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90
290화
형주에 고립되어 버린 유기는 반폐인과 같은 몰골로 고개를 숙인 채 쿨럭거렸다. 그는 이처럼 비참하게 끝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유표의 적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유기 본인도 여실히 깨닫고 있다. 이미 자신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고, 주변에는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랬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한탄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유기의 정신은 점점 좀먹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락에 빠진 유기의 상태를 알아보고 찾아든 인물이 바로 진궁이었다.
“기사(棋士)가 왔습니다.”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내관의 말에 유기는 손으로 입을 막고 쿨럭거리면서 앞으로 나왔다.
“…들여보내게.”
삐거덕삐거덕.
끼이이이익.
바닥과 문의 관리가 되어있지 않아 꽤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유기나 내관들은 마치 이러한 소리가 익숙한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문을 연 인물은 고개를 숙인 채 다리를 절며 걸어오고 있었다. 비록 볼품없는 행색이지만, 유기는 기쁜 마음으로 그를 맞이하며 손수 자리를 내주었다.
“기사께서는 또 어떤 이야기를 가져오셨습니까?”
반가워하는 유기와 달리 그는 아무 말 없이 바둑돌 하나를 꺼내 반상 귀퉁이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노사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순간, 굳어 버린 유기는 잠시 기사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반상 위의 바둑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자결(自決).
너무나 냉정한 전언에 유기는 온몸에서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그저 어떻게든 살아남아 형주를 되찾으려 했을 뿐인데, 갑자기 죽으라는 말을 하다니…….
“정녕 이대로 끝을 내라는 말입니까? 노사께선 분명 유비를 곤란하게 만든다고 하지 않으셨소!”
유기의 분노가 방 안을 휩쓸었지만, 기사는 여전히 침착했다.
“솔직히 형주목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유비를 꺾고 형주를 되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십니까? 건강하더라도 힘든 상황일 텐데, 그 몸으로요?”
갑작스럽게 솟은 분노는 사라지는 것도 빨랐다. 전부 옳은 말만 하는 기사에게 유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으려고 움직이는 순간,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노사도 나를 버리겠다는 것인가?”
“그저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었다. 설령 누군가를 도구로 이용한다 해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아무리 그게 본심이더라도 보통 본인 앞에서는 돌려 말하… 쿨럭쿨럭!”
말을 하던 도중 유기는 기침을 해 대며 안색이 희게 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바둑 기사가 유기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그만큼 노사의 계획에 형주목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전부터 노사께서 형주목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유비를 무너트리는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기에 유기 자신도 진 노사라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게 아닌가. 게다가 유비가 어찌 움직일지, 자신이 어찌 될지 정확하게 알아맞혔고.
“노사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내 죽음이 삶보다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
유기의 퀭한 눈에 묘한 광기가 맴돌았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유비에게 모든 권한을 내준 채 꼭두각시로 살게 되리라. 그리고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형주는 자연스럽게 유비가 차지할 것이었다.
‘부공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 거두고, 형주의 창과 방패로 임명했다. 뿐만, 아니라 황족으로서 권위를 세울 수 있도록 돕기까지 했지. 그런데 감히 나를 배신하고 형주를 집어삼키려 해?’
물론 유비가 그런 야심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유표의 유언을 무시한 채 유종과 칼을 들고 싸운 자신의 잘못이 컸다. 그러나 지금 유기는 그런 이유 따위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하기야 유표가 기껏 일구어 놓은 형주를 자신으로 인하여 망치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무능보다 배반을 한 유비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더욱 크고 강하였다.
그러자 결국 유비에게 약간의 타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자신의 죽음을 이용해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거기다 자신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라면, 쓸모 있게 사용하고 싶었다.
“제가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별것이 있겠습니까? 그저 노사의 말씀대로만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유기는 웃음을 지었다. 하기야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봐도 유비와 황조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누구를 만나더라도 아무런 제지나 감시도 없다. 마치 자신들에게는 터럭만큼도 영향이 없으리라 확신하는 것 같았다.
“내가 무엇인들 못 하겠소이까? 이미 죽음을 각오… 쿨럭쿨럭, 했는데 말이오. 내 생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말입니다. 다만, 기왕 목숨을 걸기로 한 이상, 유비에게 큰 타격을 주고 싶습니다.”
담담하게 듣던 유찬은 바둑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식한 장수에 불과해서 말입니다.”
유기는 그런 유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과 나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위풍당당한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비록 한쪽 다리가 불편함에도 보통 사람들보다 더 기개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관우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자신과 달리,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보고 그를 동경하게 되었다. 유기는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눈앞에 보이는 무인처럼 맞고 싶었다.
“알겠네. 그럼 노사의 다음 전언을 기다리도록 하지.”
대화를 마친 유찬이 그 길로 자리를 떠나자, 가만히 앉아 쿨럭거리던 유기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화려하게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 * *
유기의 처소를 떠난 유찬은 진궁이 기다리는 으슥한 골목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노사, 유기가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흡족한 결과에 진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유기가 자신의 계획에 따를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다만, 직접 양양까지 온 이유는 유기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판을 깔아 놓기 위함이었다.
