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291
291화
나지막한 유비의 목소리에 유기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의 본성이야 이미 알고 있는 바이지만, 지금 연회장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항상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진 유비의 행동에 놀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 유비의 근처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으니, 그가 본성을 드러내더라도 들킬 일은 없었다.
그렇게 잠깐 유기의 손을 부여잡은 채 협박하던 유비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이리 취하셨단 말입니까? 부공을 잃은 슬픔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잔을 마지막으로 쉬는 게 좋겠습니다. 부공께서 유 형주의 안위를 제게 맡기셨는데…….”
유기는 유비의 가증스러운 말에 웃음을 지었다. 이러한 모독을 받는 일이 어찌 아무렇지도 않겠는가. 하지만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었다.
이윽고 유기는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전형적으로 취한 인물의 행동이었다. 그렇게 유비의 옆자리가 비자, 주변을 서성거리던 명사들이 앞다투어 빈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유기는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의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저 행태는 과거, 유표가 유비를 데려왔을 때와 같았다.
분명 자신이 주최한 잔치였다. 그리고 이곳은 자신의 집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회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유비였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유기는 유표의 고통과 자괴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유비를 검으로 사용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비록 유비의 인의가 거짓된 가면일지라도 그는 언제나 빛나는 인물이었으니까.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란 말인가. 자신은 아버지의 후광을 받으며 몸이 망가질 정도로 노력해서 학식을 쌓았다. 그런데도 눈앞에 보이는 무지렁이에 거짓말쟁이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 이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내 역할은 그저 뜨겁게 불타올라 저자의 야망을 태워 버리는 거다.’
어차피 자신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다. 마치 마른 고목이 된 것처럼 몸의 기운은 점점 빠져나갔다.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였다. 마른 고목은 불탈 때가 가장 아름답지 않던가.
‘나 하나의 목숨으로 간웅의 빛을 꺼 버릴 수 있다면… 내 기꺼이 불꽃의 장작이 되리라.’
마침내 유기는 품에 숨겨 둔 독을 술에 섞었다. 그러고는 술잔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현실적으로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자, 공포가 유기의 마음을 잠식했다. 아울러 다시금 한발 물러나 생을 이어 가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그때, 유기의 눈에 자신 따위는 잊은 채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잠시 흔들린 마음이 무색해지는 광경이었다.
‘나의 죽음으로 유비의 몰락을 이룰 것이다.’
유기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독주를 집어삼켰다. 저 보기 싫은 모습을 자신의 손으로 부수기 위함이었다.
술을 마시자 처음에는 뒷목이 조금 뻐근해지더니, 이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곧 쓰러져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자,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눈꺼풀까지 굳어 눈도 뜰 수 없었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유기는 범인을 지목하려 애썼다.
한편, 갑자기 유기의 상태가 이상해지자, 몇몇 이들이 심각성을 눈치채고 유기에게 달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급박한 분위기가 되자, 유기는 유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 사군, 그대가 어떻게…….”
그러나 유기는 호흡이 가빠지는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헐떡거리다가 곧 숨이 끊어졌다.
죽어가는 유기를 목격한 몇몇 인물들이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형주목!”
마지막 순간에서야 자신이 원하던 관심을 받게 된 유기는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동시에 회한과 아쉬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갑작스러운 유기의 죽음은 형주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후의 순간에 유기가 유비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많은 사람이 그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그런 의혹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비가 직접 나서 유기의 장례를 주관했지만, 여러 소문이 떠도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유비는 상복 차림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했는데, 그중에는 마씨 일가의 가주, 황씨 일가의 가주 황승언 같은 형주의 명가들과 제갈량이 있었다.
“이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내 이를 증명하고자 직접 술을 마셔 보지 않았습니까.”
유비의 해명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편으로는 영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형주목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이가 바로 유비였기 때문이다. 유기에게는 후사도 없고, 형제와 친족은 모두 쫓아냈으니, 이제 형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은 유비만 남은 상태였다.
진씨세가의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지금 상황을 보시오. 내 그대의 편에 서기는 했으나, 그것은 유 형주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오. 형주목은 우리 가문의 핏줄이니, 내가 그대의 손을 잡으면 목숨만큼은 지켜 줄 것으로 생각했소. 그런데 내 잘못 생각한 모양이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를 모르겠으니, 일어서겠소.”
진씨세가의 가주가 떠나려는 순간, 제갈량이 그를 불러 세웠다.
“가주, 지금 이 자리를 나가면 후회하실 겁니다.”
