밖에 없었다. 물론 그 빌미는 답돈 자신이 만든 것이지만.
만약 위월에 대한 처사를 그리 오만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승태 역시 기를 써서 자신을 쫓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지금은 후회하기보다는 대책을 세워야 할 때였다.
답돈이 생각하기에 승태의 군세가 취할 움직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아직 갈석산 쪽의 길이 온전치 못하니, 절벽을 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유성으로 오는 것은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과연 답돈의 판단은 그리 잘못되지 않아, 곧 병사의 입에서 승태의 근황에 대한 보고가 흘러나왔다.
“현재 수춘후는 동래의 관승을 만나고 있으며, 유주에는 선우보를 대신하여 선우은이 태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병사는 상인들에게 얻은 정보를 가감 없이 전했다. 북방의 상인들은 유목을 하며 상행위를 병행하는데, 이들 대다수는 반쯤 간자(間者)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었다.
워낙 척박한 환경 탓에 가격만 충분하다면 무엇이든 판매하고, 무슨 짓이든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는 족속들인 것이다.
비록 인간으로서의 기본조차 안 된 이들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없이 유용한 존재이기도 했다.
답돈은 선우보가 쫓겨났다는 병사의 말에 옳다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우보가 여양에서 쫓겨났다면, 분명 불만을 품은 놈들이 많겠구나. 그놈들에게 슬쩍 언질을 줘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다면, 그 어린놈도 더는 버티지 못하겠지.’
승태가 관승을 만났다는 이야기야 당연한 일이었다. 우기가 지날 때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 바다를 통해 보급하려는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였다.
진창이 되어 버린 길을 넘기에는 너무도 위협 요소가 많으니, 결국 승태가 선택할 방법은 결국 한 가지뿐이었다.
‘그렇다면 놈이 고를 수 있는 방도는 노룡계곡뿐인데, 날개가 달리지 않는 이상 감히 그곳을 넘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겠지.’
노룡계곡을 넘기 위해서는 주변의 지형에 대해 잘 아는 선우보가 필수나 다름없는데, 이미 태수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니, 결국 승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지로 다시 돌아갈 것이 뻔하였다.
“결국,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기왕 이렇게 된 것, 내가 한나라 놈들에게 잠깐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조정에서 관직과 작위를 내려받는다면, 승태도 더는 답돈을 노리기가 힘들 터였다.
비록 자존심에 조금 손상을 입기는 하겠으나,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결코 적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승태가 답돈을 공격할 명분이 더더욱 사라지게 될 터이니 말이다.
‘덤으로 주변에 거슬리는 놈들을 눈치 보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릴 수도 있겠지.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 차오르는군. 원소에게 기대 이루려던 꿈을 홀로 서서 완성하는 게 아니겠는가. 정녕 그리만 된다면, 내 소망을 이루는 것도 더는 꿈이 아닐 것이다.’
답돈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되었다. 혹시 모르니 내 백랑산에 올라 문제가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군을 준비해 두어라.”
“네!”
고개를 끄덕여 답한 병사가 서둘러 물러나자, 답돈은 조금 전에 내보낸 여인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 * *
토은의 현청에 자리한 승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전서를 받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비의 방해로 인해 답돈을 토벌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조정에서까지 임지로 돌아가라는 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주변 지역의 치안이 안정된 후에 그리하라는 것이지만, 이러한 명은 어찌 보면 씹다 버린 껌 취급이나 다름없었다.
“흠, 이제 적이 될 만한 세력들이 많이 치워졌으니, 개를 삶겠다는 것인가?”
승태가 보기에 전혀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유엽도 이에 대해 말을 했고, 뭇 모사들이 그럴 거라 예측을 하였기 때문이다.
승태는 자신에게 서신을 올린 순심을 바라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전날, 순심은 순욱의 판단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으나, 그것이 그의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뭐, 순 승상에게 불만 가진 이들을 쳐 내기 위한 것이겠지. 거기다가 일군을 이끄는 조씨 일가의 심기를 살피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을 테고.’
짧은 시간, 고심을 마친 승태는 서신을 내려놓고 순심에게 말을 건넸다.
“이것이 진정 승상의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오랜 시간 영지를 비우고 계신 후를 걱정하여 승상께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중대한 일을 맡아 사직에 보탬이 되어야 할 후께서 혹여 다치기라도 하면 아니 되니 말입니다.”
“정말 고마우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 아직 답돈이 건재한 데다 이번 일로 중원에 큰 원한을 품었을 텐데, 과연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옳은 것일지요?”
“그들은 이미 중원의 힘을 뼈저리게 체감했을 것입니다. 후께서 답돈을 상대로 몇 차례나 승전을 거두었는데, 감히 허튼 수작을 부리려 하겠습니까?”
낙관적인 순심의 예측에 승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답돈은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여기서 물러난다면, 조정에 거짓으로 고개를 숙이며 방심을 끌어내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의 상황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승태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남쪽에서는 유표가 죽고 난 뒤, 자식들 간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으나, 결국 유기를 지지하는 유비가 다른 이들을 압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회라 여긴 답돈이 다시 준동할 터인데, 그런 싹을 남겨 두려 하는 것입니까?”
이는 사실 곽가의 진언이었다. 곽가는 꿋꿋이 제 뜻을 전달하였고, 결국 조조로 하여금 오환을 비롯해 장성 이북 부족들의 복종을 받아 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적벽대전 이후 몰래 힘을 비축해 둔 그들이 반기를 들었을지도 모르며, 이후 조비나 조예 시기에 다시 하북을 노렸을 것이다.
순심은 한조에 대한 걱정이 가득 묻어 나오는 승태의 말에 깊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한참이 흐른 후, 입을 열었다.
“후의 말씀이 가히 틀리지 않습니다. 염려하신 그 문제가 바로 남쪽에서 터졌기 때문이지요.”
“네? 남쪽이라 하시면… 정말 유비가 일을 벌인 것입니까?”
말이 씨가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승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