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03)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03화(103/325)
< 103. 식탁을 채워라! >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잘 지냈네.”
“건강해 보이시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불린의 안부 인사에 헨리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떨떠름한 표정과 냉담한 태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보지?’
마지막으로 헨리를 본 건 약 2주 전.
헨리가 병문안차 찾아왔을 때다.
항상 그렇듯, 그날도 싸웠다.
하지만 여태까지 한 싸움과는 결이 달랐다.
불린이 마지막으로 헨리에게 했던 말은, ‘계집질이 얼마나 좋았으면 아들까지 갖다 바치냐’였다.
스스로도 상처가 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쏟아져 나오는 폭언을 멈출 수 없었다.
우연히 들어간 방에서, 헨리의 무릎 위에 앉아있던 그 계집의 모습을 봤을 때….. 속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에는, 그게 자신의 배 안에 있는 아이의 생명줄인지 몰랐다.
상처 입은 표정을 짓던 헨리는, 나중에는 도리어 역정을 냈다.
‘내 아들이 태어난다 해도, 그대를 통해서 태어나지는 않을 것일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헨리는 정말 발길을 끊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이 주일…..
시간이 지날수록, 불린 속에 있던 작은 불안의 불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불안에서 두려움으로, 두려움에서 공포로.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이대로 폐위 된다면?
다른 그 무엇보다, 엘리자베스가 사생아가 된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눌러 담으며 불린은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그리고 정신없이 양고기 왕관을 뜯어 먹는 헨리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야말로 전하의 품격에 맞는 요리 아닙니까?”
“모양도 신기하지만, 맛도 좋군. 이 바삭바삭 소리 나면서 씹히는 맛이 일품이네.”
단답형으로만 답하던 헨리의 말이 길어졌다.
일단은, 저 속 좁은 남자의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
가능할 거다.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까.
‘아서왕이라니, 그자는 알고 말한 걸까?’
요리사는 불린에게 이번에 차릴 코스 요리는 아서왕의 설화에서 따온 요리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
그리고.
아서왕은 헨리에게 특별한 존재다.
어떻게 보면, 헨리가 불린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애증의 관계.
연애하던 시절, 헨리는 불린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었다. 헨리가 아직 어린 소년일 때 받았던 상처에 대한 이야기였다.
헨리의 아버지인 전대 국왕, 헨리 7세는 헨리를 없는 취급 했다고 한다. 차기 국왕이 될 이는 헨리의 형이었으니까.
형의 이름은 아서.
아서왕에서 따온 이름이다.
헨리 7세는 즉위하자마자 계보학자를 고용하여 튜더 왕조가 아서왕의 후예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영국을 이끌어갈 차기 왕은, 천년 만에 귀환한 아서왕이기를 바란다며, 큰아들의 이름을 아서로 지었다.
아서는 윈체스터 성에서 세례를 받았다.
전설의 아서왕 원탁이 남아있는 곳이다.
물론, 윈체스터 성에 있는 원탁은 더 이상 식탁으로의 역할은 못 한다. 상판만 벽걸이처럼 걸어 장식하고 있다.
그렇게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자란 아서는, 결국 왕이 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졸지에 헨리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왕이 되기 위해 필요한 교육 하나 받지 않았는데.
헨리에게 있어 아서는 동경의 대상이자, 열등감을 자극하는 존재였다.
즉위하자마자 한 행동만 봐도 알 수 있다.
헨리는 윈체스터에 걸려있는 아서왕의 원탁 벽걸이를 다시 칠하도록 명했다.
원탁의 한가운데에는 튜더 장미를 그리고, 원탁의 상단에는 아서왕을 그려 넣었다.
원탁 속 아서왕은, 헨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서왕의 식탁입니다.”
요리사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헨리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럼 이만, 식사를 즐기십시오.”
그리고 요리사가 인사를 하고 물러서자, 그 말을 신호로. 헨리와 불린 앞에 세팅된 테이블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득!
바닥에 테이블 다리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테이블 아래 숨어있던 하인들이, 조금씩 테이블을 옮기면서 바닥에 긁히는 소리다.
이제, 본격적인 무대의 시작이다.
#
‘피곤하군.’
요리는 맛있지만, 배가 불러오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헨리는 저도 모르게 크게 하품을 했다.
‘하긴, 이제는 나도 젊지 않으니까.’
헨리가 즉위한 지도 27년이 지났다.
열여덟 청년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버렸다.
올해 초에 있던 낙마 사고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헨리는 승마가 특기였는데, 말에서 굴러떨어져 버렸다. 그것도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라, 말이 자신의 위에 쓰러지는 바람에 정신까지 잃고 말았다.
그 사고로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제 자신도 젊지 않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후계자도 없는 상황에서…..
“이건, 그야말로 전하의 품격에 맞는 요리 아닙니까?”