제갈량의 협박에 진씨세가의 가주가 그를 돌아보았다.
“후회? 이미 하고 있네. 내 방덕공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런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겠지.”
제갈량은 그렇게 말한 진가의 가주를 비웃었다. 단순히 유기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유기가 살아 있을 때, 가장 먼저 형주목을 내려놓으라고 말한 것이 진가였다.
하지만 더는 유비의 곁에서 중용을 받을 수 없으니, 다른 길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그런 박쥐 같은 모습에 제갈량은 그의 선택이 틀렸다고 확신했다.
“가주께서 말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큰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렇게 진가의 가주가 떠나가자, 제갈량은 남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번 일로 인하여 형주의 명가들이 약간 흔들리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대체재가 없는 형주에서 무얼 하겠는가. 형주에서 권세를 누리고자 한다면, 유비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비 또한 다른 가주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유비가 입을 열었다.
“작금, 순욱이 하북에 집중하는 이때에 북진하고자 합니다. 돌아가신 유 형주와 황실의 가장 큰 어르신이던 선대의 영웅, 유공께서도 황실의 복원을 원하셨으니…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순욱이 아니겠습니까?”
유비의 말은 이 일의 배후로 순욱을 지목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마씨 일가의 가주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날 유 형주의 최후를 본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진가의 가주 또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유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참으로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하나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순욱의 간악한 행동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유비의 말은 적반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사건의 배후로 순욱을 지목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기의 죽음을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키자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유비와 달리 형주의 명가들은 대대적인 공세를 펴는 것에 주저했다. 이미 원가의 잔존세력 대부분을 무릎 꿇리고, 답돈과 원담만이 남은 상황.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비가 생각하는 바를 잘 알 수 있었다.
“순욱의 통치는 과거 조조와 다릅니다. 허도만 차지할 수 있다면, 단번에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근거가 무엇이오? 허도를 빼앗아도 순욱이 살아서 세력을 다시 모은다면, 기반이 탄탄하지 않은 우리가 오래 버틸 수는 없을 터인데.”
제갈량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허도만 차지할 수 있다면, 순욱의 지지 기반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폐하라는 명분이 사라진다면, 과거 조조의 아래에 있던 군웅들이 할거하겠지요. 즉, 순욱의 세력은 갈가리 쪼개지게 될 것입니다.”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조조가 허도를 통치할 때, 군벌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던 명분인 황제가 사라진다면, 각자 독립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천의 유장 또한 유 사군의 말을 따라 북진을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순가를 지지하는 조씨들이 있는 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네.”
“물론 둘의 사이 또한 벌려 놓아야 하겠지요.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가 안에서도 순가의 자리가 원래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논리정연한 제갈량의 설명에 가주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제갈량과 둘만 남게 되자, 유비는 술을 들이켜며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일이로군. 유기가 그리 죽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유비의 말에 제갈량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쓸모가 많은 인물인데…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어쩌겠는가,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인 것을. 쯧쯧, 나야말로 누가 죽였는지 알고 싶어지는군, 그로 인해 우리의 계획이 모두 틀어져 버렸으니. 설마 그 겁쟁이 놈이 자진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주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순욱이나 혹은 저희를 적대하는 이라 하더라도 유기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유기가 죽더라도 이들이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호족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는 정도이지요. 차라리 유기를 살려 두어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유종이 있지 않은가.”
“유종은 순욱과 손잡은 순간, 형주의 패권을 잡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만일 유종이 남형주로 도망갔다면, 그의 수작이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가?”
유비가 침음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기의 죽음이 누구 소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다행이군.”
“하지만 이 일의 주체가 달라진 만큼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분명 진가의 가주 같은 이들이 다른 생각을 하겠지요. 혹여 순욱의 명에 따라 난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유비는 숨을 한번 크게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대책이 필요하겠군.”
“금방 처리될 것입니다.”
“다른 가문들에서 반발이 있지는 않겠지?”
“그들에게 먼저 말해 둘 것입니다.”
“알았네. 내 그대에게 물이 되어 달라 하였는데 더러운 일을 시키다니… 정말 미안하군.”
제갈량은 아무런 말 없이 유비에게 예를 표하며 자리를 떠났다. 유비는 술을 따르며 유기가 묻힌 쪽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방해만 되는 놈이로군.”
이후, 진가에서 유기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형주 전역에 퍼졌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믿지 않았으나 유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표하자, 곧 많은 이들이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와 함께 형주를 집어삼킬 계략을 세운 순욱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