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01)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01화(101/325)
< 101. 할 일이 태산 >
“이제 왔나?”
컴프턴이 국왕의 내실(privy chamber)로 돌아오니, 내실을 지키는 귀족들은 아직 한가로이 뒹굴고 있었다.
컴프턴을 포함한 이들은 모두 국왕의 수발을 드는 귀족이다. 이런 흐트러진 자세를 취한다는 건,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는 뜻이고.
“전하께서 아직 안 돌아오셨나 보군.”
“크롬웰과 얘기 중이시네. 오늘은 조금 늦으실 것 같던데? 식사도 그쪽에서 하고 오신다는 전갈이 있었고.”
“그런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침실부터 준비하도록 하지.”
“굳이 벌써부터…..”
“미리 해놓으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잖은가. 어서 일어나게.”
컴프턴이 재촉하자, 귀족들은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대 정돈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두 명이 횃불을 들고 조명을 대주는 동안, 컴프턴은 침구 하나 없이 헐벗은 침대 위로 올라갔다.
짚으로 만든 매트리스에 혹여나 습기가 차지 않았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 검으로 매트리스를 군데군데 찔렀다.
혹여라도 숨어있을 암살자에 대비한 절차다.
“됐네.”
확인을 마치면, 침대의 모서리에 서 있는 귀족들이 침대보를 씌운다. 그러면 한 명의 귀족이 침대 위에 누워서 데굴데굴 구른다.
혹여나 매트리스 안에 흉기가 숨겨져 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침구와 베개를 모두 정돈하고 나면, 국왕의 손이 닿는 거리에 검을 걸어둔다. 머리맡 바닥에는 전투용 도끼를 배치한다.
한밤중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침입자를 대비한 절차다.
“됐네.”
마지막 확인을 마치면, 허공에 십자가를 그리고 침대에 입을 맞춘 후, 성수를 뿌린다.
침대 커튼을 닫고, 국왕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걸칠 새빨간 모피 가운을 침대 옆 의자에 두고. 침대 한쪽에는 요강을 마련해 두면, 일단 침실 정리는 끝이다.
“그러면 잘 부탁하네.”
두 명의 귀족은 국왕이 도착할 때까지 침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려야 한다. 침대를 지켜야 하니까.
그리고…..
이 일을 마치면 이들은 한동안 할 일이 없어진다.
“카드나 할까?”
“또?”
“책은 읽기 싫고……”
“……”
“……”
매일 보는 얼굴끼리 몇 년 동안 카드놀이를 해왔으니, 이제는 서로의 수를 빤히 알고 있어 도통 재미가 없다.
“왕비 전하는 조금 어떠시던가?”
그래서 밤이면 항상 모여서 수다를 떨게 된다.
“몸은 많이 회복하셨더군. 아직 얼굴이 창백하고 야위긴 했지만.”
“그러면 한동안 연회는 없겠군.”
“하아…..”
몇 명의 젊은 귀족들이 실망감에 고개를 떨궜다.
기본적으로 햄프턴 코트 궁전은 삭막한 남자 소굴이다. 이곳의 유일한 꽃밭은 왕비와 왕비의 시녀들이 있는 곳이고.
“그렇게 심심하면 내일 알현실을 가보던가.”
“이 사람아, 그러다가 왕비 편이라고 오해를 사면 어쩌나.”
알현실에서 시녀들과 시 낭독을 하면서 놀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간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왕비가 언제까지 왕비일까 하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전하께서는 시무어를 마음에 두신 걸까?”
“그냥 놀이 아닐까? 왕비를 얻기 위해 로마에 대항하기까지 했는데.”
시무어는 국왕이 요즘 구애하고 있는 시녀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국왕은 기사도에 대한 환상이 있고, 여느 기사가 그렇듯 레이디를 모시고 구애하는 놀이를 좋아하니까.
원래라면, 이런 놀이는 한때의 장난으로 넘기겠지만…..
현 왕비가 위험한 문을 열었다.
놀이가 놀이가 아니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심어둔 것. 모두의 마음에.
후계자가 없다고 왕족 출신의 왕비를 내쳤는데, 고작 귀족 출신의 왕비를 내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녀 역시 정당한 후계자를 낳지 못했으니까.