불린은 특유의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교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녀의 작은 미소와 유혹적인 웃음에 기대감을 품고 마음이 들떴었는데.
지금은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폭풍 같은 불린에 비하면, 시무어는 얼마나 조용하고 평온한가. 치유되는 여인을 그리워하던 그때,
“아서 왕의 식탁입니다.”
뜬금없이 요리사의 입에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나왔다.
드드드드득!
그리고 테이블이 움직였다.
마법처럼 혼자 기어가는 테이블이지만, 진짜 마법일 리 없다.
저 아래에 사람이 있는 거다.
자신이 식사하는 내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테이블 아래에 숨어있었던 거다.
예전 같으면 이런 장난과 깜짝 이벤트를 즐겼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화가 났다.
저 안에 누가 있을 줄 알고!
만에 하나 왕권에 불만을 느끼고 검이라도 숨기는 사람이었다면?
한마디 하려고 할 때, 어깨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불린이었다.
“오늘은 모처럼 오셨으니까 제가 작은 공연을 준비해 봤습니다.”
“공연?”
“요즘 이런 놀이를 피하신다고 들은 것 같아서요. 너무 그렇게 조용히 계시다가는 우울증 걸리십니다.”
“이제는 이런 놀이를 할 나이가 아니니까.”
퉁명스럽게 불린에게 쏘아붙일 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저 멀리 기어간 식탁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유유하게 헤엄을 치던 백조가 갑자기 날갯짓을 하듯. 식탁의 양옆에서 날개가 펼쳐졌다.
그리고.
기다란 직사각형 식탁은 동그라미가 되었다.
원탁이다.
“아서왕의 식탁이니까요.”
불린은 특유의 끈적한 웃음을 흘렸다.
원탁 앞에 자리를 잡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꿈꿔왔던, 그 식탁이다.
이런 식탁을 갖고 싶었다.
이런 식탁에 충성을 맹세한 형제 같은 신하들을 가득 채우고…..
“컴프턴, 자네도 와서 함께 자리하지.”
“제.. 제가 어찌 감히! 전하와 한자리에 앉겠습니까.”
“어서. 원탁 아닌가. 이곳에서는 서열도 위계도 없지.”
헨리는 옆에 서 있던 컴프턴에게 제안하자, 시녀들은 서둘러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컴프턴은 감격해 머지않은 표정을 지었고.
“어쩜, 전하는 참 마음도 너르시네요. 마치 아서왕의 환생 같습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의 자애로움에는 항상 놀라고 있지요!”
원탁이 비어있는 모습이 허전해서 부른 건데, 자신이 생각해도 그림이 좋다.
국왕이 원탁에 신하를 앉히다니…..
관객이 둘 뿐인 게 아쉬울 정도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방 안에 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저건, 해밀턴 경 아닌가?’
왕비의 알현실을 자주 찾아오는 하급 귀족이다.
해밀턴은 평소와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기다란 중세 느낌의 드레스 복장과 하얀 수염을 붙이고 있다.
“멀린,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역시, 멀린이군.”
“오늘은 영국의 위상을 높여줄 위대한 군주를 위해, 선물을 준비해 봤습니다.”
멀린은 두 손에 거대한 쟁반을 들고 있었다.
원형 뚜껑이 덮여 있는 쟁반.
아마 첫 번째 요리일 거다.
쟁반을 헨리의 자리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자,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달달한 사과나무의 훈향이 섞인 안개가 뚜껑 아래에 가둬져 있었던 것.
역시, 마법사 멀린의 요리답게 신비로웠다.
쟁반 한가운데에는 연한 갈색의 스튜가 담겨 있었다. 곡물을 푹 고아 만든 일반적인 스튜보다는 질감이 곱다.
“해물 수프라는 것입니다.”
스튜의 위에는 단 하나의 조개껍데기가 장식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옴폭하게 파인 껍데기는 마치….
“호수 위에 뜬 배로군.”
“잘 아시는군요.”
아서가 멀린의 조언을 듣고 찾아갔던 호수! 그걸 형상화한 요리였다.
이곳에서 엑스칼리버를 얻었더랬지.
“그대도 먹어보지.”
“제가 어찌 감히 입을 대겠습니까. 이 호수는, 오로지 선택받은 자만이 갈 수 있는걸요.”
불린에게도 스튜를 권했지만, 웬일로 불린이 사양을 했다.
스튜의 맛은 푸근했다.
따뜻하면서도 묵직하고, 크리미하면서도 알찼다. 곡물이나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스튜는 흔치 않은데, 입안에 씹히는 덩어리가 하나 없는데도 든든해지는 맛이었다.
“어으으….”
절로 긴 숨을 내뱉게 되는 맛.
은은하게 감칠맛이 배어 있는 스프는, 위벽을 부드럽게 코팅해주었다.
