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The Unfinished Lord RAW novel - Chapter 63
삼국지 : 미완의 군주 62화
남양에 부임한 시기는 가장 불안한 시기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승태에게는
가장 평안한 시기였다.
가후와의 특이한 협력 관계 덕분이었다. 둘은 매번 진짜 전투는 하지 않고 충
돌하는 분위기만 냈다. 물론 전투에 대해 상신은 꼬박꼬박 했다. 그 외 대다
수의 일은 이전과 비슷했다. 남양 일대의 서주와 똑같이 호족들을 쥐어짜면서
땅을 백성들에게 나눠 주거나, 벌어들인 부는 일부 농지 개발에 썼다. 승태는
그 사이에서 수수료 정도만 챙겼다.
반면, 서주는 승태가 빠지자,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특히 하비국 주변에
서 가장 큰 민란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차주가 호족에게 다시 원래대로 돌려
놓기 위해 땅을 빼앗았고, 다시금 고리대가 시작된 탓이었다. 이에 농민들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면서 미친 듯이 난이 퍼져 나갔다.
다행히 낭야와 광릉 노국은 난의 크기도 작았고 군사들도 충분했기에 쉽게 제
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비국은 원술의 잔당들과 연합하여 조조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이 일로 허도 내부에서는 승태의 통치 능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늘어났으며, 한호가 민간의 유랑민들에게 직접 땅을 개간하게 하는 둔전제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정에서도 승태의 이름이 높아졌다. 하지만 통치 능력과는 별개로 무자비한
형별에 관한 이야기도 함께 퍼지면서 ‘능력은 있지만 무자비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조정의 일과 상관없이 승태는 이제 만 한 살이 된 아이를 위해 잔치를
열었다. 집 안 가득 선물들이 쌓인 것을 본 승태는 일일이 물건을 풀어 보고
있었다.
오용이 잘 포장된 함(函) 하나를 열자, 곱디고운 비단 하나가 나왔다. 그는
비단을 쓱 만져 보며 감탄하였다.
“창 도위님, 이것 좀 봐 주세요.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창희는 오용이 꺼낸 촉금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고는 그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
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 우리 도련님의 첫 생일에 이런 품질의 촉금을 보내 준 분이 누구입니까?
하, 대단하네요.”
오용이 보물을 이야기할 때 계속 창희를 찾자, 승태는 약간 심통이 나서 오용
에게 한소리를 했다.
“오용 아저씨는 왜 창 도위만 찾습니까?”
그러자 창 도위와 오용은 승태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공께서 보물의 가치를 모르니 그러는 것 아닙니까? 마(麻)옷이나 솜옷만
좋아하는 주인께서 비단의 아름다움과 감촉을 아십니까?”
‘리넨이 뭐 어때서? 그리고 추울 땐 솜옷이 최고잖아. 비단옷 겹겹이 입는 것
보다 훨씬 더.’
“그리고 그 옻칠 가구만 두시니, 다른 이들이 매번 와서 검박하다고 하지 않
습니까? 뭐, 원술에게 빼앗은 금은은 돌아가시면 가지고 가실 겁니까? 아니,
비추는 것도 좋고 뭔가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한데 원가의 부
유함을 훔쳤다는 오욕을 뒤집어쓰셨으면 못해도 부귀는 즐기셔야죠.”
승태는 오용의 말에 반감이 생겼는지 자신의 나무 컵에 담겨 있는 얼음들을
보여 주며 소리쳤다.
“나도 부귀 누리고 있어요! 여름에 얼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엉! 나도 거 돈 쓸 줄 안다고요!”
오용은 그런 승태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태수가 빙고(氷庫)에서 얼음 좀 먹는 것을 부귀라 말씀하시면 진짜 부귀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놀림 받습니다.”
그때, 최림이 승태의 옆에서 복숭아를 노육의 입에 넣으며 말했다.
“천성적으로 청빈하고 검박하니, 참으로 아름답지 않으냐?”