‘결국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지.’
딱히 불린에게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전대 왕비에게 불린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을 떠올리면, 벌을 받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시무어지? 그녀는 유흥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전하처럼 활발한 분이 고른 레이디치고는 너무 평범….”
“그래도 그 집안은 아이가 열 명이나 되지 않나.”
“왕비 전하 집안 역시 아이는….”
“섣부른 말 하지 말고.”
입이 가벼운 귀족 한 명이 위험한 발언을 하기 시작하자, 컴프턴은 근엄한 얼굴로 다그쳤다.
궁에서는 한 말은, 언제 어디서 누가 들을지 모른다. 어떻게 왜곡될지 모르고.
아직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모르는데, 지금은 모든 선택권을 열어둬야 한다.
“그나저나, 오늘 왕비 전하와 함께 식사했는데, 양고기 왕관을 만든 요리사가 전하의 주방으로 옮겼다더군.”
컴프턴은 조금 덜 위험한 주제로 대화를 유도했다. 마침 입이 근질근질했던 참이었고.
“신비한 마법을 부리는 요리사더군. 자네들은 설탕으로 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런 게 어딨나, 이 사람아.”
“진짜 있대도. 설탕으로 실도 만들 수 있네. 천사의 머리카락같이 가느다란 실인데, 우리가 먹는 설탕보다 수백 배는 달지. 정말 신기한 마법을 부리더란 말일세.”
컴프턴은 저녁에 먹었던 맛을 최대한 열심히 설명했고, 귀족들은 단어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중하면서 듣고 있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런 요리를 영국인 요리사가 한다고?”
같은 내실에서 일하는 귀족 중 한 명인 위튼이다.
그는 몇 년 전, 이탈리아반도에 있는 페라라(Ferrara) 공작령에 들렸다가 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게 하필이면, 전 유럽에 소문이 자자한 알폰소 데스테(Alfonso d’Este) 공작의 연회였다.
그래서인지, 요리나 연회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물지 못한다.
“글쎄 60센티 높이의 설탕 조각상이 스물다섯 개가 세워져 있는데,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색을 칠해놨더란 말이지. 헤라클레스와 네미아의 사자 전투를 그리는 조각상인데, 그렇게 생동감 넘치는 조각상을 본 적이 없다니까. 게다가 거기 파이는 한없이 부드러운 깃털 같은 크림이 가득 차 있는데, 위에 요정 가루 같은 설탕 가루를 뿌리지. 코스도 무려 아홉
개가 나왔는데, 독일식 요리부터 터키식 요리까지, 전 세계 진미가 다 나와…… 심지어 중간에 사람이 다섯 명이 들어갈 법한 거대한 파이가 나오는데, 세상에, 그걸 열어보니까 온갖 보석이 쏟아져 나오는 것 아닌가. 그때, 공작이 웃으며 말했지. 손님 중에 제비를 뽑아서 당첨되는 사람이 저 보석의 주인이라고…..”
벌써 몇 번을 듣는지 모르겠지만,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역시 교황령은 다른가…. 베네치아 쪽의 연회도 화려하다고 듣긴 했는데.”
“그러게. 그에 비하면 아직 영국은….”
그런 소리를 주고받는 도중에 갑자기 하인이 한 명이 급하게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혹시 방금 얘기를 국왕이 들은 건 아닐지 조마조마했지만,
“피곤하군. 바로 침실로 들도록 하지.”
다행히 방안에 들어온 국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둘러 국왕의 탈의를 도와주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면서 컴프턴은 후회하기 시작했다.
‘괜히 음식 얘기를 꺼냈네.’
배가 고파왔다.
위튼이 말한 페라라의 연회 때문도 있지만…. 백 번 들어도 남에게 들은 것보다 직접 먹은 요리가 강렬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먹은 갈색 설탕이 맛에서 밀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강렬한 갈색. 끈적끈적한 달달함은 머릿속에 끈질기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일어나고 나서도.
심지어는 다음 날 아침, 국왕의 변소에 함께 들어갈 때도.
‘이런 와중에도 먹고 싶어지다니.’
최대한 국왕이 불편하지 않게, 일을 보시는 동안 시선을 바닥에 두면서도 설탕 유리 생각만 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모처럼 국왕과 단둘이 있는 자리.