물처럼 경박스럽게 찰박거리지도 않았고, 스튜처럼 무작스럽게 씹히지도 않고.
무게를 가진 액체가 스르륵 하고 부드럽게 혀를 지나 목구멍 안으로 흘러가는 감촉이 좋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왕비의 시녀.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 모를 시녀는, 하늘거리는 파란 천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호수의 여인이다.
“영국의 구세주가 될 그대를 위한 선물일세.”
호수의 여인은 길쭉한 물건을 헨리에게 건네주었다.
목검.
급하게 만들었는지, 정교한 무늬가 세공되어 있지 않았지만, 손잡이에 제법 큰 보석 알이 박혀 있었다.
호수의 여인은 검을 건네자마자 사라졌고, 헨리는 멀린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와서 자네도 자리에 앉지.”
“저도 초청해 주시는 겁니까.”
“내 오른팔 아닌가.”
원탁이 또 조금씩 채워졌다. 헨리가 흐뭇한 웃음을 짓던 그때,
“전하!!!!”
큰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날쌘 몸놀림으로 달리는 남자는 젊었다.
묘기를 부리듯이 여기저기 설치된 장애물을 기가 막히게 피하기도하고.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저 몸놀림을 보니, 누군지 알겠다.
“스길티 라이트푸트(Sgilti Lightfoot)군.”
“그렇습니다, 전하.”
헨리가 이름을 대자, 남자는 동작을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라이트푸트.
아서왕의 전령이다.
몸이 너무 가벼워서 잔디를 밟아도 잔디가 구부러지지 않는다는, 특이한 마법을 가진 이로, 숲에 심어진 나무 위를 달린다고도 한다.
그의 마법 비결은 바로 신발.
그런데….
“왜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있지?”
“아! 잊고 왔나 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라이트푸트는 서둘러 주방과 연결된 계단으로 달려가더니,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똑같이 뚜껑이 달린 쟁반.
다음 요리다.
아스파라거스가 잔디처럼 깔려있고, 그 위에 갈색 덩어리가 올려있는, 신기한 요리. 갈색 덩어리는 조금 투박한 신발 같기도 했다.
“나보고 신발을 먹으라는 건가?”
“일반 신발이 아니죠. 생각보다 맛이 좋습니다. 마법의 물건이기도 하고요.”
능청스럽게 농을 하는 라이트푸트를 향해 껄껄 웃어준 후, 맛을 보았다.
신발처럼 보인 갈색 덩어리는 빵이었다.
빵 안에는 소고기가 있었고.
“비프 웰링턴이라는 요리입니다.”
요리의 이름은 생소했지만, 맛은 기가 막혔다.
촉촉한 소고기와 바삭한 빵, 그 사이에 뭔가 기름진 버섯 맛이 느껴졌다. 아스파라거스 역시, 풋내 없이 깊은 맛을 내고 있었다.
평소에 먹는 삶은 소고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드러우면서 촉촉하고 맛이 진한 소고기 요리였다.
“어서 와서 앉지 않고 뭐하나.”
“저도 거둬주시겠습니까?”
“영국 어디에서 자네만 한 심부름꾼을 찾겠나.”
자리 하나가 더 채워졌다.
“전하, 맥주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시녀가 잔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오랜만에 먹는 맥주였다.
지금 먹는 진한 맛의 맥주가 아니라 조금 연한 맛의 맥주. 어린아이들이 취하지 않도록, 연하게 타서 주는 그 맥주였다.
갑자기 묘한 향수가 덮쳐오면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서왕의 설화를 읽으며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그 시절로.
‘다음은 누구지?’
설레는 마음으로 주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바라보자, 붉은색이 보였다.
붉은 갑옷의 기사!
“아서는 어디 있는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던 붉은 갑옷의 기사는, 헨리를 발견하고는 단숨에 달려왔다.
“이건 자네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잔이 아니지! 내가 가져가겠네. 언젠가 자네의 땅도 국민도 다 앗아갈 테니 그날을 기다리고 있게!”
붉은 갑옷의 기사는 헨리의 잔을 낚아채고는 저 멀리 달아났다.
“감히, 국왕의 잔을!”
“게 서지 못할까!”
원탁에 앉은 컴프턴과 멀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헨리는 손을 들어 그들을 말렸다.
그래.
이 이야기도 아는 이야기다.
여기서 아서왕은….
“그만하게. 고작 잔이지 않나. 잔 하나 때문에 내 귀중한 신하를 잃을 수는 없네.”
그 말을 하면서도 속이 간질였다.
그리고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대사를 외친 후에 등장하는 인물은, 헨리가 좋아하는 인물이다.
“제가 전하의 잔을 가져오겠습니다!”
방 안에 들어온 젊은 기사.
검술 천재이자, 아서 왕의 기사 중 용맹함으로 이름을 날린, 퍼시벌(Percival) 경이다.
