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Chef with Hidden Quest RAW novel - Chapter (104)
히든 퀘스트로 탑셰프-104화(104/325)
< 104. 그럼, 사양 않고! >
헨리는 아직 한쪽 다리가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인은 헨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저… 전하! 항, 항복합니다!”
울상을 짓는 거인을 내려다보며 헨리는 온몸에 뿌듯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놈의 죄가 무엇인지 알렸다?”
“그러믄요.”
“망토를 내놔라.”
거인은 순순히 망토를 벗어 헨리에게 건네주었다.
까칠까칠하고 거친 질감의 망토는 헨리가 평소에 입는 고급 모피와 비교하면 저급했지만, 헨리는 망설임 없이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레토 거인의 망토는 괴력을 주는 망토.
그래서인지, 온몸에서 힘이 불끈불끈 솟아났다.
자신은 늙어가는 왕이 아니었다.
전설 속의 기사!
아니, 그 기사의 후예다.
“썩 물러나지 못할까!”
헨리가 고성을 내자, 거인은 후다닥 달아났다.
위풍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니, 원탁에 앉아있던 모두가 기립해서 손뼉을 치고 있었다.
“대단하십니다, 전하!”
“역시 전설적인 기사다운 기개와 기백입니다!”
“말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전투였습니다!”
찬미하는 신하들을 뒤로하고, 헨리는 자신의 레이디에게로 다가갔다.
“마이 레이디, 당신을 기리기 위해 이 손수건은 제가 갖고 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전하. 저 끔찍한 괴물을 물리쳐 주셨는걸요. 정말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불린을 보니, 속에서 다시 불끈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이런 젊음의 기운을 느끼는 게 얼마 만인가!
잠시 후, 패배자가 의기소침하게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모튼 경의 얼굴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다. 조금 미안해질 정도로.
“제… 패배를 인정합니다. 이건, 꽈배기라는 요리입니다.”
이번 요리는 머리를 땋듯이 배배 꼬아서 만든 빵이었다. 수염을 꼬아서 만든 거인의 망토와 유사했다.
인원수에 맞춰서 빵이 준비되어 있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자, 각자 하나씩 들게.”
신하들과 레이디에게 자신의 전리품을 나눠줄 때의 쾌감.
이 얼마나 자애롭고 남자다운 군주란 말인가!
빵은 신기한 맛이었다.
기름을 묻혀서 구웠는지 고소함이 남달랐고, 겉에 묻어있는 설탕과도 잘 어우러졌다.
그대로 베어 먹어도 좋지만, 양손으로 들고 결을 따라 죽죽 길게 찢어서 먹으니 더 맛있었다.
“다음!”
기분 좋은 취기가 온몸에 퍼지듯, 혈관을 타고 황홀감이 퍼졌다.
“나와 목 겨루기 시합을 할 사람은 없는가! 이 도끼로 내 머리를 자르면 일 년 후, 나도 똑같이 돌려주도록 하지!”
녹기사!
갑옷, 피부, 수염, 머리카락까지 녹색으로 물들인 기사다. 녹기사는, 섬뜩한 나무 도끼를 들고 있었다.
“원탁의 기사는 용맹하다더니, 겁쟁이뿐이구나!”
헨리는 주먹을 꽉 쥐며 숨을 죽였다.
이다음 등장인물도 아는 인물이다.
역시, 젊은 기사가 방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하!”
“부탁하네, 가웨인(Gawain).”
아서의 조카인 원탁의 기사, 가웨인 경!
가웨인은 도끼를 받아들고 망설임 없이 녹기사를 향해 휘둘렀다.
데굴데굴.
녹색의 무언가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멜론이다.
하긴, 진짜 목을 자를 수는 없으니까.
녹기사는 떨어진 자신의 머리를 집어 들더니 호쾌하게 웃었다.
“좋은 공격이었네. 내년 이맘때, 나를 찾아 녹색 예배당으로 오게! 내, 똑같이 돌려주도록 하지!”
녹기사가 떠나자, 가웨인이 헨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녹기사와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아니 됩니다! 가시면…. 목숨을 잃습니다.”
옆에서 눈물을 훔치는 왕비를 보며, 헨리는 새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왜 이 여자를 독한 여자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토록 나약하고 심약한 여인 것을.
“목숨을 잃더라도 약조는 지켜야 합니다. 기사의 명예를 위해서!”
가웨인이 왕비의 애원을 거절하자, 다시 한번 짜르르하고 전율이 온몸을 덮쳤다.
“부디 자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후로 펼쳐진 것은 가웨인의 여정.