아이는 복숭아를 입에 오물거리다가 접시를 들고 오용과 창희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앞에 복숭아를 내려놓고 다시 최염의 옆에 앉은 승태의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태수께서는 검박함에도 스스로 누리는 모든 것을 백성들과 비교하여 사치로
말씀하시니,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정원 대다수도 밭으로 만드
시고 직접 농사일을 하시니, 이야말로 실사구시의 표본이옵니다.”
승태는 자기 일을 띄워 주는 이들을 보며 자신의 이마를 쳤다.
“계규 공, 밭을 정원에 만든 것은 신선한 채소를 바로 먹으려고 한 겁니다.
그리고 농사법 연구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뿐 아니라 약재도 기후에 맞게 키
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 여기서 같이 일하는 분들과 하는 일들 아닙니까?”
노숙과의 농법을 위한 것들, 화타의 약재, 그리고 직접 먹고 싶은 음식의 식
재료 등을 키우는 승태의 장원은 거대한 연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노숙은 얼음이 담긴 녹차를 마시며 말했다.
“하긴, 음식만큼은 많은 양을 먹지 않아도 부귀를 느낀다는 느낌이 들긴 하
지. 그런데 가끔은 죄다 백성들도 먹지 않는 음식을 먹지 않는가? 그것도 책
으로 쓰던데, 백성들이 굶지 않도록 하는, 그런 것이 아닌가.”
‘아니라고! 그거 먹을 수 있는 버섯들 구분하고, 과거에 먹던 음식 찾는 건
데, 왜 그렇게 되냐고. 이러다 도 무슨 인의의 명신 같은 걸로 부르려고! 어
휴, 적당히 부패해야지 그게 사람이지.’
승태의 지론 중 하나가 너무 깨끗하면 쉽게 쓰러진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적
당히 더러우면 좀 더러운 짓을 해도 아무렴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역치가 높
아지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흔들리고 떠나지 않으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되었습니다. 형님도 저를 아는데, 그렇게 말합니까?”
그때, 승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혜와 그녀의 팔에서 놀고 있는 아기
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기를 보기 위해 승태는 허겁지겁 달려갔다.
“부인, 무거울 터인데 이리 주시오. 내가 단(旦)이 안고 있으리다.”
여혜는 웃는 얼굴로 단이를 내어주자, 승태는 얼굴을 못생기게 만들며 단이와
놀았다. 단이가 승태의 수염을 잡자, 승태는 웃으면서 그와 함께 장난을 쳤다.
오용은 그런 단이에게 다가가 아까 자랑하던 비단을 가져왔다. 단이가 웃으면
서 비단을 만지작거리자, 오용은 기쁜 듯 말했다.
“역시 도련님은 귀한 물건의 가치를 아시는군요. 이렇··· 아아아악!”
단이가 잡은 곳이 북 하는 소리와 함께 뜯어지자, 오용이 비명을 질렀다. 급
히 비단을 빼려고 했으나, 단이의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가면 도리어 꿈쩍하지
도 않았다.
“어어어!”
승태는 그냥 장난을 치는지 알고 웃었으나, 오용은 놀라 뭐라고 하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조 남양! 조 남양!”
승태는 단이를 오용에게 맡겼다. 오용에게 안긴 단이가 수염을 잡으려 하자,
오용은 안절부절못하고 애매하게 안아 들었다. 승태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달려오는 인물을 쓱 봤다. 요사이에 일을 많이 했는지, 눈이 퀭한 관리였다.
“조정에서 서가 왔습니다.”
“조정이면 슬슬 원소가 공손 장군이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인가?”
승태가 담담히 말하자, 관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넘어지며 놀란 눈으로 바라
보았다. 승태는 그런 관리를 일으키며 말했다.
“뭐 그런 일로 놀랍니까? 이미 원소와 공손찬이 싸우고 있는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결과야 뭐 뻔히 보이는 일이고요.”
“그래도 이리 쉽게 예측하시는 것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중달은 지금 무엇을 한다고 합니까?”
“이 이야기를 먼저 전달받으시고 아마 태수께서 허도로 갈 것이라며 준비하라
고도 전하셨습니다.”
“중달이 뭔가 아는 일이 있나 보네요.”