어떻게든 환심을 사야 한다.
“전하, 오늘은 뭘 하실 건가요?”
“글쎄…”
“오랜만에 승마라도 하시렵니까.”
“아니, 그건 됐네.”
국왕은 운동을 좋아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데다가, 운동은 남성미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분이시다. 마상 창 시합도, 테니스도, 사냥도 즐기시지만,
“아직도 다리가 아프십니까.”
“끄응….”
몇 주 전, 낙마사고 이후로 도통 밖을 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가. 신경질도 늘었다.
툭하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컴프턴은 한동안 여러 주제를 던져가며 국왕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국왕이 말이 없었다.
“성 마티아스의 연회가 언제였지?”
한참을 침묵하던 국왕의 입에서 뜬금없는 질문이 나오자, 컴프턴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연회 얘기라니…..
설마, 어제 얘기를 들은 걸까?
“2월 24일입니다.”
“그때 설탕 조각을 제대로 만들라고 페로에게 전달해. 최대한 대륙에 밀리지 않는 거로 만들라고. 비싼 돈 받는데 그 정도는 하겠지.”
페로는 프랑스에서 데려온 요리사다.
영국보다는 유럽 대륙의 문화와 요리를 잘 알기도 하고.
이로써 확신이 들었다.
국왕은 어제의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상했다.
안 그래도 지기 싫어하는 국왕인데. 사이가 나쁜 교황령 귀족의 요리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위튼에게 연회 전체를 맡으라고 하고. 그만한 경험이 있으니까 뭘 해야 할지는 잘 알겠지.”
젠장.
위튼 같은 얄미운 놈에게 이런 역할을 넘기면 안 된다.
국왕이 업무를 주면, 국왕과 가까워진다. 자신 외에 다른 귀족이 국왕에게 다가가기 시작하면…… 지금 이 자리를 빼앗기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 전하. 사실은 제가 얼마 전에 정말 신기한 설탕 요리를 먹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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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나.”
한길이 왕비의 주방으로 출근하자, 못마땅한 얼굴로 맞이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왕비의 주방에서 마스터 쿡을 맡고 있던 파커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소식을 이미 전달받은 모양이었다.
“네, 오늘부터 이 주방의 마스터 쿡을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한길은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마스터 쿡이라는 자리에 오르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하루아침에 그 자리를 빼앗겼으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새로 오신 마스터 쿡은 점심으로 무엇을 만드시려는 예정이신지?”
하지만 파커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와 태도에 바로 ‘실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굽히고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주방에서 가장 곤란한 건, 말을 안 듣는 요리사다.
왕비의 밥상에는 매 끼니 서른 개의 요리가 올라간다. 말을 안 듣는 요리사를 두면서 일할 수는 없다. 일부러 실수를 하거나 요리를 망치려고 하는 요리사는 더더욱 곁에 둘 수 없고.
심지어.
조만간 국왕을 위한 밥상을 차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미안한 마음과 별개로, 이 주방의 주인이 누군지는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갑작스레 배정되어서 점심 메뉴는 따로 준비 못 했는데. 파커, 자네가 원래 만들려는 메뉴는 뭐였지?”
“……”
한길은 서둘러 태도를 바꾸고 파커에게 질문했지만, 파커는 침묵을 유지했다.
“나와 함께 일한 적 없으니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의사소통을 가장 중요히 여기지.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다른 주방으로 옮겨도 되고.”
이 정도까지 말하고 나니, 파커는 마지못해 메뉴를 읊기 시작했다.
“양고기 스튜, 와인 소스에 절인 닭고기, 찌르레기 구이, 돼지고기 파이 ……”
역시.
세렝게티 초원에서 한 달간 굶은 사자에게나 바칠법한 육식 밥상이었다.
한길이 작게 한숨을 내쉬자, 파커가 다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왜, 새로운 마스터 쿡께서는 따로 아이디어가 있으신가 보지?”
“일단 돼지고기구이 하나는 빼고, 어제 만든 돼지 탕수육을 만들도록 하지. 길버트, 어떻게 만드는지 기억하지? 네가 맡아.”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리자, 길버트가 우렁차게 답했다.