험난한 날씨와 지형을 뚫고 가던 가웨인은, 약속의 장소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성에 도착한다.
성주 버틸락(Bertilak)은 가웨인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
“모처럼의 손님이 왔으니 내가 직접 접대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사냥이 계획되어 있네. 대신 내 아내가 자네를 돌봐줄 걸세.”
그리고 성주는 게임을 제안한다.
“나는 그날의 사냥감을 자네에게 줄 터이니 자네는 성에서 받은 선물을 나에게 주는 게 어떻겠나. 매일 밤, 서로 교환하세.”
“좋습니다.”
성주가 떠나자, 여인이 등장한다.
영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성주의 아내!
아내는 가웨인을 유혹하지만, 가웨인은 뿌리친다. 하지만, 차마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매몰차게 굴지 못한다.
“정… 저의 마음을 받아주실 수 없으시다면, 단 한 번만, 키스를 허락해 주십시오.”
결국, 가웨인은 그녀와 키스를 나누고, 밤에 돌아온 성주에게 솔직히 털어놓는다.
“약조는 약조지.”
성주는 그날의 사냥감을 가웨인에게 주고, 가웨인은 성주에게 키스를 돌려준다.
이틀째도 마찬가지.
가웨인은 아내의 키스를 받고 다시 성주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마지막 날!
“기사님의 마음이 닫혀있는 걸 알겠습니다.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 당신의 장갑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가웨인은 장갑을 건네주고, 성주의 아내는 녹색 벨트를 선물해 준다.
“이것은 부적입니다. 이 부적을 착용하면 몸이 다치는 일이 없을 겁니다.”
가웨인은 성주에게 키스를 돌려주지만, 벨트는 숨긴다.
그렇지!
아무리 용감해도, 인간은 이토록 나약한 존재인 것을!
성주와 작별 인사를 나눈 가웨인은, 다음날 녹기사를 만난다. 약조를 지키고 자신의 목을 바치기 위해.
“이번에는 내 차례군. 각오하게!”
녹기사는 가웨인의 목을 향해 도끼를 세차게 휘두른다.
휘익!
휘이익!
하지만, 두 번이나 일부러 비껴간다.
장난이라도 치듯이.
휘이익!
세 번째 도끼질은 가웨인의 목에 작은 생채기만 낸다. 목숨을 각오하던 가웨인은 화를 낸다.
“내 목을 내어줄 각오를 하고 왔는데, 이렇게 장난을 칠 거면 차라리 결투를 하지!”
“나를 못 알아보겠나?”
녹기사가 갑옷을 벗으면…..
그렇지!
그 정체는 바로 버틸락 성주!
“처음 두 번의 도끼질은, 그대가 나에게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으니 일부로 봐준 것일세. 하지만 세 번째에는 자네도 솔직하지 못했지.”
가웨인은 품에 숨겨둔 벨트를 꺼내며 눈물을 흘린다. 한순간의 나약함으로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음을 후회하며.
그리고 녹기사는 가웨인을 위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여전히 훌륭한 기사일세. 이 녹색 벨트는 우리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가져가게나.”
가웨인은 녹기사와 헤어지고 다시 헨리와 원탁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땅에 엎드리며 헨리에게 호소했다.
“저는 나약한 겁쟁이입니다!”
자, 이때 아서왕은….
“그렇지 않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용기 있는 행동이지. 이 교훈을 잊지 않도록 우리 모두 오늘부터 녹색 벨트를 착용하기로 하지.”
이 얼마나 현명한 군주란 말인가!
헨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방에서 다음 요리가 나왔다.
이번 요리는 멜론이었다.
노란 과육 대신, 녹색 껍질이 보이도록 엎어둔 멜론은 녹색 벨트와 제법 유사했다.
특이하게도 솔트 비프를 얇게 썰어 과육에 돌돌 말아놓은 생김새였는데, 짠맛과 단맛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전하, 마지막 요리입니다.”
멜론을 즐기고 있는데, 멀린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향한 멀린은, 마지막 요리를 들고 왔다.
아직….
조금 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린은 가차 없이 요리의 뚜껑을 열었다.
“뭐지, 이건?”
조금 특이한 요리였다.
지금까지 나온 요리도 다 그렇지만.
접시 위에는 사과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나뭇가지가 세워져 있었다. 나무 위에는 하얀 구름이 걸쳐 있었고.
이건 뭘까…
“아! 아발론이군.”
“그렇습니다, 전하.”
아서왕이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찾은 전설의 섬. 사과나무가 잔뜩 심겨 있다는 마법의 땅.
