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87
287화
장료의 외침은 단순히 답돈만 들은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병사가 그것을 들었다. 이는 오환의 전사라 자부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결투 신청처럼 여겨졌다.
물론 장료는 초원의 전사 출신이 아니기에 정식 결투로 성립되기는 어렵지만, 오환의 전사들은 누군가가 나서 당당하게 쓰러트려 주기를 바랐다.
말은 거창하게 결투라 하지만, 사실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 나서서 맞설 자신이 없으니 결국은 남에게 떠맡기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거기에 장료는 더욱 기름을 부었다.
“답돈! 흉노의 대리자인 나 호흉노중랑장 장문원이 동호의 후예이자 오환의 선우에게 선대의 약조에 응할 것을 청한다!”
과거, 묵돌이 동호의 인물들을 노예로 삼으며 맺은 약조. 그것은 동호의 선우 중 누구라도 흉노의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로 쪼개진 흉노는 이미 세가 지지부진하여 그런 약조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하지만, 막상 그 치욕을 당한 오환은 뼈에 새긴 듯 잊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흉노의 잔악함을 가르치고, 다시금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힘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오환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선우는 그 선봉에 서서 흉노를 쓰러트려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사실 이 내용은 전예가 장료에게 알려 준 방법이었다. 만약 답돈이 계속 대결을 피하고 도망치려 한다면 과거의 약조를 언급하라고. 그리하면 더는 쉽사리 몸을 빼지 못할 것이라 전해 주었다.
물론 그 방법이 반드시 먹힐 것이라 자신하지는 못했으나, 만약 답돈이 무시하고 도망친다면, 후일 오환을 이끄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했다.
* * *
“장군, 답돈은 자신의 핏줄로 이어지는 왕국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런 가운데 흉노의 정벌은 오환의 가장 숙원이며 그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만들어 줄 유일한 방도입니다. 그러니 만약 그 부분을 건드린다면, 그는 감히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만 하면 답돈을 끄집어낼 수 있단 말인가?”
“답돈은 무지한 자가 아니니, 단순히 그런 도발만으로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헛된 명예가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문제는 그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오환의 뭇 부족 인들이지요. 그들은 노예로 살아온 과거의 족쇄에 얽매여 그런 치욕을 가만 보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답돈이 그런 말을 듣고도 물러난다면, 오환 사람들로 하여금 겁쟁이란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흠, 전장에서는 온갖 변수가 발생하는 법이거늘, 단지 그런 말에 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을 받겠는가? 어차피 이번 전쟁은 답돈을 처리하지 못하면 우리가 지는 싸움인데, 그리되면 답돈은 어마어마한 영예를 얻지 않겠는가 말일세.”
“장군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런 이치를 따지기에 앞서 자신의 감정만 떠들어 댈 것입니다. 그리되면 자연 답돈에 대한 공포는 옅어질 것이고, 오환을 하나로 묶는 토대는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초원의 전사라 자부하는 저들이 겁쟁이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쌓이게 되면, 답돈에 대한 신망에 조금씩 균열이 생겨날 것이며, 종래에는 파멸의 구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 길게 내다보는 것이 아니네만.”
“어차피 장군으로서는 손해 볼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장에서 답돈이 눈에 띄면, 그저 한 번 외쳐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기왕이면 듣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흠, 고려해보지.”
* * *
장료는 전예의 말을 완전히 신용하기는 어렵지만, 해 봐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많은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를 쳤다.
물론 답돈의 입장에서는 이를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저런 소리를 들은 이상 마냥 무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미 주변의 모든 오환 병사들이 입을 다문 채 장료와 답돈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답돈에게는 한시가 바쁜 이 상황에 과거의 약조 따위에 얽매이는 오환 병사들이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사실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자고로 전쟁이란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보는 게 정답이지 않겠는가.
답돈은 냉엄한 현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기에 약조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흉노를 쓰러트린 후, 자신의 업적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려 했다. 한데 장료가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바람에 결국 시험대에 서고 만 상황이었다.
답돈은 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장료를 마주했다. 그동안 여러 번 전장에서 마주하기는 하였으나, 이처럼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흠, 그래도 지난번에 마주친 상산의 인물이 아니니 참으로 다행이로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나다고 한들 그자만 하겠는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답돈이 태연한 척 말을 내뱉었다.
“처음 보는 인물이로군. 그런데 당신이 흉노의 대리자라고?”
그 말을 들은 장료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지금껏 그렇게 당해 놓고도 자신의 이름조차 몰랐다는 게 이해되지 않은 탓이었다.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나 보군. 그렇다면 오히려 쉽게 잡을 수도 있겠어.’
빠르게 머리를 굴린 장료는 답돈의 착각에 맞추어 연기를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요하의 시골구석에서 왕 노릇이나 하는 놈에게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 정도면 충분하겠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언사에 답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풀면서 장료에게 다가갔다.