승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관리를 다시 돌려보냈다. 관리가 나가는 그때, 밖에
서 조운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예를 표하였고, 승태는 그런 그를 보며 약간 안
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야기 듣고 왔나 보군요.”
“예, 주공.”
“공손 장군의 머리가 허도로 왔다고 하니, 자네도 같이 가는 것이 좋겠지요.
창 도위”
“예! 주공!”
“아마 허도에 다녀갈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해 주세요.”
창희는 단이의 선물들을 정리하다가 이내 달려왔다.
“허도 말입니까?”
“예. 조 장군과 움직일 겁니다.”
“고 도독께서도 움직입니까?”
“아니요. 도독은 이곳을 지켜야지요. 저와 사마 현승과 창 도위, 조 장군, 휘
하 군사들만 움직일 겁니다.”
“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숫자였다. 일백이 조금 넘는 기주병들과 일백의 단양 출신
호위, 그리고 열 명 남짓의 태산 호걸이 움직이는 일이었다.
노숙이 승태의 옆에 다가와 물었다.
“자네가 가면, 내가 무음을 대신 통치해야겠지?”
“그럼요, 형님. 이곳에 저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형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계규 선생도 있지 않은가?”
“계규 선생은 아직 관직을 받지 않아 어렵죠.”
“그냥 동생이 세우면 될 일 아닌가?”
“계규 님이 안 받을 겁니다. 형님이야 이해할 정도에서 절차를 좀 넘겨도 결
과가 좋고 의미가 좋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겠지만, 계규 선생은 일일이 다 따
질 겁니다.”
“이렇게 볼 땐 몰랐는데, 참 피곤하신 분이네.”
“가기 전에 관리들과 문화 선생에게 일러두고 갈 테니, 관리들과 장수 세력과
대화는 꾸준히 해 주세요.”
“그 문화 선생 말이네, 진짜 믿을 수 있겠는가? 만일 뒤통수를 치려고 하면
진짜 남양이 모두 넘어갈 수도 있네.”
승태는 노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후가 진짜 변심을 한다면 남양과 허
도 모두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는 일이었지만, 승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저는 장 장군이나 가 선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을 믿는 것입니
다. 장 장군의 세력에 언제나 양초가 부족한데도 후원자나 다름없는 유표는
장 장군에게 세력이 클 수 있도록 충분한 양초를 주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우리를 쳐서 세력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원소가 공손찬을 무너트렸으니, 반드시 움직일 것이네. 유표도 분명
움직일 것이라 보는데.”
“유표는 욕심은 많은데 결단력도, 능력도 없는 인물입니다.”
노숙은 유표를 본 적이 없었기에 승태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승태도 유표와
대화나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의심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홀로 형주를 평정한 인물이네. 그런 인물이 결단력과 능력이 없다
니···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그리고 욕심이 많았으면 원술처럼 칭제를 하거나
허도를 이미 치고 나왔을 텐데 말이네.”
‘유표는 조선의 선조 같은 인물이지. 자신의 한계점을 알고 선을 잘 긋는 것
과 호족들을 다루는 것 하나만큼은 진짜 따라올 자가 없으니까 말이야.’
원술은 자신의 군사적인 재능을 자만하고 직접 전장에 나와 연전연패했지만,
유표는 자신의 선을 알기에 앞에 호족들을 앞세워 군공을 세우고 호족들과 외
세를 이리저리 움직여서 형주 내에서 만큼은 강력한 권력을 누렸다.
유표가 선을 잘 긋는다고 하여도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황실에 보내야 하는 조공을 이런저런 핑계도 대기도 하며 이후에는 아
예 보내지 않았다. 또한, 유표는 황제와 의복, 음식을 똑같이 행했으며 천지
에 제사를 지내는 등 황제 흉내를 원술만큼이나 많이 낸 인물이었다. 원술과
달리 공표만 하지 않았을 뿐, 황제나 다름이 없었다. 아마 후일, 손권처럼 기
회만 있었다면, 외왕내제 정도는 할 욕망을 비추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과 별개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어 군권은 완벽히 주지 못하고
딱 수비를 할 정도의 병력만 내주었고, 세력의 확대는 강적에 대한 도전보다
는 남쪽의 이민족을 상대하는 데 집중하였다.
