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351
351화
고순은 한 손으로 승태가 직접 하사한 도끼를 부여잡고 가쁜 숨을 내뱉고 있었다. 반대쪽 손에 쥔 창으로 땅을 짚은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갑주를 연결하는 실이 끊어져 너덜거렸고, 전신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방패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무에 기름을 먹여 가죽을 씌워 매우 튼튼했을 것임에도 완전히 부서져 이제는 그 역할을 할 수 없을 듯했다.
대장인 고순의 상태가 그러하니 함진영은 어떻겠는가. 가장 멀쩡한 병사조차 온몸에 화살 수십 발이 박힌 채 겨우 숨만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명을 완수하려는 듯, 자신의 몸을 성벽에 기대고 창을 들었다.
“하아… 하아… 불퇴순명(不退順命)…….”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함진영의 훈을 읊고 나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듯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황군 역시 결코 멀쩡하지는 못했다.
승태의 최정예군인 함진영을 상대한 대가는 컸다. 내성은 이제 완전히 시산혈해로 변해 있었고, 그 시체는 황군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마지막 병사가 쓰러지는 것을 바라본 고순은 눈을 감고 시체의 산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은 병사들에게 또 다른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아니, 두려움 이상이었다.
경외(敬畏), 경이(驚異), 존외(尊畏).
이러한 감정이 병사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가슴속에 자리 잡으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게 된 것이다.
조휴는 고순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뒤의 황군을 슥 훑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병사들이 무엇인가에 홀린 듯하군.’
하기야 겨우 일백이 조금 넘는 이들이 지금 수천의 앞길을 막은 것이었다. 물론 이전부터 함진영의 소문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숫제 역사서에 나오는 초인의 무용이 아닌가.
차라리 야전에서 소수의 기마가 보병 대군을 격파했다는 것이 더 현실성 있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런 건 몇 번 있었으나, 지금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조휴는 속이 타들어 갔다. 지금 이 자리에는 승상인 순욱이 와 있는데,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그는 이제 고순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병사들의 두려움을 해소하고, 눈앞의 인물이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아야 했으니까.
만일 고순이 저렇게 무의 화신처럼 죽게 된다면, 단순히 병사들의 경외를 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무의 화신이 모시는 인물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되겠는가?
수춘후를 역적으로 만들어 죽일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분명 후일 큰 문제가 되리라.
‘나는 이미 조가를 버리고 순가를 택하였다. 순가가 천자를 끼고 천하의 제후들을 제어하여 권좌에 올라야 나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게 된다.’
낙양의 조씨들은 각자 선택을 내렸다. 그중 조휴는 완전히 순가에 의탁하였기에, 최대한 순가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덧없군. 수춘후의 제일가는 무장이라는 자가 이렇게 가다니 말이야. 순명은 무슨 순명인가? 게다가 이미 사방의 문은 모두 잠기어 나갈 수 없을 터. 분명 다른 문을 통하여 병사들이 수춘후를 잡았을 것이다.”
조휴는 어떻게든 고순을 흔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장군을 버리고 간 수춘후는 결국 역모의 잔당으로 목이 잘릴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차라리 국문을 받았다면 그저 유폐되거나, 잠시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끝났을 텐데. 특히 그대는 그런 자를 주군으로 삼은 바람에 무명을 떨치지도 못했으니, 그만 항복하고 머리를 숙이는 게 어떻겠나? 살고자 한다면 최대한 목숨을 구명할 수 있게 도울 것이네.”
조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방의 문은 결코 사람의 힘으로는 열 수 없었고, 작금 수춘후가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으니 말이다.
“겨우 몇백의 기마로 성문을 넘을 수는 없을 것이고, 기껏 해 봐야 말을 버리고 도망가는 수뿐인데, 그래도 금방 잡힐 터.”
그러나 고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세를 고쳐 잡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는데, 한 발 움직일 때마다 무서운 투기가 느껴졌다.
조휴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면서 시체나 다름없는 고순에게 놀란 자신에게 화를 내며 말고삐를 다잡았다.
조휴가 그러할 진데 다른 병사들은 어떻겠는가. 이미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고순은 널려 있는 황군의 시체 하나를 들어 화살을 막고 있어 더 이상 원거리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가가서 백병전을 해야 할 텐데, 저런 투기를 뿜어내는 인간에게 덤벼들 미친 병사는 없었다.
고순은 도끼를 들고 흐린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상쾌함을 느꼈다. 조휴가 앵앵대는 소리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억울하군.”
그 말을 들은 조휴가 비릿하게 웃었다. 드디어 고순이 무너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구나.”
“그렇소. 살아서 주군을 봐야 할 것 아니오?”
“네놈의 더러운 입에 감히 주군을 입에 올리지 말라.”
조휴는 곧바로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함진영은 주군의 명을 이행하고 반드시 이루었다. 아니, 더 높은 곳에 이르게 되었다. 주군께서는 우리를 가장 가까이 두었고, 전장에서 한 번의 돌격으로 어떠한 방진도 부수어 길을 만들었다.”
고순이 걸어 나왔다. 그의 전신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피로 만들어져있는 악귀처럼 보일 뿐.
