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My Beloved, I Present You My Ecstatic Nightmare RAW novel - Chapter (202)
사랑하는 당신에게, 나의 황홀한 악몽을 드립니다 [외전] 11화. 은방울꽃이 하는 말 (11)(202/202)
[외전] 11화. 은방울꽃이 하는 말 (11)2024.06.21.
라일라가 기막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많은 은방울꽃을 그럼 네가 꺾어 왔단 말이야? 알리네, 누가 너를 데려갔었니? 이 주변에는 은방울꽃이 없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은방울꽃을 꺾어 온 거니?”
가만히 입술을 다물고 있던 알리네가 말했다.
“두꺼비 아저씨의 집에서요. 그 집에 아주 예쁜 아기 침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기는 어른이 돼서 떠났고 아주머니도 떠났대요. 두꺼비 아저씨가 불쌍했어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낯선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라일라는 몹시 긴장했지만, 알리네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오히려 즐겁게 놀고 온 아이처럼 양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저씨는.”
알리네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은방울꽃이 핀 풀밭을 발견한 게 어머니라고 했어요.”
그 순간 라일라의 눈이 조용히 깜빡였다. 그러더니 바닥에 널린 오종종한 흰 꽃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굽은 각도가 크지 않고 꽃들도 썩 탐스럽지 않지만, 작고 귀여운 방울들이 매달린 듯한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알리네가 말했다.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전해 주라는 말이 있었어요.”
“전해 주라는 말이라니?”
고개를 갸웃한 알리네가 말했다.
“어머니는 행복해질 거라고 했어요. 어머니의…… 고통은 끝났고, 릴리트라는 사람이 어머니를 축복했으니 사랑을 배우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어요.”
알리네의 말을 듣고 있던 라일라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그녀에게 그런 말을 전할 만한 사람, 그것도 알리네가 ‘아저씨’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를 가졌던 남자를 떠올렸다.
알리네가 말했다.
“아저씨가 떠나면서 알려 주길 자기 이름은…….”
“바딘.”
이번에는 알리네가 눈을 땡그랗게 뜨며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딘이라니. 라일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악마에게 있어 ‘사라진다’는 것이 별 의미 없는 단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가 완전히 사라져 안식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딘은 어떤 형태로든, 어디에든 존재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알리네를 데려가 라일라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눈앞에 있기만 했어도 이게 무슨 짓이냐며 무릎을 걷어찰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딘이 너를 어디로 데려갔니, 알리네?”
“그 아저씨의 집으로요.”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알리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작은 집이었어요. 나무와 마른풀과 우유를 바른 것 같은 유리창이 있는 집. 거기에는요, 어머니. 아주 커다란 솥도 있었어요. 그리고 낡은 침대도 있고 마른 풀잎들이 벽에 걸려 있었어요.”
어린아이가 옹알이를 하듯 두서없이 늘어놓는 설명이었지만 라일라는 그 풍경을 정확히 눈앞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가 살다가 떠나온 집. 그녀의 어머니와, 또 그 위의 어머니, 최초의 마녀 릴리트가 바딘에게 속아 그를 사랑하는 남자라 착각하고 살았던 바로 그 집이 틀림없었다.
“바딘이 왜 너를 그곳으로 데려갔지, 알리네?”
“몰라요.”
알리네가 말했다.
“보여 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어요. 보석 상자를 자랑하는 것처럼요.”
“보석 상자라고?”
“두꺼비 아저씨는…….”
알리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집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무척 좋아하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아기 침대를요.”
“정말로 아기 침대가 있었니?”
“있었어요. 아기는 없었지만. 비둘기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었어요.”
어쩌면 그것은 릴리트가 바딘의 아이를 낳았을 때 사용한 침대였는지 몰랐다. 라일라가 썼던 침대는 엄밀히 말해 아기용 침대가 아니었고 비둘기 모양의 구멍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그는 눈앞에 두고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아이가 그리워서 그곳에 오랜 과거의 허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허무함과 집착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나뉘는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놓치면, 가지지 못하면 죽을 것 같던 것이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도 않게 잊혀지는 것처럼.
그 남은 자리는 뻥 뚫린 구멍이 되어 잠시 허무감에 시달리게 되지만, 곧 또 다른 무언가가 빈자리를 채우게 되기 마련이었다.
인간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간다. 강렬하게 원했던 것을 언젠가는 잊을 수 있는 능력. 그 망각의 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는 가장 훌륭한 축복이요 행운이리라.
바딘은 인간이 아니기에 그 능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릴리트를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고 말했던 것이었다.
— 사랑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지.
— …….
—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기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말았구나.
그 아기 침대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릴리트가 바딘의 비밀을 알기 전에? 혹은 안 후에? 어쨌든 바딘은 그곳에 아기가 누워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도 그의 공허함을 부추겼을지 몰랐다.
“바딘이 널 어떻게 거기까지 데려갔니?”