‘완벽한 복지부동(伏地不動, 땅에 배를 대고 움직이지 않음)이지. 공무원을
하면 참 잘할 텐데 말이야. 의전 받는 것 좋아하고, 정치질 잘하고··· 쩝.’
“역적인 원술과 다른 점은 정치력 하나만큼은 박수를 칠 만하다는 것 정도죠.
그러나 그 군공은 모두 휘하의 호족들이 가져갈 것이지 본인이 한 것은 아니
었습니다. 세가 작았으면 상관이 없겠으나, 일정 이상의 군세를 내주고 자율
을 주어야 할 장수들을 믿지 못하여 감시하고 통제하는데, 커질 수 있겠습니까?”
승태는 상신된 이전의 죽간에 적혀 있는 훈련 같은 전투들을 보이며 말했다.
“이 정도만 하여 우리와 손을 잡은 것이 알려지지만 않으면, 유표는 딱히 움
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알려지면 우리보다는 장수가 더 위험할 테니, 뭐
우리야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노숙은 침음성을 내며 승태를 바라보았다.
“흐음, 자네는 참 대단하군. 앉아서 천 리를 보는 것 같으니 말이야. 매번 업
무에 대하여 빈둥거릴 때는 그냥 한량 같은데···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계책을 생각할 때는 사람이 달라 보이는군.”
그 말에 승태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제가 형님이나 뭐, 진 선생 같을 정도로 하겠습니까? 그냥 그 사람에 대하여
짜 맞출 뿐이죠.”
“알았네. 여튼 자네가 말한 대로 하지. 잘 다녀오시게. 그리고 꼭 돌아오고.
괜히 이상한 일에 엮여서 늦게 오지 말고. 나 혼자 일하는 것은 힘이 드니 말
이야.”
“그거야 제 마음대로 됩니까? 다 하늘의 변덕이죠. 저도 그런 거 원치 않습니
다.”
“하긴··· 자네가 있는 곳마다 천재(天災)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는 하지.”
“그런 말 마십쇼. 안 그래도 이번에 조정에 올라가서 무슨 일이 터질까 걱정
스러운데.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다시 올 겁니다.”
“부디 그러도록 빌어 주지.”
***
공손찬의 목이 허도의 사공부에 도착했다. 아니,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조조는 원소가 공손찬을 물리치고 하북을 평정한 선물이라며 보내온 함을 열
자마자 그 자리에서 부들거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공손찬의 머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머릿밑에 들어 있는 죽간들 때문이었다.
그 위에 적힌 것은 자신의 서필이었다. 저것이 보이지 않았으면, 아마 조조도
웃으면서 원소가 선물을 보냈다고 공손찬의 머리를 들고 다녔을 것이었다.
조조가 공손찬의 머리를 두고 빤히 보고 있자, 몇몇 관리들이 눈치채고 서로
눈을 마주치며 뭔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유비가 나서 물었다.
“조 사공,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에 원소군의 사신으로 온 인물이 외쳤다.
“하내태수 장양을 죽인 조조에 대하여 죄를 묻고자 하니, 대소 신료들은 여기
공손찬과 같이 되고자 하지 않으면 조조를 참하고 황제를 받들어 업성으로 오
라!”
사신의 말에 허저가 분노하여 칼을 뽑으려 했으나, 조조가 말리며 말했다.
“그만!”
조조는 웃음을 지으며 사신에게 함을 내어주었다.
“본초에게 전해 주겠는가? 내 실수가 있는 것 같으니, 대화를 한번 해 보자
고. 우리가 그동안 함께해 온 일이 있는데, 본초가 어찌 그리 쉽게 나를 생각
하겠는가?”
사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조조를 떨치려 했으나, 이내 원소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 떠올랐다.
니겠는가?]
사신은 예를 표하며 조조에게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죄가 있으니 대장군께 이를 상신하여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
지 자숙하고 지내소서.”
원소의 사신이 힘차게 일어나 다른 눈치도 보지 않고 사공부를 나가자, 조조
는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휘청거렸다. 이에 순욱이 나아가 그를 허저가 가져
온 의자에 앉혔다.