전설에 의하면, 아서왕은 여전히 아발론에 머물고 있고, 언젠가는 다시 영국으로 귀환할 거다.
“이 요리는 저희가 차마 먹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전하만이 드실 수 있는 요리입니다.”
왕비의 말에 옆에 있는 다른 신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미련이 뚝뚝 떨어지지만, 그래도 헨리는 마지막 요리를 맛보았다.
접시 위의 사과는 신기한 사과였다.
표면이 거울처럼 반짝였는데, 사과 맛이 느껴짐과 동시에 폭발적인 단맛이 느껴졌다.
약간 딱딱한 사과 껍질 안에는, 으깬 거위 간이 있었다.
“폼도르(pomme dorre)로군.”
“그렇습니다.”
“페로가 만든 것과는 모양이 다른데?”
폼도르는 금 사과라는 뜻이다.
사과인 줄 알고 먹었는데 사실은 고기였다…… 하는 재미를 주는 요리다.
헨리의 요리사가 만들어준 금 사과는 다진 고기를 사용하는데, 이 사과는 거위 간을 사용했다. 투박한 고기와 다르게, 거위 간은 벨벳처럼 고급스럽게 혀 안에 뭉개졌다.
페로의 금 사과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든 목검이라면, 이 고기 사과는 장인이 오랜 세월 다듬어서 만든 그런 세련됨이 있었다.
“이 구름도 먹는 건가?”
“물론이죠.”
함께 나온 구름은 신비로웠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사르르 녹는 마법 같은 식감. 혀에 차르르 감기는 단맛.
마법 같은 하루에 딱 어울리는, 마법 같은 마무리였다.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어느새 자신의 앞에 요리사가 무릎을 꿇으며 묻고 있었다.
정말……
끝이다.
“근래 먹은 요리 중 최고였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네, 윈체스터 성에 걸려있는 원탁에 자리가 몇 개 있는지 아나?”
“잘 모릅니다.”
“스물네 개지.”
그런데 왜 고작 네 명만 준비한 건지.
저도 모르게 책망하게 되었지만, 요리사는 당당했다.
“언제든 다시 오시면 채워드리겠습니다.”
“언제든?”
“왕비 전하가 허락하신다면요. 저는 왕비 전하의 요리사니까요.”
요리사의 말에 불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쳐졌다.
“언제든 오십시오, 전하.”
이 요리를 먹으려면 왕비를 보러 와야 한다.
“자네, 내 주방으로 옮길 생각은 없는가?”
왕비에 대한 예의는 아니지만, 이 요리사는 데려오고 싶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명령이라면 가겠지만,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신다면,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
물론, 강요할 수는 없다.
적어도 아서왕의 자리에 앉아있는 지금은.
그리고….
신기하게 감히 국왕의 명령을 어겼는데, 화가 나지 않았다.
툭하면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는지 매달리는 신하들에 비하면 이 얼마나 고귀한가! 충의가 있는 요리사라니! 그야말로 아서왕의 요리사다.
“최근에 몇몇 수도원들이 폐쇄된 것은 알고 있나.”
“바깥 상황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 브롬리라는 수도원이라는 곳이 있지. 런던에 자리해서 위치도 좋고.”
“그렇군요.”
“오늘부터 그대의 것이다.”
“…… 감사합니다.”
요리사는 고개를 숙였지만, 그다지 욕심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헨리는 속으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뭘 해야 저놈을 데려올 수 있을까…..
#
만찬이 끝난 후, 모든 배우는 왕비의 알현실에서 탈의했다.
한길은 가장 먼저 복숭아처럼 멍이 잔뜩 든 모튼 남작에게 다가갔다. 원래 대본에서는 퍼시벌이 나설 생각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해버렸다.
“죄송합니다. 설마, 전하께서 직접 나서실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아니, 괜찮네!”
“그래도 많이 다치셨는걸요.”
“아니, 진짜 신경 쓰지 말게! 또 전하께서 이런 놀이를 찾으시면 꼭 초청해 주게나. 어떤 배역이든 맡을 터이니. 오늘 일은 진짜 전혀 마음에 두지 말고,”
남작은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한길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모튼 남작이 떠나자, 이번에는 노리스 남작이 다가왔다.
한길을 소개해준 대가로, 그는 나름 주연인 퍼시벌 경의 역할을 맡았었다. 고정 출연진인 셈이다.
귀족 출신 배우들을 모두 보내고, 마지막으로 주방 정리까지 마무리하니, 요리사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때, 시녀장이 다시 주방으로 내려왔다.
“마스터 쿡! 왕비 전하께서 야식을 준비해 달라고 하십니다.”