“닭고기 하나는 빼고 샐러드로 대체하고, 양고기 파이 대신 채소 장미를 올리고, 찌르레기 대신에는 장미 전골을 올리도록 하지.”
한길은 어제 왕비가 식사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고, 그 얼굴 위에 스치는 표정 하나 놓치지 않았다.
왕비는 담백한 요리와 과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아마 지금은 아직 몸을 회복해야 할 시기다.
단백질은 충분하니, 칼슘, 마그네슘, 비타민, 철분을 보충해야 하는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저항을 마주했다.
“냉한 채소를 올린다니, 전하는 드시면 안 되는 음식인 걸 모르나?”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왕비 전하의 마스터 쿡이 된다는 사람이, 갈레노스의 4체액설을 모르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저 멀리 시선 끝에서 길버트가 설명하려는 모습이 보였지만, 한길은 눈빛으로 그를 말렸다.
지금, 이 주방에서.
설령 모르더라도 모르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내 결정에 불만이 많다면 전하에게 직접 말하고, 그럴 용기가 없다면 얌전히 지시대로 따랐으면 좋겠군.”
조금 강하게 말을 했는데, 파커는 정말로 시녀장을 불러서 ‘전골 따위’를 내도 되냐는 질문을 했다.
그리고 왕비로부터 마스터 쿡의 지시를 따르라는 명령을 전달받고 나서야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꼭 처음 오는 인간들이 쓸데없는 도전정신으로 일했다가 망신을 당한다니까. 지가 한번 당해봐야 말을 듣지.”
들으라는 듯이 구시렁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마치 이 전골을 내면, 왕비가 그대로 엎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생소한 요리니까.
그리고 어제저녁, 그는 이 주방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전골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오늘도 장미 전골이 나왔군. 이걸 생선으로도 만들 수 있나?”
“생선이요?”
“육류를 못 먹는 날에도 먹고 싶거든. 가능하면 매일 올리도록.”
왕비의 말을 듣고, 그릇을 내려놓던 파커의 안색이 급격히 변하는 게 보였다.
‘이 정도면 알아듣겠지.’
왕비가 직접 한길의 요리를 인정하는 것을 보고도 계속 딴지를 건다면, 안타깝지만 그를 다른 주방으로 보내야 한다.
새삼 사람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정은 하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길에게도 한길의 입장이 있으니까.
“자네는 왜 안 내려가지?”
다른 요리사들이 모두 주방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길이 남아있자, 왕비가 물어왔다.
“허락만 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과 싫어하시는 음식을 파악하고 보다 나은 요리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왕비는 한길이 이 자리에 있는 걸 원치 않아 하는 눈치였기에, 서둘러 덧붙였다.
“보시다시피, 이 전골은 뜨거워서 엘리자베스 저하께서 직접 드시기에는 위험해 보입니다. 왕비 전하께서 직접 먹여주셔야 할 텐데, 불편하시면 다른 요리를 내겠습니다.”
“아니, 내가 하겠네.”
왕비는 한결 환한 얼굴로 무릎 위에 엘리자베스를 앉히고, 국물을 후후 불며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약점이었다.
서둘러서 아이를 안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새끼 주위를 맴도는 어미 고양이 같았으니까.
저런 사람에게서 몇 년이나 아이를 떨어트려 놨으니,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한 입만 더 먹으렴.”
“싫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제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잘 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편식이 심한 건 정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련한 비장의 무기가 있지만.
“전하, 망치를 드리는 게 어떨까요?”
“망치?”
한길의 말에 왕비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한 그릇으로 향했다.
한길이 어제 밥상에도 올렸던 메뉴.
현대에서는 망치 탕수육이라고도 불리는 메뉴다.
얇은 호밀 전병을 뚜껑처럼 덮어 놓은 요리.
망치로 뚜껑을 깨면, 아래에 돼지고기 탕수육이 나온다. 전병은 얇아서, 어린아이의 힘으로도 충분히 깨질 테고.
“내가 할래! 내가!”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손에서 망치를 빼앗아 들고, 힘차게 호밀 전병을 내려쳤다.
역시 미래의 대영제국 여왕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좋았다.
공주는 바스러지는 전병 뚜껑을 보면서 까르륵 웃더니, 즐겁게 탕수육을 먹기 시작했다.