“아직··· 아직은 아니 되는데······.”
승태는 허도로 가는 도중, 사마의가 어째서 허도로 급하게 움직이게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허도로 가는 게 따로 명이 내려오거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공의 심기를 달래 주기 위해 가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사마의의 말에 창희는 굉장히 불편한 표정을 띠었다.
“주공께서 사공의 옆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조 사공이 뭐라고 이렇게 달려가서 비위를 맞추어야 한단 말인가? 주공, 돌아가시지요.”
승태는 고개를 저으며 사마의를 바라보았다.
“이유가 있을 것이네. 그런 단순히 그런 것뿐이라면 중달이 그리 말했겠는가? 한 번 들어나 보지. 어차피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사마의는 승태에게 예를 표하고 말을 이었다.
“허도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공손찬의 목이 원본초 사신의 손에 들려 오자, 수많은 허도의 관리들이 하야를 결정하고 지방관들도 조 사공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 말에 창희가 더욱 분노하여 사마의의 말을 끊고 말했다.
“그러니 조 사공에게 왜 가느냐 이 말이오. 아니, 이제 궁지에 몰린 인물 아닌가? 백만대군, 그 원소의 백만대군이 이제 내려올 텐데. 응. 복수를······.”
승태는 창희의 말을 끊어 내었다.
“창 도위! 그리고 집안의 어른인 조 사공을 어찌 버리겠는가! 그리고 사마 현령이 말을 하는데 그렇게 끊으면 어찌하는가?”
창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승태는 손을 흔들어 사마의가 말을 이어 가게 했다.
“다른 이들이 조 사공께 마음을 돌릴 때 주공께서 옆에 서 계시면, 그 위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 이리 급히 말을 전한 것입니다.”
사마의의 말에 승태는 크게 동의했다. 모두가 떠나갈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옆에 서 있다면, 과연 그를 잊을 수 있겠는가? 같은 이유로 이 시기에 가후도 장수에게 조조를 따를 것을 종용했다.
“주공께서도 어떻게 해서든 서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마의의 말에 승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주로 가든 안 가든, 어떻게든 조조의 믿음을 얻어야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조조는 휘하의 장수들과 사람들을 두고 편 가르며 공을 경쟁하게 만들었으며 사병을 계속 소진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아마 이 정도 믿음이라면, 하북이 정리되고 조조가 위공이 된다고 해도 삼공의 자리는커녕 정후(亭候)에 오르기도 어려울 수도 있지.’
둘째가 여포의 작위를 물려받아 현후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그것보다 못 받으면 진짜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이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지.’
***
허도에 승태의 무리가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조부의 내부에서도 놀라고 기뻤는지 직접 사람을 보내어 승태와 휘하 장수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아마도 서주의 장수들에게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승태와 장수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순욱도 허도에 승태가 도착한 날에 직접 몸을 움직여 승태의 저택에 오겠다고 하인을 보내니, 승태의 달라진 위상이 사마의의 말대로 느껴졌다.
전원(前原)으로 나오는 계단에 걸터앉은 승태는 사마의와 함께 말린 과일을 먹으며 순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달.”
“예, 주공.”
승태는 과일을 우물거리면서 멍하니 문만 바라본 채 사마의에게 물었다.
“이런 상황들 말이네, 자네는 예상했는가?”
“글쎄요. 어느 정도 호응을 받을 것을 예상은 했는데, 상서령이나 사공께서 이렇게 움직일 것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경조윤은 어떠하시던가?”
“말도 못 꺼냈습니다. 어휴, 혼나기만 엄청 혼났습니다. 그뿐인가요? 형님에게도 혼났으니··· 다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승태는 사마의의 말에 말린 과일을 쥐여 주며 말했다.
“경조윤께서는 아직 정정하신 모양이군.”
사마의는 치가 떨린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말린 과일을 입에 넣고 말했다.
“어휴, 말도 마십쇼. 안 그래도 혼날 때 커다란 물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식겁했습니다. 그것을 맞았으면 진짜 며칠 집에 누워있게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상서령은 왜 온다고 하시는 것 같은가? 솔직히 조 사공께서는 예상이 되는데, 상서령은 이해가 잘 안 되거든.”