“형주의 귀족들은 어찌 될 것 같은가?”
그러자 유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만난 귀족들은 죄다 유기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유기의 인격을 칭찬하기는 했으나, 군주로서의 평가는 거의 없고, 심지어 무시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유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면, 유표에게 충성을 바치던 이들은 모두 유종을 따라나선 것 같습니다.”
“…그렇군.”
만족할 만한 결과가 아님에도 진궁은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태연한 모습을 보고 유찬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여쭈었다.
“이대로 유기가 죽으면 대세에 어떠한 영향도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유기라는 패를 버리실 것입니까?”
“자네가 보기에는 유기라는 패를 버리는 것으로 보이는가?”
잠시 멈칫하던 유찬이 이내 대답했다.
“제 눈에는 그렇습니다. 유비의 아성이 너무나 튼튼해 지금 유기가 죽더라도 그 영향은 겨우 호수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니, 어쩌면 호수가 아니라 장강에 돌을 던지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 말에 진궁은 그저 차를 마시며 무심히 대답할 뿐이었다.
“상관없네. 그의 죽음이 유비를 무너트리는 계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나 또한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어찌하여 유기라는 좋은 패를 버리려 하시는 것입니까?”
“자네의 유기의 죽음이 그저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걸세. 형주 출신 사람들은 꽤 영향을 받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비를 버리고 난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 이미 천하가 혼란에 빠진 지금, 무능한 군주 하나가 죽는다고 한들 누가 칼을 들겠는가. 그래도 고민은 할 것이네. 정말로 유비가 인의 넘치는 인물인지, 아니면 그저 이중적인 인물일 뿐인지 말이야.”
“그것이 중요한 일입니까?”
유기의 역할에서 시작된 대화는 어느새 유비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자 진궁이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유찬에게 말했다.
“중요한 일이지. 한번 그의 가면이 벗겨진 이상, 다시 쓰기는 어려운 일이니 말이야.”
그러자 유찬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진궁을 보았다. 조금 전부터 언급되는, 유비의 가면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 유비는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로군. 적조차 속일 정도로 두터운 가면을 쓴 것이니 말이야.”
“혹시 제가 아는 그 유 사군을 말하는 것입니까? 때로 유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악하거나 비열한 인물은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찬은 유기와 같이 유비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느낄 수 있던 것은 그저 유비의 인자함뿐이었다. 도리어 그러한 모습에 굉장한 반발을 보이는 유기가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자네가 있을 때는 그가 가면을 벗지 않았으니 그렇겠지. 선주에게 한 것처럼 말이야.”
분명 두 세력이 싸우게 된 원인은 여포에게 있었다. 하지만 유비가 서주를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면, 서로 부딪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그 일을 장비의 주도하에 벌어진 것이라 여겼으니, 유비는 그 정도로 영악하였다.
지금에 와서 그 사실을 굳이 이해시킬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승태는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을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믿으니 말이다.
“돌아가면 주군께서 보내오는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겠군.”
유찬은 말을 돌리는 진궁에게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승태가 자신을 직접 찾아와 부탁한 일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우리야 그저 주군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려 할 뿐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러합니다.”
* * *
굳은 결심을 한 이후, 유기는 형주의 호족들을 불러 모았다. 유비는 유기의 초대를 받고 삼천의 군세와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한창 연회가 진행되던 도중, 유비의 옆에 서 있던 장비가 유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형, 유기 놈이 혹여 미친 짓을 하는 거 아닙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유비는 장비를 빤히 바라보며 반문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아니,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지금 저놈 상태를 보면 같이 죽자고 달려드는 것 가능하지 않소이까? 그러니 군사도 가지 말라 하지 않았소.”
“내가 그런 일에 당할 것 같으냐?”
장비는 유비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없지요, 없어. 대형이 그런 일을 당할 리가 없습니다.”
장비의 반응에 피식 웃은 유비가 말했다.
“독을 들여왔다고 하더군.”
그 말에 장비는 눈을 크게 뜨고 유비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내 말이 맞지 않소! 엉?”
“그런데 연회가 평화롭게 진행되는 걸 보니, 어딘가 독을 넣은 것 같진 않구나.”
유비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하자, 장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 아무것도 먹지 마시오. 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테니.”
“그래, 알았다. 하하하!”
이윽고 연회가 끝에 달하자, 유기가 유비에게 술을 따르는 일이 생겼다. 그동안 유비는 술 한 잔도 마시지 않아 말짱하였지만, 유기는 대단히 취해 얼굴이 벌겋게 바뀌어 있었다. 휘청거리던 유기가 유비를 향하여 물었다.
“유 사군은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것 같소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갑작스레 정곡을 찌르는 말에 유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그와 반대로 유기의 얼굴은 싱글벙글했다.
“내게는 후사도 없으니, 내가 죽으면 형주는 사군께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비는 그 말에 유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걸 알면 조용히 지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