장료는 답돈이 한껏 방심한 모습을 드러내자, 말의 배를 차며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답돈은 순간 멈칫하였다.
만약 답돈이 무예가 조금이라도 떨어졌다면 순식간에 목이 날아갔을 상황이지만, 역시나 역전의 용사답게 장료의 화극을 가까스로 막아 낼 수 있었다. 물론 얼굴과 목에 상처가 생기는 것은 피하지 못했지만.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닦아 낸 답돈은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생각과 달리 눈앞에 있는 적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때, 장료의 화극이 다시금 날아들자, 답돈은 황급히 몸을 뒤로 빼며 거리를 벌렸다. 물론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장료가 아니었다.
카가가가각!
앞으로 내달린 장료가 두 손으로 화극을 휘두르며 답돈을 밀어붙였다. 마치 사나운 범이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듯한 그 모습에 답돈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순간, 장료가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위 장군은 어찌하였느냐?”
난데없는 물음에 답돈은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자신의 손에 수많은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름을 말한들 어찌 알겠는가.
그러던 중 문득 한 명의 인물이 뇌리에 떠올랐다. 얼마 전, 수춘후와의 싸움에서 어렵게 상대한 인물이 바로 그자라는 것을.
그에 답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히 자신에게 덤빈 대가로 사지를 잘라 낸 후, 손 하나만을 수춘후에게 보냈는데, 아마도 그게 이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잘하면 눈앞의 인물을 도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누굴 말하는지 모르겠군. 설마 무기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감히 내게 덤벼든 놈을 말하는 것인가? 음, 어쩌면 기억이 날 듯도 하군. 나를 유인하고 나서 비굴하게 살려 달라고 비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지. 그래서 내가 손수 사지를 갈가리 찢어 주었다.”
혹시나 아직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사라지자, 이제 장료에게 남은 것은 분노와 복수심뿐이었다.
장료는 팔이 터져 나갈 것처럼 힘껏 화극을 움켜잡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한지, 순간 말이 주춤거릴 정도였다.
답돈은 달라진 장료의 기세에 감히 말을 잇지 못하고 밀려드는 화극을 막아내는 데 모든 힘을 쏟았다.
“으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장료는 마치 맹수와도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힘에 밀린 답돈은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다 빠르게 몸을 일으켜 다시 말에 올라탔다.
하지만 장료는 내처 달려들지 않고 답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시신은?”
“오환의 방식으로 처리했다.”
오환에서는 보통 망자를 땅에 묻고 물건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애도를 표하는데, 그 말대로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흥, 웃기는군. 네가 말한 오환의 방식이란 게 전사의 시신을 자르는 것이란 말인가?”
“크크큭, 본시 오환의 방식은 지위가 높은 자들만 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자는 비굴한 겁쟁이에 불과하니, 사지를 잘라 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풍장을 했다는 말에 장료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사지를 잘라 뿌렸다는 것은 이제 시신을 수습할 길이 영영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었다.
“네놈, 더는 살기를 바라지 마라.”
“흥, 꽤나 아끼던 자였나 보지?”
답돈은 비웃음 가득한 말을 늘어놓으며 슬금슬금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순식간에 활을 꺼내 들었다.
주저 없이 화살을 쏘아 낸 답돈은 그대로 말을 달려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였으나, 장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날아오는 화살을 화극으로 가볍게 막아내었다.
그러는 사이, 답돈은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소리쳤다.
“감히 신성한 결투에서 비겁한 수를 쓰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전사라 할 수 있는단 말인가! 오환의 전사들이여, 정당한 결투에서 비열한 수를 쓴 놈이다! 저놈을 죽여라!”
전사로서 이름을 날린 답돈이 설마 거짓을 말할 거로 생각지 못한 오환의 병사들은 장료를 향해 온갖 비난을 쏟아 냈다.
그런 가운데, 장료는 어처구니없는 답돈의 행동에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저런 비겁한 인물에게 오랜 세월 같이한 위월이 당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든 탓이었다.
장료는 차가운 이성으로 분노를 삭이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오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전예가 말한 전략은 뒷전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이제 위월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처절한 복수뿐이었다.
답돈은 물론, 하루살이처럼 달려드는 오환 병사 모두를 쓸어버려야 이 불타는 분노를 조금은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료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의 목을 말없이 댕강댕강 날려버리면서 조용한 분노를 드러냈다.
그 어떤 기합성도 없이 오직 일격에 한 명의 목을 날려버리는 그 모습에 병사들은 기가 질렸다.
그리고 마침내 장료의 입에서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스산한 말이 흘러나왔다.
“선주이신 온후께서 은혜는 잊더라도 원한은 잊지 말라 했지. 네놈들의 선우가 내게 원한을 샀으니,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