“뭐,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은 드는데··· 혹시나 진짜 다른 이유라면 말입니다.”
사마의가 무엇을 말하려는 순간,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승태는 급하게 일어나서 달려가 문을 직접 열었다.
문을 열자, 밖에는 순욱이 호롱불을 들고 있었다. 승태는 설레발을 치면서 호롱불을 뺏어 들고 물었다.
“하인이라도 같이 오시지, 혼자 오셨습니까?”
“내 몸도 정정한데, 굳이 그러겠는가?”
승태는 입술을 핥으며 사마의와 순욱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쭉 집어넣고 입을 닫았다.
‘허도 치안이 난장판이니까 그렇지. 조 사공도 그렇고, 황제도 그렇고, 치안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자기들 몸보신하려고 쓰는데, 치안이 지켜지겠냐? 저번에는 불도 났다며?’
승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허도의 치안을 챙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정도의 사병이 있다면, 저 자신을 보호하기 바쁘거나, 다른 이들을 호시탐탐 노릴 뿐이었다.
‘가장 높은 곳의 조조와 헌제가 그 모양인데, 누가 먼저 치안을 지키자고 나서겠냐?’
정치와 권력에 미쳐 버린 인간들밖에 없었고, 조조의 허도는 스스로가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야만의 땅이었다. 그런 땅에서 상서령이 혼자 돌아다닌다? 이상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호롱불을 들고 살포시 문을 닫기 위해 몸을 빼내었을 때, 승태는 저 멀리 몇몇 인형(人形)들을 볼 수 있었다.
‘역시 혼자는 아니었네.’
승태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순욱에게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나중에 조 사공이 부르시고 부르시지요. 아니면 조 사공의 연회에서 뵙거나요.”
“중한 이야기라 그러네.”
순욱의 말에 중달이 예를 표하며 물었다.
“제가 그럼 주변의 이들을 모두 물리도록 할까요?”
“좋네. 하지만 자네도 들어야 하니 전하고 오도록 하게.”
사마의가 예를 취하고 사라지자, 승태는 순욱의 걸음에 맞춰 후원으로 안내했다.
“집이 넓지 않아 후원의 작은 정원에서 대화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가세.”
자리를 옮기고 나서 잠시 후, 사마의가 돌아오자 순욱이 승태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자네들, 혹여 폐하의 조칙을 받았는가?”
승태와 사마의는 깜짝 놀라 바라보았고, 순욱은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받았나?”
승태는 손사래를 저으며 순욱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뭐 폐하와 만날 일도 없거니와 그런 일이 있으면 조 사공께 달려갔을 겁니다.”
그러자 승태를 바라보던 순욱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물었다.
“그런가? 알았네. 혹여나 그런 일에 괜한 관심일랑 가지지 말게. 그리고 자네가 안다고 하니 묻지. 경조윤께서는 어떤가?”
승태는 사마의보다 먼저 나서서 말했다.
“상서령께서 어디까지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저희도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어 이리 여쭙고자 합니다.”
승태의 모습을 스윽 바라보던 순욱은 콧등을 문질렀다. 뭔가 많이 언짢은 느낌이 들었다.
“자네,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군.”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제 주변의 사람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나도 그럴 뿐이네. 이미 조 사공의 귀에 들어간 일인데, 더는 누군가가 참여하여 조정에 피를 뿌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네.”
승태는 순욱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상서령의 말을 믿겠습니다. 하온데 이미 조 사공께서 알고 계시다는 것은······.”
“곽 좨주가 이미 판을 짜 놓았다는 것이네.”
승태는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 났군. 일이 났어.’
승태는 차마 순욱에게 사실을 털어놓기 어려웠다. 순욱이야말로 조조와 가장 친한 사람이 아니던가. 약간 마음에 가는 것은 순욱이 후일 헌제와 복황후가 조조 암살을 하려 했을 때, 순욱이 그 일을 덮으려 했다는 일이 있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문구를 믿기에는 확신이 조금 부족했다.
순욱은 눈을 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승태를 바라보았다.