그러자 알리네가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늘을 걸어갔어요!”
“……하늘을 걸어갔다고?”
“응, 정말이에요. 아저씨 손을 잡고 걸었더니 하늘을 걸을 수 있었어요. 집들은 상자처럼 작고 길도 아주 가늘었어요. 어머니가 제 양말을 떠 주시는 실 같았어요.”
사라지지 않은 바딘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라일라는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면 문전박대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립고 보고 싶냐 묻는다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라일라는 바딘을 아버지라 생각하지 않지만, 바딘은 여전히 라일라를 자신의 딸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니 알리네에게도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렇다면 나이 든 영감님의 주책 같은걸.’
라일라가 생각했다.
“어머니.”
“응?”
“은방울꽃 안 예뻐요?”
알리네가 바닥에 흩어져 있던 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하룻밤만 지나면 죄다 시들어 버리겠지만, 알리네가 어찌나 조심조심 가지고 왔는지 꽃송이나 줄기는 하나도 상한 것이 없었다.
“나를 위해서 가져온 거니?”
“어머니가 발견한 풀밭에서요.”
알리네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는 아주 오랜만에 본 은방울꽃을 만지작거리다가, 그중 하나를 알리네의 귓가에 꽂아 주며 말했다.
“당신은 반드시 행복해질 거랍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알리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꽃이 전하고 싶어 하는 말이란다.”
라일라가 말했다.
“당신은 반드시 행복해질 거랍니다.”
이해를 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알리네는 생긋 웃으며 라일라를 꼭 안았다. 동그랗게 부푼 배에 귀를 대고 있던 알리네가 은방울꽃 두 송이를 주워 라일라의 배에 살그머니 가져다 대었다.
“너희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란다.”
라일라는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라일라! 알리네!”
다급한 유스타르의 목소리가 모녀의 조용하던 시간을 탕! 하고 두드렸다. 알리네는 라일라의 배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별안간 까르르 웃었다.
“아버지 머리가 엉망이 되었어요.”
한숨을 내쉰 유스타르가 이마를 짚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날 겁주기로 두 사람이 작당한 건 아니겠죠?”
그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는 라일라, 이번에는 알리네. 알리네, 대체 어디를 다녀왔지? 모두 놀라서 제정신이 아니야.”
“두꺼비 아저씨랑 같이 하늘을 걸었어요.”
알리네는 꽃 두 송이를 여전히 라일라의 배에 대고 이리저리 쓸면서 말했다. 작은 몸이 스르르 처지고 연신 하품을 하는 것을 보니 졸음이 오는 모양이었다.
“두꺼비 아저씨라니……. 알리네, 아버지가 뭐라고 했지? 분명 말하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았니?”
커다란 연둣빛 눈을 천천히 굴린 알리네가 자는 체하며 눈을 감아 버렸다.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유스타르가 실소를 터뜨리자 라일라가 말했다.
“바딘을 만났다고 해요.”
유스타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라일라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가 또 이곳으로 올 줄은 몰랐어요.”
라일라가 말했다.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거기 머물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들은 바로는 외손녀 팔불출인 것 같던데요.”
유스타르가 슬쩍 툴툴거렸다.
“알리네에게 두꺼비를 보여 줬다 하더라고요.”
라일라가 짧게 웃는 소리를 내었다. 바딘이 하지 않을 법한 일이었지만, 또 알리네에게라면 그런 우스운 짓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밀리아의 신발과 함께 묻어 주어야 하겠어요.”
라일라가 은방울꽃 하나를 집어 들며 말하자 유스타르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밀리아가 누구죠?”
“내가 만난 아이요. 그 아이의 구두를 가지고 왔어요. 왕성의 석류나무 아래에 묻어 주려고요.”
라일라는 맑은 구슬 같은 꽃송이들에 둘러싸여 새근새근 잠든 알리네를 내려다보았다. 이 아이의 미래에는 행복만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두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언젠가 밀리아가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게 된다면, 그 아이 역시 행복하게 살 것이었다. 무엇으로 태어나든지.
‘행복을 빌어 주는 것은 결국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사슬 같은 것일까?’
라일라가 생각했다. 자신에게도 그런 사슬이 있었던가? 이따금 침대에 누워 자는 체하던 라일라의 뺨을 쓰다듬던 손길. 흙과 약초를 만지고 다듬느라 거칠어진 손끝이 라일라에게는 어머니가 남겨 준 사슬이었다.
그럼 자신은 무엇을 남겨 줄 수 있을까. 알리네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그리고 유스타르에게.
반드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애타는 고민을 마음속으로 접어 넘긴 라일라가 유스타르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알리네와 라일라, 그리고 유스타르까지 세 명의 가족은 방 안 가득 흩뿌려져 향기를 내뿜는 은방울꽃 사이에서 잠이 들었다.
내리는 비처럼 깨끗하고, 부드러운 대지처럼 달콤한 잠이었다.
–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