“나는 감히 주군에게 역적의 굴레를 씌운 순욱을 잡고자 한다! 순욱을 따르는 자들 역시 벌하고자 한다! 여기서 주군의 천리(天理)를 어기는 자들 모두를 이 자리에서 죽인다!”
조휴는 순간 터져 나오는 고순의 목소리에 놀랐다. 이것이 죽기 직전의 사람이 맞는가? 그가 타고 있던 말 역시 더욱 놀라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푸히힝!
두려움? 경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조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막아야 한다.’
저자를 막지 못하면 이곳의 모든 이들이 죽는다. 순욱이 죽는다. 순가가 무너진다.
“막아!”
병사들은 순간 멈칫하였으나, 조휴가 검을 들어 머뭇거리는 몇몇을 베어 버리자 허겁지겁 고순에게 달려들었다. 또 다른 공포가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었다.
조휴는 눈에 핏발이 서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화살을 쏘란 말이다! 이제 막을 것도 없으니 화살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얼이 빠진 병사들은 조휴의 외침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몇몇은 고순에게 무작정 달려들었고, 또 몇은 엉거주춤 활을 들었다. 이미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혈인을 마주한다면 누구나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
“비키거라! 천리를 역행한 순욱이 앞에 있느니라!”
느릿느릿했지만, 그의 도끼는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병사 한 명이 죽었으니 말이다.
고순은 날아드는 창을 손을 뻗어 잡았다. 그러고는 병사를 보고 씩 웃더니,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뛰어난 무위를 보여 준 것도 잠시, 쏟아지는 화살에 그의 전진이 멈췄다. 이미 화살을 여러 대 맞은 상태였으나, 지금은 마치 고슴도치 같았다.
그런데도 고순은 발을 들어 앞으로 한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천천히 감기고, 무릎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고순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약간 슬픈 감정이 들었다. 혹 시신이 수춘에 간다면, 성하지 않은 모습에 승태가 얼마나 슬퍼할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병사들은 숭고한 고순의 한걸음에 안도감과 경이감을 느꼈다. 조휴 역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경건한 모습으로 적의 끝을 지켜보려고 했다.
그때였다.
피슈우우웅!
화살 하나가 고순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그로 인해 천천히 쓰러지던 고순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다른 시체들처럼 땅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
순욱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모두의 시선을 받았다. 그 싸늘한 눈초리에 조휴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감히 황궁까지 쳐들어와 피를 보게 한 이들이네. 모두 사지를 잘라 내던지게.”
“순 공자는…….”
“시신을 찾아 순가로 보내게. 감히 아비보다 먼저 죽은 불효자이니, 가문에서 판단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순욱은 자리를 벗어났다.
* * *
거대한 덩어리의 정체는 허정이었다. 그는 부곡들과 함께 조운의 뒤에 도착하였다. 수비군들은 피로 물든 허정의 모습에 안도했다. 분명 내성의 황군이 움직인 거로 생각한 것이다.
“역적 조제가 도망치려 하니 당장 저자를…….”
콰앙!
굉음과 함께 말을 꺼낸 이의 머리가 짓이겨졌다. 옆에 있던 수비병은 그대로 사고가 멈춰 멍하니 허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감히 승상의 명을 어기…….”
다시 말을 이어 가려는 이의 머리까지 짓이긴 후, 허정은 기병들을 바라보았다.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수춘후의 등장을 알린 이는 그저 승태를 죽이기 위해 중앙의 관리 몇이 짠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여기까지 오며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너희들은 모두 나를 따르거나, 이곳에서 죽는다.”
병사들은 순간 눈이 흔들렸다. 허정은 철퇴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문도위인 내가 문을 못 열 듯 싶으냐? 정녕 끝까지 막는다면 이곳 큰문이 아니라 물이 드나드는 수문을 열 수도 있다.”
순간 기마병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성문 앞을 완전히 장악한 허정은 곧바로 성벽 위로 올라가 문을 고정하는 장치를 모조리 부숴 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의 부곡들과 함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그그극.
어느 순간, 조금씩 흔들리던 성문이 점차 기울어지더니 기분 나쁜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으아아압!”
허정이 힘을 쓰는 소리와 함께, 돌이 떨어지더니 성문이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곧바로 해자를 건널 수 있는 다리로 가 고정된 철쇄를 박살 낸 뒤, 길을 만들었다.
“빨리 건너가셔야 합니다.”
승태가 재빨리 다리를 건너자마자 허정은 다리를 부숴 추격이 따라붙지 못하게 막아 버렸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고 움직이려는 순간, 승태가 멈춰 섰다. 그는 도저히 고순을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호위하고, 함께한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조운이 승태를 재촉하였다.
“주군, 지금 가셔야 합니다.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을 보니, 다른 곳에서도 병력이 오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승태가 미적거리자, 조운이 일갈했다.
“고 장군의 뜻을 헛되이 만드실 생각입니까!”
뿌드드득.
이가 부서지랴 꽉 깨물던 승태는 갑자기 칼을 들고 손아귀를 베어 피를 떨어뜨렸다.
“조 장군, 나는 여기서 맹세하겠습니다. 이번 일에 관계된 모든 자를 죽여 복수하겠다고. 반드시!”
승태의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을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먼 과거, 숲을 모조리 불태우겠다는 다짐처럼 다시 한번 복수를 맹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