“제아야, 나는 명공이 불충하고 불효한 길 위에 가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중에 이 일도 포함이 된다. 명공만이 한을 다시 세울 것인데, 명공께 그런 길을 걷게 만들 수 없지 않겠느냐.”
승태는 그런 순욱을 마주 바라보았다.
“폐하를 막으시는 것이 빠르지 않겠습니까?”
순욱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어나야 할 일이네. 작금의 허도와 같이 계속 명공과 폐하가 대치한다면, 어찌 원소를 이길 수 있겠나.”
순욱도 아마 허도의 작금의 상황을 좋게 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순욱이 선택한 것은 헌제가 아니라 조조였다. 원소를 상대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말이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상서령께서는 그런데 어찌하여 이리 움직이십니까? 차라리 대신들이 움직이는 것이 조 사공께서 바라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아닐 것이네. 조 사공께서 인재를 아끼는데, 어찌 충의를 위해 움직인 이들을 처단하려 하겠는가? 단지 시세를 잘 보지 못하는 이들일 뿐이네. 처리할 이들은 처리해야겠지만, 구할 수 있으면 구해야지.”
승태는 순욱이 원하는 바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순욱은 어째서 조조를 선택했을까? 순욱의 눈에는 조조가 누구의 말에도 경청하며 어떠한 흠이 있더라도 그자의 말이 옳다면 그의 말의 서서 지지해 주는 거대한 거인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순욱은 조조를 단순히 야심가, 천하인을 넘어 유학의 몽상 상징을 다시 이룬 인물로 만들고 싶던 것 같았다.
그리고 순욱은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황실과 조조의 곁에서 저울질하며 서로의 욕망을 조율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끝에 조조를 권신임에도 충의를 저버리지 않는 인물로, 유교의 신앙과 같은 주문공(朱文公)을 현실에 다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이다.
‘비록 그 끝은 빈 찬합이겠지만, 당신이 나를 돕는다면 나 또한 그대를 돕겠습니다. 죽지 않도록 말입니다.’
“상서령.”
“무슨 일인가?”
승태는 옷을 정제한 뒤, 예를 표하면서 상서령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서령께서 경조윤과 태위를 구해 주시면, 저는 이 모든 것을 상서령의 은혜로 생각하고 평생 이를 가슴 깊이 품겠습니다.”
승태의 갑작스런 모습에 사마의와 순욱 모두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욱은 승태를 일으키려 했으나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이 조제는 능력도 부족하고, 권위도 부족하며, 인맥도 없습니다. 하여 저를 따르는 중달의 부공과 친우인 덕조의 부공께 말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서령은 다를 것입니다. 부디! 부디 두 분을 구해 주십시오.”
승태가 넙죽 부복하자 순욱은 어깨를 잡아 일으키려 했으나,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답해 주시기 전까지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내가 당연히 할 일이네! 어찌 그러는가?”
“이 조제가 방도를 몰라 움직이지 못했으나 믿을 수 있는 분이 직접 몸을 움직이시니, 이리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서령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소인, 다 하겠습니다.”
승태는 입으로 다하겠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입에 발린 소리였다.
이번 일에 승태가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조조의 계획을 망치거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기에 순욱은 승태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위에 한 말이었다.
‘순욱이 진짜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이 정도 무릎 꿇는 게 일이겠어? 나 대신 직접 발로 뛰어서 일해 줄 텐데.’
이내 승태가 머리를 세워 예를 취하자, 순욱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능력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군자의 길을 가니, 내 너의 후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구나.”
“제가 무슨 군자의 길을 가겠습니까? 소인으로 그저 저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다치면 저 또한 위험하니, 그들을 구하고자 할 뿐입니다.”
순욱은 승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소자는 그리워하며, 친우는 믿고 늙은이에게는 안심을 주니(德不孤 必有隣, 少子懷之, 朋友信之, 老者安之), 자네가 가는 그 길은 큰길이지 않겠는가?”
순욱의 칭찬에 승태는 속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군자도, 그렇다고 해서 선자(善者)로 남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순욱의 착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승태는 입을 닫고 순욱의 착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기다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