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347
347화
순운은 걸음을 옮겨 황제의 표를 가장 상석에 올려 두었다. 이에 승태는 자리에서 내려와 몸을 낮추고 예를 표하였다. 그 뒤로 뭇 인물들이 연이어 예를 표하자, 순운은 황제의 제서(制書)를 읽어 내려갔다.
제서에는 그동안 승태가 세운 공을 상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순운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순운의 목소리가 높아졌는데, 직접 입조하여 상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승태는 고개를 조아리고 다른 이들의 표정을 흘깃 살폈다. 다들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좋지 않은 느낌이 자신에게만 느껴지는 건 아닌 듯했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세운 공을 생각하면 입조하라는 명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황을 꺼린 승상이 아닌가. 갑자기 입조하라는 이유를 모르겠군.’
하지만 여기서 표정 관리에 실패해서는 안 됐다. 반드시 웃는 얼굴을 보여야 할 터. 입조를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킬 게 뻔했기 때문이다.
승태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며 순운이 내미는 제서를 받아들었다.
“신 조제, 폐하의 명을 따르나이다.”
그렇게 전언이 모두 끝나자 순운을 따라온 이들이 곧바로 조심스럽게 황제의 패를 함에 넣었다. 승태가 일어나 제서를 넘기자, 역시나 내관들이 헐레벌떡 뛰어와 패와 함께 정리했다.
그러고 나서 순운은 곧바로 승태에게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호분중랑장 순운, 수춘후를 뵙습니다.”
그 모습에 승태는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승상께서는 무탈하신가? 변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승상께서 황도에서 일어난 분란을 잠재우고 다시금 정사에 매진하고 있사옵니다.”
승태는 순운의 말을 듣고 잠시 멈추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승태는 순운의 맑은 눈에서 과거의 순욱이 느껴졌다. 분명 거짓을 말할 인물은 아니리라.
“다행이구려.”
“소인 장천, 후를 이렇게 볼 수 있어 참으로 기쁘옵니다.”
순운의 모습은 꽤 정갈하여 마치 그가 승태를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승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정에서 내려온 사람이 이 정도의 태도를 보인다면 진정 상을 주기 위해 온 게 분명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잠시 물러나 주겠는가? 내 연회를 준비하겠네. 여독에 많이 피곤할 터인데 잠시 쉬고 있도록 하게. 모든 준비가 끝나면 내관을 보내도록 하지.”
순운은 몸을 일으켜 예를 표하였다. 순운이 그 자리를 떠나자 승태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자리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태보의 일은 참으로 가벼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엽이나 노숙, 양수 등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과거에는 입조가 이 정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승태의 위치는 결코 가볍지 않으니, 이런 침묵이 사위를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로 미루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뒤에 와병을 핑계 삼으면 조정에서도 억지로 부르지는 못하겠지요.”
유엽의 말에 옆에 있던 양수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조정에서 상을 내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지금 준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이를 어긴다면 나중에 문제가 될 게 분명합니다. 또한 후께서 잘못한 게 없는데 어찌 물러나겠습니까. 만일 조정에서 트집을 잡는다면 이번에 물러난 일로 죄를 물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이번에 온 사람이 순운이 아니었다면 승태 역시 유엽의 의견을 따랐을 터. 그러나 순욱이 제 아들을 직접 보낼 정도라면 안전을 담보할 테니, 꼭 입조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만일 순욱이 무언가 술수를 꾸민다면 그의 장자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아직 원담의 일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일로 혹여 저들이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유엽의 말에 승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담 또한 의심을 하게 될 게 뻔한 일이었다. 물론 원담이 의심을 하든, 왕수가 의심하든 이미 승기를 잡은 상태니 마음대로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아직 고간의 군세가 굳건히 남아 있으니 그가 조비와 싸우는 것을 멈추고 남하한다면 다시 골칫거리가 되리라.
지금 원담과 고간의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 승태로서는 둘이 분명히 연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기야 왕수를 보낸 고간이 원담을 배신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건 당연했다.
“이 일의 결론은 순운을 만나 본 이후에 생각하도록 하지요.”
“소신들은 후의 모사들과 같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제서를 가져온 이들과 연회를 열어야 하니, 같이 연회를 즐긴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먼저 이야기할 필요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양수가 승태의 의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래서야 신료들이 연회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 그저 이번에 내려온 신료들을 감시하기에 급급하겠지요. 저들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면 도리어 틈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승태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조의 말이 맞습니다. 굳이 먼저 들쑤셨다가는 저들이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챌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 말에 모두의 고개가 양수를 향하여 스윽 돌아갔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양수와 같이 다니는 예형이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동시에 떠올린 것이다.
양수는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그저 눈을 껌벅이다 이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제가 입이 가볍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일을 어찌 쉽게 발설하겠습니까?”
“자네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눈치 빠른 자네의 친우를 걱정하는 것이네. 혹여나 이를 눈치채면 조정의 신료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모르지 않는가.”
양수도 예형에 대해서는 변명할 말이 없는지, 마른 입술을 할짝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양수는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는 이였기에 그제야 신료들이 조용해졌다.
***
순욱은 수많은 죽간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순심만이 남아 그 일을 돕고 있었는데, 둘의 일처리는 대단하기 그지없었다.