“목숨을 걸 각오는 되어 있는가?”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때는 붉은 갑옷을 입고 있을지도 모르니 너무 놀라진 마시고요.”
퍼시벌 특유의 아이 같은, 장난스러움이 묻은 답변이었다.
퍼시벌은 쏜살같이 달려갔다.
방 한쪽에 숨어있는 붉은 갑옷의 기사에게로.
탁! 타닥!
두 명의 기사가 전투를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기다란 창을 들면서.
붉은 갑옷의 기사는 정신없이 창을 휘둘렀지만,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많았다. 퍼시벌은 모든 공격을 가볍게 막거나 흘려보냈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퍼시벌이 땅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탁!
일격에 약점을 정확히 찌르자, 붉은 갑옷의 기사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렇지!”
절로 박수가 나오는 그런 동작이었다.
갑자기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예전에는 헨리도 검술이나 창술 경기에 많이 참여했었는데….
쓰러진 기사 옆에서 무언가를 찾던 퍼시벌은, 조만간 쟁반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전하께 바칩니다.”
뚜껑 아래에는 방금 본 전투의 전리품이 들어있었다.
국왕의 잔.
그리고 빨간 갑옷.
철로 만든 갑옷이 아니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하지만, 이 붉은 색은….
“랍스터구이군.”
랍스터는 절묘한 식감을 갖고 있었다.
보통은 조금 질기기 마련인데, 탱글탱글하게 탄력이 있으면서도 뜯을 때마다 입 안에 해물 향이 가득한 물이 고였다.
버터와 허브 향이 어우러져 맛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 신선한 식감!
이 생동감은, 방금 본 전투를 그대로 떠올리게 했다.
“아, 그대도 자리를 함께해주게.”
너무 정신없이 먹느라 아직 퍼시블을 거두지 못했었다.
식탁이 또다시 채워졌다.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묘한 짜릿함과 쾌감이 심장을 찔렀다.
멀린, 라이트푸트, 퍼시벌…..
다음은 역시 랜슬럿이려나?
아니면 키도 좋아하는 기사였는데….
다음은 누구지?
기대에 부풀어 다시 주방으로 향하는 층계를 바라보는데,
쿵! 쿵! 쿵!
아래층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등장한 이는, 거구의 남자.
‘모튼이군.’
이 궁전에서는 헨리도 체격이 큰 편에 속하는데, 헨리보다도 키가 큰 남자는 모튼 남작밖에 없다.
남작은 야만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짐승의 털을 엮어서 만든 망토를 걸치고 있었고.
이건 누구였더라?
“누가 내 앞을 허락도 없이 지나가는가!”
야만인은 눈을 부라리며 원탁으로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아래층에서 북소리가 울려왔다.
“네 놈의 수염을 내놓지 못할까!!!”
성량이 엄청나다.
소리의 울림이 커서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계속 들려오는 북소리 때문도 있지만.
“레토(Retho)인가?”
“그렇다! 얌전히 네놈의 수염을 건네준다면 목숨만은 살려두도록 하지!”
아르바이우스 산에 살고 있는 거인, 레토.
그는 자신의 영역을 지나가는 왕들에게 시비를 걸고 그 목숨을 거둬가는 괴물이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건, 그동안 그의 손에 죽어간 왕들의 수염을 엮어서 만든 망토다.
“전하, 저에게 저 건방진 놈의 목을 거둘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 되었네.”
용맹한 퍼시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헨리는 손으로 그를 말렸다.
그리고 아까 자신에게 주어진 엑스칼리버를 꼭 쥐어 들고 일어섰다.
온몸이 근질근질해서 더 참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 게다가, 이 설화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아서다.
“전하, 퍼시벌 경에게 맡기시는 게 어떨지요. 저런 흉측한 괴물이 전하의 귀한 옥체를 해할까 두렵습니다.”
자신을 말리는 불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눈에는 근심과 두려움.
그러고 보니.
안 그래도 가냘픈 여인인데, 오늘따라 더 가냘파 보인다. 푸짐하게 통통한 시무어와 달리. 연약한 몸을 한 여인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금방 돌아오겠소.”
헨리는 검을 쥐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기엔 뭔가 허전하다.
헨리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불린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의 가호를 담은 손수건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불린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건네주었고, 헨리는 그 손수건을 소중히 받아들였다.
라벤더 향이 우아하게 풍기는 손수건.
뺨에 손수건을 문지르고, 가볍게 그 위에 입맞춤한 후, 마상경기 시합에서 하듯, 소매에 손수건을 묶었다.
“내 꼭 승리하고 돌아오리다.”
“조심하세요.”
“예스, 마이 레이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쥐고 무대로 나가니, 온몸에 힘이 솟아났다.
최고의 기분이다.
정말 오랜만에.
< 103. 식탁을 채워라! > 끝
ⓒ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