역시.
아이에게 밥을 먹이려면, 음식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내일부터는 캐릭터 모양의 요리도 내야겠네. 이것도 생각해 두고…..’
왕비의 주방에서 살아남으려면 왕비의 비위도 맞춰야 하지만, 까다로운 세 살배기 아이의 편식을 고쳐줘야 한다.
할 일이 태산이다.
식사를 마무리할 때 즈음, 길버트가 또 다른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이건 뭐지?”
“디저트입니다.”
“디저트?”
왕비는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아마 이 시대에는 디저트가 아직 없다는 뜻일 거다.
“마지막으로 입가심을 하시기 위해 드시라고 마련했습니다.”
“왜 한 번에 내지 않고?”
“그러면 식어버리거든요.”
한길이 마련한 디저트는 간단했다.
살짝 구운 머랭과 따뜻한 라벤더 차.
“라벤더 약? 딱히 두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드시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실 겁니다.”
왕비는 투덜거리면서도 차를 홀짝대며 마셨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이 시기에 왕비는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서 자신의 파멸을 부추기는 행동을 자주 저지른다.
최대한 진정을 시켜야 한다.
옆에 아이가 있다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질 거다. 라벤더처럼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차도 많이 내와서 나쁠 것 없고.
신경질적인 건 영양이나 호르몬의 불균형 때문일 수도 있으니 제대로 먹여야 한다.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은 많다.
왕비의 표정이 흐물흐물 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한길은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조만간 중요한 손님이 오실 것 같은데,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왕비의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지만,
“엄마, 손님 와? 누구? 선물은?”
“그럼, 우리 리지를 위한 선물을 많이 들고 올 거란다.”
아이 앞에서 다시 미간의 주름을 폈다.
“그대는 보지 말아야 할 곳을 계속 보려는 것 같군. 그러다 어깨 위가 가벼워질 수도 있는데.”
한길 역시 정치에는 관심 없다.
하지만, 왕비의 주방에 들어온 이상, 왕비와 한길은 한배를 탄 사이다.
그리고 왕비에게 맡기면, 이 배는 가라앉는다. 아니, 가라 앉는 게 아니라 산산이 조각난다.
이대로, 왕비가 원하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무래도 보통 분이 아니시니까 준비를 미리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저는 제 요리를 먹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 제대로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한길의 말에 왕비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떤 사람? 글쎄? 레이디의 명예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분이지. 목숨이 보장되는 한은 말이지. 프랑스의 정당한 왕임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나라를 경멸하고, 그러면서 그 나라의 요리와 과일은 모두 탐하는 분이고. 영국의 마지막 남은 기사지. 진정한 기사.”
아무리 봐도 비꼬는 말투다.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일국의 국왕에 대해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누가 듣든지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었다.
‘저런 소리를 마구 하니 명이 짧아지는 거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단 알겠습니다.”
“왜, 또 필요한 건 없고? 이런 얘기라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 새로운 조리도구를 만들고 싶은데 제작을 도와줄 만한 목수가 있을까요?”
“목수? 뭘 만들려고?”
“새로운 도구라 설명드려도 아마 모르실 겁니다.”
왕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에서 거친 바람을 뿜어냈지만, 허가는 해줬다.
“시종에게 말해두지. 또 필요한 게 더 있나?”
어디 한 번 더 말해보라는 듯이 빈정대는 말투였지만, 한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 도서관에 가보고 싶습니다.”
“도서관?”
“글은 읽을 줄 아냐?”
“네.”
아마도.
국왕을 만족시키려면, 조금 더 알아야 한다. 이곳에 대해서. 이곳의 문화에 대해서.
단순히 신기한 음식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노력하고 싶었고.
“또 더 있나?”
“그게 답니다. 지금으로서는.”
“과한 욕심은 좋지 않아. 그러다 정말 목을 잃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도록.”
“네, 불만이 있으시면 언제든 거둬가시죠.”
툭하면 돌려서 목을 자르겠다는 협박을 하지만,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저 여자는 모른다.
진짜로 목이 잘리는 건 자신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고작 3개월 후에.
일단은 그것부터 막아야 한다.
< 101. 할 일이 태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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