“방금 전까지 식사를 하셨는데요?”
“전하께서 드실 게 아니라… 그… 엘리자베스 저하께서 울음을 멈추지 않으셔서….”
시녀장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금방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다들 들어가고. 이건 내가 만들 테니.”
한길은 주방 요리사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홀로 남아 엘리자베스를 위한 간식을 만들었다.
지난 며칠.
엘리자베스의 편식을 고치기 위해 작은 장난감 같은 음식을 만들었는데, 효과가 좋았다.
서둘러 계란을 삶아 작은 칼집을 내고 토끼 귀를 만들어 꽂았다. 사과는 동그랗게 깎아서 거북이 등껍질 모양으로 만들고.
그렇게 재빨리 마련한 간식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엘리자베스가 왕비의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엄마가 미안해. 앞으로는 엘리자베스도 같이 가자, 알겠지?”
“으아앙! 시러! 엄마 미워! ”
아무래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토라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토라질 일인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저 나이에는 분리 불안이 있을 수 있다.
몇 년간 떨어진 어미와 다시 살게 되었는데, 또 갑자기 몇 시간 동안 사라지니 불안한 거다. 아직 그런 나이니까.
왕비는 한길이 건넨 그릇에서 토끼를 집어 들고, 엘리자베스의 앞에 내밀었다.
“리지, 여기 봐! 토끼 왔네!”
“토끼도….시러!”
“이렇게 귀여운 토끼가 정말 싫다고?”
엘리자베스는 왕비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빼꼼 들었지만, 아직도 화를 풀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고집스럽게 입을 삐죽 내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눈은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 잡아봐.”
“끅… 토끼… 싫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작은 손은 꼼지락대며 토끼를 집어 들었다. 몇 분 후, 토끼를 쓰다듬으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이만.”
“아니, 잠시!”
왕비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찬란할 정도로 눈부신 웃음.
“고맙네.”
“아… 아닙니다.”
아마도 국왕의 제안을 거절한 것 때문이다.
한길의 입장에서는, 퀘스트를 거역할 수 없어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물론, 왕비와 엘리자베스에 대한 걱정도 없진 않았지만…..
“국왕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간이 부었다고밖에 볼 수 없지. 목이 떨어지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니고.”
“그러는 전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왜?”
“아서왕의 레이디라면, 기네비어(Guinevere) 아닙니까.”
왕비가 대본에 없던 레이디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몰래 지켜보던 한길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었다.
기네비어는 아서왕의 파멸을 불러온 여인.
비극의 중심에 있는 여성인데…..
랜슬럿과 불륜을 저지르고, 심지어 아서왕의 죽음에도 원인을 제공한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레이디 역을 맡겠다는 건지….
정말 정신이 나갔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한길의 표정을 읽은 왕비는, 마치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자네는, 연애해본 적이 없나 보지?”
“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거든. 아서왕에게는 기네비어 외에도 수많은 여인이 있었지만, 그 여인들은 다 잊혔지. 기네비어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쳤고.”
“…..”
“조금 모가 나도 돼. 배경에 묻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왕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혼자서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길에게 날렸다.
“자네는 가웨인 경의 얘기를 전부는 모르나 보군.”
가웨인 경의 이야기는 왕비가 넣어달라고 특별히 부탁해서 넣은 이야기였다. 시간이 없어 대충, 요리를 형상화할 정도만 읽어두었다.
“녹기사는 사실 왕비를 모함하려는 세력이 보낸 이였지.”
“그렇군요.”
“어쨌든. 내일도 요리를 만들 수 있겠나? 필요하면 아서왕의 스토리는 내가 알려주도록 하지. 일단 국왕이 매일 찾아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고 있다.
이건 마치….
“아라비안나이트 같군요.”
“아랍…?”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
돌아서는 한길을, 왕비가 다시 붙잡았다.
“자네가 받은 수도원, 빨리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일 오전에 다녀올 텐가? 내가 말을 따로 준비해주지.”
“아니, 괜찮습니다.”
수도원은 국왕이 한길에게 하사한 선물이지만, 한길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퀘스트 속 세상에서 재산을 모아봐야 뭣하나. 현실에서 쓰지도 못할 텐데.
하지만 왕비는 정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자네라면 좋아할 줄 알았더니만.”
“왜죠?”
“수도원은 허브나 약재 같은 재료들이 많으니까. 수도승들이 오랜 세월 대대로 지켜온 서고도 있고.”
“…. 그러면 사양 않고, 다녀오겠습니다.”
< 104. 그럼, 사양 않고! > 끝
ⓒ (104)