휙휙 붓을 긋는 게 언뜻 보면 대충 일을 진행하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순식간에 모든 내용을 파악한 뒤 죽간을 분류, 정리하고 있었다.
두꺼운 죽간 뭉치를 보던 순심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사여구와 고사들이 잔뜩 적힌 사인들의 보고서를 읽다 보니, 내용을 파악하기 이전에 눈이 아프기 일쑤였다.
잠시 붓을 내린 순심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표정의 변화가 없는 순욱을 바라보았다.
“명공, 걱정되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형님?”
“운이가 지금 수춘후와 함께하지 않습니까? 혹 진정…….”
멈칫.
그 말에 순욱 또한 붓을 내려놓은 뒤 순심과 눈을 마주했다.
“진정 수춘후가 역모를 꿈꾸었다는 것 말입니까?”
“그렇사옵니다.”
그 말에 순욱은 웃음을 흘렸다.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듣는 순심에게는 마치 당치도 않다는 듯 느껴졌다.
“그에게는 이미 기회가 많았습니다. 형님, 만약 수춘후가 높은 자리를 얻고자 했다면 과거의 명공 같은 명성을 벌써 얻었겠지요.”
“그 말씀은…….”
“역모를 일으킬 거란 생각은 가슴속에 없을 겁니다. 뭐, 물론 불측한 생각을 어느 정도 했을 수는 있겠지요. 하나 선을 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간의 이야기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을 테고요.”
순간, 순심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순욱은 이미 수춘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듯했다. 잠깐의 침묵이 방안을 가득 채웠고, 순심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한 때, 순욱이 먼저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순가가 원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형님.”
“명공.”
순욱은 순심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며 중얼거렸다.
“제 의지는 이미 패공이 죽은 뒤로 끝났습니다. 대체재를 찾아봤지만, 그 누구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치 이사가 진나라를 바라보며 말한 것처럼 모든 준비가 갖춰진 주인이었지요.”
“명공, 이제 그 자리에 직접 오르신 겁니다. 천하의 인재를 발굴하고, 나라의 환란을 넘긴 분께서…….”
“하하하, 형님. 애써 감쌀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순가에서 정한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를 이어 나갈 뿐입니다.”
“…원하신 바가 아니었습니까?”
순욱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바라는 것이라… 그렇다고 해야겠지요. 제가 명공께 바라던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고 다시 주변이 조용해지자, 잠시 입을 우물거리던 순욱이 말을 이었다.
“아, 수춘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역시 순가의 의지에 따를 것입니다. 분란이 될 만한 이들을 정리할 필요는 있습니다. 물론 능력이 아까우니 후일 관직을 내릴 수는 있으나, 그의 힘은 모조리 빼놓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천리(天理)에 욕심이 없다고는 하나, 지방의 군벌이 그만한 세력을 갖춘 걸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순욱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과거 여불위가 진조의 사슴에 관심이 없다고 아무리 말하고 다녔던들 세상의 그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거대한 세력이 움직일 때마다 천하가 뒤흔들리는 법…….”
순욱은 말꼬리를 흐렸지만, 어쩐지 순심은 뒷 내용도 알 것 같았다.
지방에서 일국을 이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인물들을 모조리 제압해야 그들이 가진 모든 힘이 중앙으로 올 터. 그렇게 생각하면 승태를 제압할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환란은 제압하고 중앙을 확고하게 차지한 지금이 말이다.
시황제는 여불위를 어떻게 몰락시켰는가.
“수춘후의 사람을 반역의 주도자로 만들고 그것을 명분 삼아 그의 힘을 잘라 내면 그만입니다. 게다가 그는 내부적으로 한조의 전통을 거부하며 유학 또한 거스르고 있지요. 그리고 당시의 여불위는 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 심지어 시황제도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위치였지만 수춘후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황도로 불러 죄를 묻고 대가를 치르게 하면 그게 그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순심은 순욱의 무미건조한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소신, 승상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
황도에서 그런 대화가 오갈 때, 고간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왕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수는 고개를 빳빳이 든 상태로 이를 갈고 있었다. 그 모습에 고간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기회를 주었는데 어찌 그리 분한 모습을 보이는가?”
“기회가 아니라 죽을 자리로 밀어내는 것이 아닙니까?”
“으하핫, 대체 무엇이 말인가? 내 그대와 원담, 둘 모두가 살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는가? 수춘후에게 알리게나.”
“어떻게 말입니까?”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닌 사안이지. 나야 뭐 그대들이 어떻게 되건 상관이 없지 않겠는가? 이미 공을 세워 병주목으로서 확답을 받았으니 말이야.”
고간은 마치 꽃놀이패를 모두 들어 올린 것처럼 왕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얻어 내고 싶은 병주목으로서의 안전은 확답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 왕수의 상황은 그저 유흥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이대로 숨어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의탁하면 어찌 되는 것이오?”
“뭐 어찌 되겠는가? 수춘후가 붙잡히고 원담은 분노한 이들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겠지. 목만 이곳에 도착할 것이야. 아닌가? 나로 인해 수춘후가 변을 당한다면 핏줄인 원담은 찢어 죽고 묘도 못 쓸 수도 있겠군.”
왕수는 고간의 비열함에 치가 떨렸다.
“그대가 성공하기를 빌지. 그래야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재미있겠군.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으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